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이하 예술극장)이 문을 열었다. 개관 페스티벌을 위해 준비된 33편의 작품 중 반가운 이름들을 발견하고 이들의 작품을 만나러 광주로 갔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열병의 방>과 차이밍량의 <당나라 승려>, 두 작품의 감상기와 함께 감독들의 인터뷰를 전한다. 예술극장의 이모저모도 짧게 알아봤다. 영화가 무엇인지, 나아가 예술이 무엇인지 새삼 질문을 던질 수 있었던 시간, 동시대 아시아 작가들의 현주소를 만나고 싶다면 광주로 가자.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침묵하라.” 말은 유리와 같아 다룰수록 조심스럽다. 조금만 소홀히 해도 금이 가고, 깨진 후엔 날카로운 파편에 다치기 쉽다.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철학논고>의 말미에 언급한 이 유명한 명제는 세계와 실제로 대응하지 않는 언어의 한계를 짚어낸다. 체험하지 않으면 온전히 전달할 수 없는 것이 있음에도 막연히 추상화시켜 규정하는 사이 의미가 손상되는 것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하는 이유
하지만 돌이켜 생각하건대 나는 또다시 말의 함정에 빠졌던 것 같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침묵하라는 건 의식의 저편으로 치워버리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도리어 말할 수 없는 대상, 우리를 침묵하게 만드는 감정의 중요함을 강조한 표현이다. 언어로 정확히 풀어낼 수 없을지언정 분명 존재하는 것들, 그 불가해함 때문에 결국 우리를 침묵하게 만드는 것들. 이를테면 아름다움, 꿈, 몽상, 깨달음 등은 어떻게 전달해야 할까. 어쩌면 그래서 예술이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다. 몇 마디 단어 안에 포획할 수 없는 어떤 감정들을 끝내 설명해내기 위해 우리는 다양한 방식의 표현을 동원한다. 미술, 음악, 영화 등 언어의 우회로를 택한 예술들. 예술극장에서 접한 공연들은 언어로 옮길 수 없는 영역에 속한 체험들이었다. 나는 아직 그 느리고 진하게 흘러간 시간들을 제대로 표현할 말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 글을 쓴다. 예술극장의 개관 페스티벌에서 차이밍량의 <당나라 승려>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열병의 방>을 관람하고 왔다. 33편의 개관 공연 중 두편을 콕 짚어 관람한 것은 당연히 당대의 작가감독들이 공연으로 영역을 확장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공연 모두 영화의 형식을 벗어났지만 여전히 영화의 자장 안에서 움직이고 있음을 확인했다. 어쩌면 <당나라 승려>와 <열병의 방>을 관통하는 시간, 공간을 사유하는 방식이야말로 그 어떤 영화보다 영화의 본질에 가깝게 접근한 공연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부터 풀어놓을 이야기는 무대 위에 고인 시간을 조악하게나마 모사한 감상기다. 그렇다. 이 글은 단순한 감상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마저도 제대로 옮겼다고 자신할 수 없다. 하지만 차이밍량과 위라세타쿤의 시간을 여느 때와 같이 ‘해석’하고 ‘설명’하고 싶진 않다. 하나의 언어로 해석의 통로를 단단하게 쌓아나가는 순간, 제대로 된 감상에서 멀어질까 두렵다. 행여 섣부른 설명이 제대로 된 감상을 방해할까 겁이 난다. 확실한 건 두 공연 모두 ‘말할 수 없는’ ,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역에 있다는 것이다.
하여 지금부터 다시 한번 멀리 돌아가려 한다. 이제부터 할 수 있는 한 두루뭉술하고, 말랑하고, 넉넉하고, 헐겁게 공연에 대한 단상들을 늘어놓을 것이다. 피안의 세계를 향해 걷고 또 걷는 <당나라 승려> 속 행자처럼 부족하나마 언어로 옮길 수 있는 것만, 말할 수 있는 것만,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 글이 미처 설명하지 못하고 침묵해버린 언어 너머의 시간을 상상하는 건 오직 당신의 몫이다. 그저 차이밍량과 위라세타쿤이 펼쳐놓은 시간을 조금 먼저 체험한 나의 감상이 당신의 호기심을 자극하길 바라며 두 감독이 확장시킨 영화의 본질을 더듬어본다.
<당나라 승려>, 시간의 움직임, 느림에 관하여
몇 가지 알아둘 필요가 있다. <당나라 승려>는 차이밍량의 ‘걷는 사람’ 연작의 끝에 서 있다. 차이밍량은 더이상 영화작업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 이후 <행자>(2012), <떠돌이개>(2013), <서유>(2014)를 거치며 흘러가는 시간을 찍기 시작했다. 주지하다시피 차이밍량의 영화는 상업영화 시스템을 거절하고 대표적인 몇 가지 영화 기법을 통해 관객을 고독 속으로 끌어들여왔다. <애정만세> <하류> 등 그의 대표작들은 극단적인 롱테이크와 침묵에 가까운 사운드를 활용해 철저히 느리게 움직임으로써 ‘시간의 운동’을 목격하도록 만든다. 상업영화가 좀더 빠른 속도의 경쟁으로 관객을 몰아붙일 때 차이밍량은 정반대의 길을 걸어온 것이다. 이른바 ‘느린 영화’들이 필름 안에 포획한 시간은 감독 혹은 배우가 실감하는 각자의 속도로 흘러간다. 상업영화에 길들여진 관객이 그 시간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우선 기존의 시간 감각을 한번 깨부술 필요가 있다. 그때 나오는 감정들이 지루함일 수도 있고, 일종의 각성일 수도 있으며, 어쩌면 매혹인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오면 간단하다. <당나라 승려>는 여전히 차이밍량의 ‘영화’다. 좀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차이밍량의 시간을 무대 위로 끄집어낸 작품이다. “허공에 걸린 스크린이 바닥으로 내려왔다”는 차이밍량의 설명이 이 공연의 본질을 정확하게 설명한다. 관객은 무대에 들어서자마 가로 8m, 세로 4m의 벽지 위에 누워 있는 승려를 목격한다. 입구(入口) 자를 형상화한 가변형 무대에서 객석은 입(入), 네모난 백지는 구(口)에 해당한다. 2시간이 넘는 공연 동안 모든 행위가 이 좁고 밀도 높은 백지 위에서 이뤄지는 집중도 높은 구도다. 이동이 자유로운 공연장에서 객석은 무대의 일부이고 관객은 관찰자에서 참여자로 입장이 바뀐다. 이윽고 공연 시작 시간이 되면 극장의 한쪽 벽면이 열리며 안팎의 경계가 사라진다. 반 야외극장이 된 무대의 한쪽 면은 순식간에 저녁 노을이 걸린 한폭의 풍경화로 변한다. 이 정확하고 절제된 구도 속에서 관객은 승려가 몸으로 구현하는 시간과 적극적으로 호응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지루함마저 호응의 한 방식이다.
1천년 전 불경을 찾아 먼 길을 걸어간 삼장법사의 여정은 “발걸음 하나하나가 시간과 고독의 흔적”이고, 이강생의 몸을 빌려 지금 무대 위에 현현한다. 승려는 가만히 누워 있고 검은 옷을 입은 대만의 화가 카오쥔홍이 목탄을 들고 나와 백지 곳곳에 거미를 그려간다. 서서히 검게 채워지는 종이 위에는 달이 떠올랐다가 꽃잎이 그려지기도 하고, 이내 거대한 나무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완성된 그림은 보리수 아래 누워 있는 불타의 모습과 진배없다. 관객이 목격하는 것은 잠자고 있는 승려인가. 승려가 꾸는 꿈인가.
잠시 뒤 승려가 몸을 일으키고 검게 채워진 밤의 그림자도 걷힌다. 승려는 탁발을 하고 염불을 외고 과일을 먹은 후, 걷는다. 한 걸음 한 걸음에 시간을 찍어내듯 천천히, 상상할 수 있을 최대한의 느린 걸음으로 종이 위를 누빈다. 승려의 만행(漫行)이 한참 이어진 뒤 종이가 구겨지고, 종이에서 벗어난 승려는 극장 바깥으로 터벅터벅 걸어가 사라진다. 종이의 바깥을 속세, 사바세계, 시간의 바깥, 무엇으로 불러도 좋다. 중요한 건 느린 걸음 그 자체에 있다. 그러니까 시간의 흐름을 지독히 느리고 우아한 걸음을 통해 목격하는 것. 그것이 이 공연의 전부다.
<당나라 승려>는 걷는다는 행위를 통해 시간의 다른 감각을 일깨운다. 이 공연은 너무도 단순하고 명확해 더이상 설명한다는 게 무의미할 정도다. <당나라 승려>는 자본과 기술의 속도에 맞춰진 우리의 굳은 몸을 각성시키는 돈오(頓悟)의 과정,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공연이다. 무대 위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을 두고 차이밍량과 승려(이강생)의 감각, 그들의 자화상이라 말하는 건 쉬운 해석이다.
백지 위에 펼쳐진 시간의 움직임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선 공연과 관객 사이, 이강생의 느린 걸음과 그것을 응시하는 관객의 지루함 사이를 들여다봐야 한다. 여기서 느리게 흘러가는 건 이강생의 시간이 아니다. 이강생의 시간은 이강생의 흐름으로 지극히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느림’을 인지하는 건 승려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어긋나기 때문이다. 어긋난 두개의 시간축을 맞추는 과정에서 이른바 시간의 움직임을 체험, 아니 목격할 수 있다. 어쩌면 자본에 침식당한 영화가 오래전에 잃어버린 빛나는 시간은 역설적이지만 스크린 바깥에서 좀더 선명하게 물리적인 리얼리티를 획득한다. 내가 지금 그를(그의 시간을) 본다.
<열병의 방>, 동굴과 영화, 공간에 관하여
<열병의 방>은 조금 더 난해하다. 차이밍량이 시간의 흐름을 늦춰 흐름 자체를 감각하는 데 반해 위라세타쿤은 공간 위에 여러 시간 축을 덧입힌다. 공연이 시작되면 제목처럼 한줌의 빛이 들어오지 않는 검은 방으로 관객을 안내한다. 따로 객석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방 안에 사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앉는다. 방 안에는 착잡한 안개가 깔려 있고 실처럼 얇은 빛줄기들이 어둠 위에 가느다란 선을 긋고 있다. 마치 열대우림 한가운데서 검은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기분이다. 잠시 뒤 스크린 하나가 내려온다. 타이 시내의 풍경들, 청년들의 얼굴, 잠 자는 모습이 차례로 지나간다. 시간이 지나고 스크린 하나가 더 내려온다. 두개의 화면은 관찰자의 시점이 조금 틀어진 두개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 다른 시선. 잠시 뒤의 과거, 어쩌면 조금 뒤의 미래. 이 화면들은 즉각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정글, 기억, 환생, 변태 등 위라세타쿤을 이해하려는 개념어들은 막연한 추상에 가깝다. 사실 위라세타쿤이 펼쳐놓은 이미지들은 철저히 위라세타쿤 본인의 영화적 개념 안에서 움직인다. 우리는 그것을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역설적이지만 그래서 <열병의 방>은 위라세타쿤의 영화보다 쉽다. 하나의 평면 스크린 위에 무수히 중첩시켜놓았던 시간, 공간, 시점, 기억들을 각기 다른 구도로 펼쳐서 입체화시킨 것이 <열병의 방>이다. 위라세타쿤식의 체험하는 영화, 입체영화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열병의 방>은 “어둠의 넓은 방 안에서 유령들(관객)이 유령들(영화)을 보고 있는”(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상태를 물리적으로 구현한다. 빛과 어둠, 소리를 활용한 구성은 바라보는 관객이 아니라 참여하는 관객으로의 전환. 다시 말해 관객과 영화, 두개의 유령으로 분리되어 있던 상태를 하나의 공간 안에서 합쳐버린 것이다. 스크린이 사라지고 무대의 커튼이 걷히면 관객은 자신이 앉아 있던 곳이 객석이 아니라 무대 안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극장과 객석의 위치를 바꿔놓은 무대 구성은 이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인 셈이다.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객석 저편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 극장 안을 어떻게 배회해야 하는가.
<열병의 방>은 선형적으로 흐르는 시공간을 쪼개어 극장 곳곳에 뿌려둔다. 비유하자면 관객은 오른쪽을 보는 동시에 왼쪽을 본다. ‘열병의 방’은 특정 시점에서 다른 시점을 바라보는 축을 없애버린, 그러니까 이른바 점, 선, 면을 넘어선 공간의 세계다. 그간의 위라세타쿤이 공간과 기억, 윤회와 환생, 과거와 현재를 하나의 면 위에 포개놓았다면 <열병의 방>은 그것을 자유롭게 흩어놓는다. 기억과 신체, 죽음과 잠, 어둠과 빛, 정치와 몽상, 연극과 영화가 서로를 비추고 관통하는 혼재된 장소. 그렇기에 서로 다른 시간축이 공존 가능하다. 후반부에 이르면 객석 저편에서 쏟아져나온 빛은 자욱한 안개에 비춰 불특정한 이미지들을 형상화해내기 시작한다. 때로는 유령 같기도 하고 때로는 그림자 같기도 하다. 빛과 그림자가 자아낸 이미지, 이른바 “빛들의 소통”(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안에는 <나부아의 유령들>에서 공을 차며 뛰어놀던 아이들이 있고, <엉클 분미>의 동굴, 벽화, 인류 최초의 영화관이 있으며, <열대병>이 감염시켰던 모종의 열기가 있다. 거기서 무엇을 읽어내든 그것은 이미 관객의 마음 속에 있던 것들이다.
근본으로 회귀하는 확장영화, 혹은 영화의 확장
위라세타쿤은 상업영화의 공식을 거부하고 그 자리에 자신만의 언어(어쩌면 설치미술 등 다른 영역에서 발견한)를 영화 속에 끌고 들어왔다가, 그것을 다시 공연의 형태로 내뱉는다. 그럼에도 <열병의 방>의 체험은 여전히 영화적이다. “영화와 같은 평면적 매체를 통해 다층적 구도를 만드는 것은 내게 쉽지 않은 작업이다. 그렇기에 새로운 형식을 통해 이를 탐구할 수 있게 된 건 기쁜 일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 작업 역시 영화의 연장이다. 나는 이제껏 영화를 만들어온 사람이고 이번 공연 역시 이제껏 해온 연출기법 안에서 움직인다.” <열병의 방>이 위라세타쿤식의 입체영화로 이해하고 싶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차이밍량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인터뷰에서 “영화적 경험은 영화관 바깥에서도 표출된다. 반대로 이번 공연과 같은 새로운 경험은 다시금 내 영화 안으로 수렴될 수 있다”라며 형식에 구애받지 않을 것이라 말했다. 그러니까 이들 앞에서 영화, 연극, 공연, 미술을 구분하는 건 무의미하다. 이번 공연에서 영화의 흔적을 발견한 것은 어쩌면 내가 영화라는 개념을 관통해 그들을 관찰하고 싶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확실한 건 차이밍량은 차이밍량이고, 위라세타쿤은 위라세타쿤이란 사실이다. 이들은 상업영화 시스템 안에서 표준화된 이야기 방식을 따르는 대신 자신만의 언어를 갈고닦는다. 그래서 연출자가 아닌 작가다. 작가가 희귀한 시대, 어떤 형태로든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게 반가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