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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헌] 셰익스피어의 비극처럼
이화정 사진 최성열 2015-08-17

<협녀, 칼의 기억> 이병헌

이병헌은 요즘 안톤 후쿠아 감독의 서부극 <황야의 7인>에서 무법자를 처단하는 ‘빌리 록’ 역할을 연기하느라 바쁘다. 덴젤 워싱턴, 에단 호크, 크리스 프랫 등과 함께 출연 중이다. 벌써 한달이 넘도록 이어진, 한낮의 기온이 47℃에 달하는 루이지애나의 주도 배턴루지의 폭염에 맞선 강행군에서 잠깐 빠져나온 탓일까. 검게 탄 피부에 수염까지 기른 모습에 촬영장의 후끈한 열기가 그대로 달라붙어 온 듯하다. 그렇게 촬영 삼매경에 빠져 있던 그에게 <협녀, 칼의 기억>의 개봉은 갑작스러운 소식이었을 터다. “최근에 안톤 후쿠아 감독 신작 <사우스포>(2015)가 LA에서 프리미어 시사를 하는데, 촬영하느라 정작 감독이 참석을 못해 시사회장으로 영상편지를 보내셨죠. 그런데 나는 내 영화 제작보고회 간다고 촬영을 빼달라고 했으니….” 그는 단 하루만이라도 한국에 다녀오겠다고 감독과 PD에게 허락을 구했다. 그렇게 무리해서라도 <협녀, 칼의 기억>의 ‘기억’을 관객과 나누고 싶었다. 그리고 본인으로 인해 불거진 ‘사건’에 대해 사죄의 말을 전하고 싶었다. “내 개인적인 일로 작품에 누를 끼치면 안 되니까. 이 작품이 잘됐으면 하는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도 커요.”

<협녀, 칼의 기억>에서 이병헌은 배신의 주범이자 야망의 아이콘이며 복수의 표적이자 애증의 상대다. 노비의 아들이라는 신분에서 벗어나 왕이 되고자 하는 열망 때문에 함께 민란을 도모했던 풍진삼협의 맏형 풍천(배수빈)에게 칼을 꽂고, 사랑하는 연인 설랑(전도연)마저 저버린 ‘악인’이다. 그로부터 18년의 세월. 설랑은 갓난아기였던 풍천의 딸 홍이(김고은)를 거두어 키웠고, 유백으로 이름을 바꾸고 장안의 권세를 누리는 덕기(이병헌)를 향한 복수심도 함께 키워왔다. 칼이 칼을 부르던 고려 시대 혼란의 정국, 그렇게 운명으로 얽힌 깊고 진한 감정의 파고가 세 남녀의 액션으로 구현되는, 무협의 세계가 바로 <협녀, 칼의 기억>이다. “드라마가 너무 강해서” 무협물에는 한번도 취미가 없었다던 이병헌은, 정작 그 드라마가 너무 강렬해서 이 영화에 빨려들 수 있었다. “이렇게 무협을 하겠다고 내가 선택한 게 나 스스로도 의아했죠. (웃음) 그런데 장르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스토리가 강렬했어요. 정말 푹 빠져서 대본을 봤죠. 내게는 이 영화가 무협물이라기보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볼 때의 느낌이 들었어요.” 이렇게 먼저 그가 이 영화의 최초의 관객이 되어 깊이 설득당한 셈이다.

유백이 된 덕기는 배신을 하고 권력 곁에 있으면서도 과거의 사랑에 대한 죄책감으로 혼란에 빠져 살아가는 인물이다. 악역이지만 100% 악인으로 규정할 수 없는 풍요롭고 입체적인 악역, 욕심나는 배역이었다. <광해, 왕이 된 남자>(2012)에서 광해와 하선으로 일인이역을 했던 그가 이번에는 출세에 눈이 멀어 변해버린 유백과 18년 전 순수했던 덕기의 모습을 모두 표현해야 하는 일종의 일인이역을 하게 된 셈이다. “하선은 왕을 흉내내는 자였고, 유백은 왕을 노리는 자예요. 대사의 톤과 느낌이 온전히 다른 게임이죠. 아무리 멋들어진 대사도 시 낭송처럼 들리지 않게, 내 말처럼 들리게 만들어야 했어요.” 그는 기존 무협영화를 레퍼런스로 삼는 대신 사실적인 톤을 만드는 데 최대한 주력했다.

일반 액션과 완전히 다른 무협영화의 검술을 익히느라 촬영 전부터 꽤 애를 먹었다고 하지만 감정의 조율에 있어서 그의 ‘칼 솜씨’만큼은 배우 이병헌이기에 익히 예상할 법한 능수능란한 경지다. <협녀, 칼의 기억>은 그만큼 이병헌의 연기 내공을 그대로 보여주는 바로미터이자 <광해, 왕이 된 남자> 이후 <지.아이.조2>(2013), <레드: 더 레전드>(2013), 올해 개봉한 <터미네이터 제니시스>(2015)로 이어지는 할리우드 활동에서 벗어나 한국 관객에게 호소하는 중요한 작품이기도 하다. “할리우드 활동은 운 좋게 섭외가 들어오긴 하지만, 내가 가진 또 하나의 영역이라는 생각은 없어요. 그곳에서도 내가 원하는 영화, 배역을 선택할 수 있는 위치까지 가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해보려고 해요. 하지만 내가 늘 가장 우선시하고 주력하는 것은 한국에서의 작업이죠.”

앞서 그는 알 파치노와 앤서니 홉킨스가 출연하는 영화 <비욘드 디시트>의 촬영도 끝냈다. 그가 일컫는 ‘연기의 신’ 격인 선배 배우들과 나눈 긴장의 순간이야말로 그가 할리우드로 영역을 넓히며 얻은 소중한 자산이다. 블록버스터의 아이콘이 된다는 흥분보다는, 여전히 연기를 배울 환경이 주어지는 게 감사한 날들이다. <황야의 7인> 현장으로 서둘러 돌아가면서 그는 <협녀, 칼의 기억>의 개봉을 함께하지 못한 아쉬움을 다시 한번 전했다. “한국에서 곧 작업을 하고 싶다”는 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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