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내 인생의 영화
아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우묵배미의 사랑>
2002-03-13

“노력해라! 노력해서 안 되는 일이 없다. 그것은 실로 만고의 진리인데 게나 고둥이나 많이 써 닳아버린 그 말의 희소성 때문에 그 뜻의 효율과 진정성이 피보고 있다.” 듣기에도 좋고, 천만번 옳은 말이기는 한데 미안하지만 나는 그 말 절대 안 잡아준다. 설령 보편타당한 가치라 해도 내 경험적 기준에서는 성공한 자의 교시 내지는 자기들처럼 안 된 우리에 대한 훈육으로밖에 안 들린다. 성격적으로 삐뚤어지고, 세상에 대한 열패감으로 가득한 자의 말꼬리 잡기로 치부한다 해도, 내가 아니면 아닌 것이다. 왜? 지구는 자기를 중심으로 돈대며? 본디 태생이 높지 않았고 자란 과정 또한 지리멸렬했으며 현재로서도 고만고만 사는 내가.

피 터지는 노력의 보상으로 주류로 편입된 올곧은 세상의 잘난 작자들에게 겸손히 고개 숙여 처분만을 바라지 않고 대가리 들이대며 목에 핏대 세우는 이유는 내 태생적 뻔뻔스러움도 있으나, 끼리끼리 모여 자기들 잘살 궁리만 하며 계급 만들고 위화감 조성하는 패거리 문화에 대한 가소로움 때문이다. 잘나신 분들은 그 단련된 내공으로 좋은 말도 많이 하신다. “모두는 평등하니 그 속에서 살맛나게 일하자.”

근데요 아저씨들! 계급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평등함을 본 적 있으세요? 천박하다는 군대에서도 계급은 인격 밑에 있다고 말하거든요. “더 욕심 안 부리며 참고 살 테니까 기회 앞에서나 평등 좀 보장해 주세요.” 그러나 그 또한 쉽지 않음을 나는 살면서 배웠다. 그래서 다시 체념을 익혔고 그뒤 내 인생에 ‘열심히’, ‘치열한’, ‘투쟁적’, ‘고단한 여정 속 피곤기 남은 승리’ 같은 말들은 영구제명되었다. 그리고 평온을 얻었다. 일단은 사람 대하는 게 편해졌고,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그만그만해 보이기 시작했다. 해방이었다! 콤플렉스로부터! 욕망으로부터! 사회적 조건으로부터!(이 천박한 해방감을 부디 용서 하시라!)

그즈음 내가 그러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도록 일조한 내 인생의 영화가 있었으니 장선우가 연출하고 박중훈, 최명길, 유혜리가 출연한 <우묵배미의 사랑>이 그것이다.

유희적인 측면으로 인생을 대할 만큼 시건방져진 나는 그동안 많이 변해왔고 또 앞으로도 바뀌겠지만 일단은 <우묵배미…>를 생각하니 실로 암담하기만 했던 그때가 추억처럼,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배일도! 못난 우리를 대변하는 이 얼마나 성스럽고도 거룩한 이름인가! 도시에서 밀려난 소외계층의 민초들이 논길과 밭길이 어우러진 서울 근교 외진 마을에 남루히 살면서도 그 속에서도 살 힘을 얻어, 웃음을 짓고, 싸움질도 하며, 사랑도 하는 끈적끈적한 우리 삶을 질펀하게 살냄새 풍기며 만든 영화인데 나는 영화를 보면서 조용필 노래가사처럼 아∼ 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났다. 그들의 웃음은 한쪽의 눈물이 되고, 한쪽의 사랑은 또 다른 사랑 한쪽의 눈물을 야기했으나 그런 그들이 매정하게 보이지 않고, 애처롭게 느껴지지도 않는 것은 박중훈이라는 걸출한 배우의 실감나는 연기 탓이기도 하겠지만, 본디 삶 속 가학과 피학에 대한 저항력이 우리 민중의 정서 속에 끊임없이 굳건히 길러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연의 여자 공례의 어린 아들을 나무라며 지애비 닮아서 그 꼴이라거나 어두운 비닐하우스 속 두 남녀가 호찌를 처먹는다거나, 극악스런 조강지처가 못난 자기남편 욕하는 이웃집 여편네 머리채를 거머쥔다거나, 장면 하나하나에 적어도 내 정서 속에 없는 것이 없었다. 무대책, 무계획, 무개념으로 일관하는 배일도를 연기한 박중훈의 연기를 보다가 나는 깊은 생각에 빠지곤 했다. 과연 저 시발새끼가 사람의 새끼인가? 무슨 놈의 애새끼가 저리 연기를 잘할 수 있단 말인가? 알량한 재주 아닌 재주로 연기한답시고 깝죽거리던 내가 배우의 길을 선택한 것을 처음으로 후회하게 만든 것도 박중훈이었고, 개새끼도 자기집 마당에서는 반은 먹고 들어간다고, 옹색하며 적당히 약고, 기준만큼만 선량한 저 민초의 삶 또한 나하고 더 가까운 이야긴데, 장선우가 배일도 역을 줬다고 해도 박중훈의 백분의 일도 못해낼 것 같아 나 자신 한없이 서러워지기도 했다.

<우묵배미…>의 인물 하나하나는 아름다웠건 아님 곱지 않았건 모진 광야 속 들꽃 내지 잡초로 내게 각인되었다. 꽃을 풀이라 말하고 풀을 꽃이라 말하는 건 부르는 사람의 기호겠으나, 어쨌든 그 불멸성에 나는 살 힘을 얻었다. 어느 늦은 일요일 밤! 박중훈이와 단둘이 만난 허름한 호프집에서 튀김 닭 반 마리 발라먹으며 내가 물었다. “모든 엘리트코스 밟으며 상대적으로 우아하게 살아온 사람이 어찌하여 그런 연기를 그렇게 잘할 수가 있어?”

천하의 박중훈이가 응수하기를 “김작가! 사람살이가 엇비슷한데 본성으로만 이해하면 사람은 다 같은 거야, 천재와 병신새끼가 종이 한장 차이듯, 엘리트와 개잡놈도 한끗 차이라니까!!”

졌다! 또 졌다! 그 명쾌함에 나는 두손 두발 자지까지 다섯개 한꺼번에 다 들었다. 그리고 덕분에 잘난놈들의 주소까지 알아내고야 말았다. 시팔! 바로 내 이웃에 짱박혀 살고 있었더라고…. 좆만것들! 지들이 숨어봐야 거기까지면서….

사실 그랬다. 머리 영리하고, 천재적으로 연기하며, 삶의 통찰력까지 갖춘 우리시대의 배우 박중훈은 주류를 연기할 때보다 아웃사이더를 연기 할 때 더 빛났다. <게임의 법칙>이나 <인정사정 볼것없다>나 <할렐루야>나…. 어디 그뿐이랴! 어쨌든 난, 그 영화를 통해서 살 힘을 얻었고, 그 영화 속 배우를 통해 내 목조르던 자들의 정체까지 알게 됐으니. <우묵배미의 사랑>! 어찌 내 인생의 영화라 부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관련영화

글: 김해곤/ 시나리오 작가·<파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