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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추구할 방법 자체를 잊어버린 사람의 슬픈 초상 <종이 달>
김보연 2015-07-22

버블 경제의 기세가 가라앉은 1996년, 평범한 가정의 아내이자 은행원으로 살아가던 리카(미야자와 리에)는 우연한 계기로 대학생 고타(이케마쓰 소스케)를 만나 사귀기 시작한다. 고타가 거액의 빚을 졌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리카는 과감한 짓을 저지른다. 은행 문서를 위조해 고객의 예금을 빼돌린 것이다. 리카는 그 후로도 멈추지 않고 더 많은 돈을 횡령해 화려한 생활을 즐긴다. 그러나 비싼 음식, 고급스런 옷과는 상관없이 그녀의 삶은 조금씩 공허해지고 메말라간다.

지난해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로 강한 인상을 남긴 요시다 다이하치 감독의 신작 <종이 달>은 동명의 인기 소설을 영화화한 범죄 드라마이다. 그런데 금융 사기를 소재로 삼기는 했지만 범죄 행위 자체보다는 일상의 평범한 풍경을 묘사할 때 감독의 장기가 제대로 드러난다. 즉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작은 행동과 대사를 통해 보통의 삶 속에 숨어 있던 팽팽한 긴장의 순간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이를테면 남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기껏 차고 온 명품 시계를 숨기는 직장인들, 초점이 어긋나는 대화를 기계적으로 나누는 부부, 돈을 빌려달랄까봐 가족과도 거리를 두는 사람의 모습 등은 과장된 묘사 없이도 서늘한 순간을 만들어낸다.

이런 장면을 통해 공들여 구축한 숨막히는 일상의 분위기는 현대사회의 거대한 흐름에 수동적으로 떠밀려 살아가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공허함을 건드리는 데까지 나아간다. 리카가 범죄를 저지른 원인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조금씩 공감과 연민을 느끼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 많은 돈을 갖고서도 우울해하는 리카의 모습은 어딘가 기형적으로 비틀린 사회 속에서 ‘행복’을 추구할 방법 자체를 잊어버린 사람의 안타까운 초상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종이 달>은 한 개인의 법적, 도덕적 일탈보다는 사회 전체에 드리운 그림자를 보게 만든다. 허무의 정서를 온몸에 두른 것처럼 연기하는 미야자와 리에의 눈빛과 함께 쉽게 잊히지 않는 슬픈 잔상을 남기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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