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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회 <씨네21> 영화평론상: 영화의 신체-기계론(이론비평 전문)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를 중심으로

1. 신체-기계론과 크로넨버그

기계는 영화의 고전적인 탐구대상이자, 어쩌면 영화가 죽음을 맞을 때까지 필연적으로 탐구해야 할 대상이다. 테크놀로지를 바탕으로 탄생한 영화는 스스로에 탐닉하듯 기계를 그 제재로 삼아왔다. 인간의 신체는 영화기계의 자기 탐구를 위한 경유지 노릇을 했다. 지가 베르토프의 <카메라를 든 사나이>(1929)는 신체와 기계의 연관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최초의 단초를 제공한다. 카메라라는 도구 자체를 탐구한 이 영화 속에는 지가 베르토프가 주창한 키노아이(카메라-눈)의 개념이 분명히 녹아 있다. 시각 매체로서의 카메라와 인간 신체(눈) 사이의 유비 관계는 이 개념에 있어 중요한 출발점이다. 지가 베르토프는 카메라의 시각이 인간의 주관적인 시각의 한계를 극복할 객관적인 시각의 바탕을 마련했다는 것에 주목했다. <카메라를 든 사나이>에서 감독은 카메라의 시각을 동경하며, 그것과 동화되고 싶어하는 인간으로서 자신을 기입한다. 감독의 욕망은 카메라를 든다는 행위로 실현되며, <카메라를 든 사나이>에는 카메라와 시각적으로 동화된 자의 흥분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 기계와 동화하려는 욕망은 어쩌면 영화사 초기, 감독을 추동시키는 하나의 요소였을 것이다.

<카메라를 든 사나이>가 시각에 특정한 작품이었다면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1936)는 기계와의 접촉면을 신체의 부분이 아닌 신체 전체로 확장한 작품이다. 물론 <모던 타임즈>는 <카메라를 든 사나이>와는 기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정반대에 놓여 있으나, 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접어두기로 한다. 기계화된 인류의 미래가 유토피아인지 디스토피아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관이나 인간 소외에 대한 비판이라는 영화 전체의 함의를 잠시 접어놓고 볼 때, 비로소 <모던 타임즈>에서 찰리의 몸이 보인다. <모던 타임즈>에서 채플린의 신체는 기계의 무늬를 그대로 찍어내는 주물처럼 기능한다. 부품의 나사 죄는 일을 반복하던 공장 노동자 찰리는 쉬는 시간에조차 기계의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결국, 찰리는 거리에서 지나가는 여성의 옷에 달린 단추를 비롯해 동그란 사물만 보면 나사로 조여야만 하는 강박증을 지니게 된다. 기계가 신체에, 다시 신체가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흐름 속에서 찰리의 몸은 무자비할 정도로 고지식한 기계의 속성을 재현한다.

<카메라를 든 사나이>의 낙관이든, <모던 타임즈>의 비관이든 두 작품에서 기계는 그것이 인간 신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는 하나, 여전히 인간과 구분 가능한 자리에 놓여 있었다. 기계는 인간 신체 외부에 존재하며 단지 신체의 표면 위에서 접촉할 수 있을 뿐이다. 크로넨버그의 영화에서 기계와 인간의 관계는 그 접촉면이 신체의 부분이냐, 신체 전체냐의 차원을 넘어, 피부 속으로 깊이 찔러 들어간다.

2. 내장 기계 : 나는 네가 모르던 너다

크로넨버그 영화에서 기계는 <카메라를 든 사나이>에서처럼 인간의 신체를 닮았으나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초월적인 것도, <모던 타임즈>처럼 인간을 소외시키는 것도 아니다. 크로넨버그가 재현하는 기계는 현실에서 볼 수 있는 그 어떤 기계의 이미지와도 닮지 않았다. 딱딱한 외부에 복잡한 내부가 숨겨진 전형적인 기계의 형상은 크로넨버그의 영화에서 찾을 수 없다. 크로넨버그의 기계는 인간이 모르는 사이에 인간의 내부에서 각자의 리듬으로 자기 일을 수행 중인 인체 내부의 기관 기계를 닮았다. 크로넨버그의 기계는 점성이 가득한 물컹거리는 덩어리다. <파편들>(1975)에서 인간의 몸에 접속하려는 괴생명체, <네이키드 런치>(1991)에서 빌이 접속하기를 원하는 타자기, <엑시스텐즈>(1999)에서 형태를 갖추기 이전의 태아처럼 보이는 (게임기의 디자인 개발자인 엘레그라 겔러는 게임기를 아기(baby)라고 부른다.) 게임기의 형상이 대표적이다.

단지 형상만 그런 것이 아니다. 기계는 내장이 가진 운동성을 지닌다. 내장은 인체와 연결된 한 외부의 자극을 적절하게 방어를 하면서 일정한 운동을 반복한다. 크로넨버그의 기계는 인체에서 떨어져 나온 내장과 같다. 그것은 내장이 인체에서 떨어져 나온 뒤에도 관성에 의해 얼마간 자신의 신체 흐름을 유지하듯 자동기계적인 움직임을 보인다. 기계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욕망이다. 그것은 인간과 접속하려는 욕망이다.

기계가 욕망하는 덩어리가 됨에 따라, 인간은 덩어리가 들어갈 수 있는 하나의 구멍이자 통로의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그것은 <열외인간>에서 피부 이식 수술을 받은 로즈의 겨드랑이에 생긴 구멍, <파편들>의 입이나 성기처럼 신체에 난 구멍, <비디오드롬>에서 아문 상처의 벌어진 틈, <엑시스텐즈>에서 게임에 접속하기 위해 허리에 뚫는 구멍 등으로 드러난다. 크로넨버그가 자신의 영화를 통해 기계와 인간이 주고받는 영향관계를 그리고 있다는 것 자체는 특별할 것이 없다. 특징적인 것은 그가 기계를 독특한 형상으로 시각화했다는 것, 그리고 그 독특함을 뛰어넘는 견고함이다.

기계의 모양은 인간의 내장에서 나왔고, 내장을 닮은 기계는 다시 인간과 접속하려고 한다. 여기서 접속의 메타포는 기본적으로 섹슈얼한 욕망에 기초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타자와 접속하려는 욕망은 기본적으로 성욕으로 풀이된다. <파편들>의 괴생명체가 인간의 몸속에 사는 기생충과 인간의 성적 욕망이 합쳐진 물체라는 것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인간의 몸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내장기계는 성욕의 덩어리다. 기계는 인간을 보완하거나, 거꾸로 인간을 통제하는 타자가 아니라 자기 욕망을 가진 반자동기계다. 기계는 인간의 시선에 따라 위협적인 것과 친화적인 것으로 분류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는 무관한 위치를 차지한다. 기계가 인간에게 여전히 타자라면 그것은 외부의 타자가 아니라, 내 안에 있었으나 내가 보지 못한 어떤 것을 닮은 타자다. 이로써 가장 이질적인 것이자 가장 가까운 것으로 기계가 위치하게 된다. 형상적으로 마치 인간 내부에서 빠져나온 것 같은 기계는 인간 내부의 외적인 발현이라는 조금 더 복합적인 성격을 지닌다.

3. 자기애 : 불가능하기에 욕망하는

기계는 성별을 구분할 수 없기에 일단 무성적인 존재로 인식된다. 그러나 크로넨버그 영화에서 기계는 성욕의 덩어리로 나타난다. 기계-덩어리, 인간-구멍의 구조는 인체의 성 구분에 기초해 볼 때, 남성-기계, 여성-인간으로 구분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를 다시 말하면 기계는 인간의 생물학적 성구분을 교란시키거나 균열을 가한다고 말할 수 있다. <열외인간>의 로즈는 어쩌면 여성과 남성의 성기를 모두 지닌 헤르마프로디테(자웅동체)처럼 보인다. 로즈의 겨드랑이 부분 벌어진 틈은 여성의 성기를 연상시키나, 거기에서 이따금 돌출되는 뾰족한 칼날은 남성 성기의 모양과 성질을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결정적으로 로즈의 겨드랑이에서 나온 칼날-기계는 남녀를 구분하지 않는다. <비디오드롬>에서 빌의 복부 상처가 벌어져 비디오테이프를 넣을 수 있는 데크처럼 기능할 때, 비디오를 몸속에 삽입하는 빌의 복부는 여성의 성기를 연상시킨다.

<비디오 드롬>에 대해서는 다른 설명도 가능하다. 그것이 복부로 들어간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 그것은 모체로 회귀하려는 태아의 욕망처럼도 보인다. 어느 쪽이든 기계의 움직임이 인간의 고정적인 성구분을 교란시킨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남녀의 성 역할의 구분은 생물학적 성에 의해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되거나 생성되는 것임을 영화는 보여준다. 그러므로 그의 영화에서 동성애적 코드가 종종 발견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크래쉬>에서 인물들의 사랑은 때로는 남녀, 남남, 여여로 상대를 넘나들었다. 최근작인 <맵 투 더 스타>에도 동성 간의 섹스를 암시하거나 시도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어쩌면 자기애는 영화 속의 동성애적 코드가 극단적으로 강화된 형태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쌍둥이, 형제 등 근친 간의 애정으로 변형되어 나타난다. 크로넨버그는 영화 속에서 종종 똑같은 사람을 등장시킨다. <데드 링거>(1988)는 자기애를 논하기에 더없이 적절한 예다. 제레미 아이언스가 1인 2역을 맡은 이 영화에서 쌍둥이 형제, 엘리엇과 베벌리는 서로가 서로의 약점을 메우는 완벽한 조합처럼 그려진다. 겉으로는 두 형제가 한 여자를 탐하는 스토리가 중심이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가 쌍둥이를 분열시키기에는 역부족이다. 어쩌면 여자는 두 형제를 낳은 어머니의 대체물로서 기능한다. 이들은 분리된 샴쌍둥이인데 환영 속에서 분리되지 않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둘은 물리적으로 분화되어 있지만 실제로 그 둘은 여전히 한 사람이라는 것이 서사를 통해 강조된다. 의사인 두 사람은 스스로 분리 수술을 한다. 수술 끝에 둘 중 하나는 사망한다. 어쩌면 한 사람의 죽음은 그들이 비로소 하나로 합일됐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데드 링거>는 이질적인 것(기계)과 접속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태아가 느끼는 분리불안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 아닌가 짐작하게 한다.

<스캐너스>는 염력을 사용해 다른 사람의 행동을 조정하거나 통제하는 초능력을 지닌 인간 스캐너의 이야기다. 여기에서는 존재를 모른 채 떨어져 살다가 만나게 된 형제 리벅과 캐머런이 등장한다. <데드 링거>의 마지막이 결국 형제의 대결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스캐너스>의 마지막 역시 두 형제의 대결로 귀결된다. 두 형제가 서로에게 염력을 사용해 더 큰 염력을 발휘해 살아남는 사람이 남고, 다른 한 사람은 죽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의 죽음과 동시에 남은 사람이 자신의 형제로 완벽히 변신한다. 이는 가장 완전한 방식의 접속이자 합일이다. 최근작인 <맵 투 더 스타>에는 남매간의 근친상간이 등장한다. 남매지간인 샌포드와 크리스티나는 근친상간으로 결혼해 딸 애거사와 아들 벤지를 낳았다. 애거사는 집에 불을 질렀다는 혐의로 가족들과 떨어져 살게 된다. 표면적 이유는 애거사의 기행이지만, 실제로는 샌포드와 크리스티나가 두려워하는 것은 애거사와 벤지를 떨어뜨려 놓아 남매간의 근친상간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려는 것 같다.

자기분열과 분열된 자아의 만남과 화해는 자기애의 다른 차원의 형식으로 풀이된다. <폭력의 역사>에서 가정을 꾸리며 남부러울 것 없이 살던 톰 스톨은 어느 날 자신이 운영하는 식당에 난입한 킬러들을 제압하면서 영웅으로 떠오르는 동시에 과거 그를 알던 사람들에게 시달린다. 이와 함께 그가 숨겼던 자아인 조이 쿠색이 점차 모습을 드러낸다. <폭력의 역사>는 서로 다른 두 자아의 대결이다. 마지막에 남자가 다시 돌아온 것으로 끝을 맺지만, 돌아온 자가 톰 스톨인지, 조이 쿠색인가는 숨겨진다. <스파이더>는 한 사람의 분열과 통합에 환영이 개입한 경우다. 서로 다른 시간대를 공존해 놓고 한 남자가 분화되어 나타나도록 만든다. 이를 통해 자신의 어릴 적 트라우마와 대면하는 이야기다. 스파이더는 현재화되는 것은 어린 스파이더이며 남자는 어린 스파이더가 하는 모습을 그들이 알지 못하는 시간 속에서 지켜본다. 둘이 여전히 함께 존재하는 한 남자는 영원히 정신병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4. 분리되지 않은 환원의 세계

크로넨버그의 영화에서 기계는 인간의 신체와 화합하기를 욕망하는 기계다. 여기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기계가 인간의 몸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데드 링거>에서 쌍둥이 형제가 접촉 없이 가능한 양서류의 수정방법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등장한다. 크로넨버그의 영화에서 기계를 탄생시키는 방식이 이와 흡사하다. <파편들>에서 의사는 여성의 몸을 통해 기생충을 성병을 앓는 인간의 몸에 이식시켜 괴생명체를 만든다. 기계가 인간의 몸에서 생성됐다는 점으로 미뤄볼 때, 기계는 내장-기계인 동시에 태아-기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계의 인체에 대한 욕망의 기저에 분리 불안이 깔렸다고 가정해볼 수 있다.

기계가 저항하는 분리의 정체는 무엇일까. 혹은 기계가 통합시키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기계는 말할 수 있는 입이 없기에 우리는 기계의 형상을 기대 유추할 수밖에 없다. <파편들>에서 괴생명체는 내장, 태아를 닮은 동시에 남근의 형상을 연상시킨다. 괴생명체를 태아-기계라고 본다면 이것이 남근의 형상을 띤다는 것이 더욱 흥미롭게 보인다. 남근은 태아-기계의 탄생을 가능케 한 상징 원인물이다. 태아-기계는 수정의 결과이자, 형상적으로 그것이 가능케 한 원인을 인식하게 한다. 태아-기계는 결과와 원인을 형상적으로 연결지으려는 시도다. 태아라는 신성한 결과물 앞에서 그것이 가능하게 한 원인인 남녀의 성행위에서 오는 쾌락은 멀찍이 떨어뜨려 진다. 성기형상을 한 태아-기계의 외양에서 성의 결과물을 신비화하고, 그것의 원인물을 터부시하는 데 대한 어떤 반발이 읽힌다.

크로넨버그가 태아를 성기의 형상으로 그려낸 것은 생명의 탄생 이전의 남녀의 결합행위를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고정되지 않은 형태의, 물컹한 태아-내장 기계는 인간의 결합행위에서 오는 성 에너지를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크로넨버그는 라스 폰 트리에와 통한다. 라스 폰 트리에는 <안티 크라이스트>에서 어린 아들이 잠에 깬 줄도 모르고 욕실에서 서로의 몸을 탐닉하는 부부의 모습을 에로틱하게 그린다. <님포매니악>에서 조는 아들을 재워놓고 몰래 빠져나와 변태적인 성행위를 즐긴다. 라스 폰 트리에는 결혼, 임신, 출산 뒤에도 사그라지지 않는 성적 에너지와 욕망을 강조해왔다. 그는 섹스와 사랑을 분리한 뒤 사랑에 높은 가치를 매기는 활자적 가치판단에 저항한다. 라스 폰 트리에는 이미지 구축을 위해 다른 측면을 배제하거나 분리하는 행위에 반대한다. 라스 폰 트리에에게 섹스와 사랑이 통합되어야 할 어떤 것이라면, 크로넨버그에게는 생명과 섹스가 그렇다. 크로넨버그는 생명을 탄생시키는 행위의 섹슈얼함과 그것의 탄생물인 신성한 생명이라는 이분법에 저항한다. <파편들>에서 인간의 몸속에 결합하기를 원했던 괴생명체가 적절한 형상적 예이다. 크로넨버그 영화는 사건의 원인(물)과 결과(물)을 통합하려는 욕망이 있다.

앞서 통합의 욕망에는 분리 불안이 자리한다고 언급했다. 그런데 분리 불안은 비단 탄생에만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다. 탄생과 쌍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죽음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의 생에 있어 두 가지 필연적인 분리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탄생과 죽음이다. 탄생은 태아와 어머니 간의 분리이며, 죽음은 삶으로부터의 분리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이 저항하기 마련인 두 가지 종류의 분리다.

그러나 크로넨버그는 죽음을 단지 삶으로부터의 분리가 아닌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회귀의 개념으로 사용한다. 크로넨버그의 영화에서 모든 것은 처음으로 되돌아가려는 욕망이 있다. 그것은 수미쌍관을 위한, 그러니까 보기 좋은 결말을 만들기 위한 도구로서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근원, 본질적인 것으로의 회귀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일의 원인이 된 누군가를 죽인다는 기본적인 사실에서 드러난다. <플라이>의 결말은 사태의 원인 제공자인 박사가 사랑하는 연인에 의해 죽임당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파편들>(1975), <열외 인간>(1977) 등 크로넨버그의 다른 영화들에도 질병이나 바이러스의 원인이 된 이들이 스스로 파괴되는 것으로 결말을 맞았다. 죽음은 다른 의미에서 통합이기도 하다. <스캐너스>에서 분리된 두 사람의 통합은 결국 한 사람의 다른 사람에로의 완전한 흡수이기도 하다. <데드 링거>에서도 쌍둥이의 분리 수술은 결국 한 사람의 죽음으로 귀결된다. 이 같은 방식의 자기귀결성은 각각의 서사 내부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크로넨버그 영화의 공통된 본성처럼 느껴진다.

5. 크로넨버그 이후 크로넨버그 : 디지털은 크로넨버그의 기계를 어떻게 변형시켰나

<플라이>에서 내부에 인간을 품을 수 있는 기계는 영화기계, 특히 필름 시대의 영화 기계를 연상시킨다. 영화 기계는 필름이라는 매개물을 통해 기계 내부에 인간을 품고 있었다. 또한 <플라이>의 순간이동과 융합은 영화를 통한 정신적인 차원의 이동과 융합을 상기시킨다. 크로넨버그의 영화에서 기계의 독특한 점은 기계의 위치가 인간을 감싸는 외부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 유용 가능한 도구 형태로 축소된다는 점이다. 크로넨버그의 영화에서 도구는 축소된 기계다. 차갑고 미끈한 금속기계와 달리 크로넨버그가 묘사하는 도구로서의 기계는 물컹하고 어딘가 불쾌하다. 물컹한 기계(도구)는 살아있는 생물 같다. 크로넨버그는 기계를 인간 육체와 비슷한 방식으로 다룬다. 인간의 육체가 미끈한 피부 속에 물컹한 내장으로 숨기고 있듯이 도구화된 기계 역시 미끈한 갑옷을 벗어 던지고 물컹한 본성을 드러낸다. 도구는 기계의 물화된 내면(혹은 내장)이며 그 구조는 인체와 닮았다. 도구는 이질적인 것이면서도 인간에게 동화 가능한, 동화하려는 속성을 지닌다.

크로넨버그가 필름 시대에 제작한 영화에서 기계와 인간은 직접 연결됐다. 최근작으로 올수록 기계에 플러그인하는 유선 접속 방식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제 인체에 구멍을 뚫을 필요가 사라졌다. 기계-인간은 구멍 대신 피부에 접합된 흔적으로 나타난다. <이스턴 프라미스>에서 몸 위에 새겨진 문신, <코스모폴리스>에서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아 얼굴에 케이크를 뒤집어쓴 얼굴, <맵 투 더 스타>에서 애거사의 얼굴 위의 화상 자국 등에서 과거 물컹거리던 내장기계들의 흔적이 엿보인다. 직접 접속이 필요 없어진 신체는 매체의 물질성이 사라져 가고 디지털화되는 것에 대한 반영으로 보인다. 디지털은 새겨지는 것이 아니라 흔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니 말이다.

디지털 시대에도 여전히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식 신체-기계의 방법론을 고수하는 자는 어쩌면 미셸 공드리다. 미셸 공드리의 <무드 인디고>는 그가 크로넨버그가 필름으로 한 것을 디지털로 시도하는 것이 아닌가 짐작하게 한다. <이터널 선샤인>에서 비정상적으로 커졌다가 작아지는 몸을 통해 인간이 자신의 기억에 들어간 상황을 재현했던 공드리는 <무드 인디고>에서 인간의 신체를 엿가락처럼 늘어뜨리면서, 신체-기계로서의 인체를 본격적으로 실험했다. 미셸 공드리는 크로넨버그식 신체기계론의 개성 넘치는 계승자다.

최근작인 <맵 투 더 스타>에서 크로넨버그는 그가 신체를 변형시키는 데에서 오는 쾌락 대신 환영에 내기를 걸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이때 환영은 실제에서 태어났으나 변형된 실제이며, 실제와 합쳐지기를 소망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애초에 인간이 환영을 불러냈다고 해도, 일단 나타난 환영은 인간에게 끈질기게 달라붙는다. 마치 내장기계가 자신이 인체로 들어갈 때 내뿜었던 욕망이 <맵 투 더 스타>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 <맵 투 더 스타>의 하바나는 두 가지 욕망을 지녔다. 하나는 어머니가 젊은 시절 연기했던 전설적인 배역을 자신이 맡고 싶다는 욕망이며, 다른 하나는 어머니로부터 성폭행당했던 기억에서 놓여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하바나에게 롤모델인 배우와 자신을 폭행한 어머니는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바나의 치유방법이 피부 접촉에 의한 마사지라는 것은 재미있다. 이것은 크로넨버그의 최근작이 피부를 뚫고 들어가는 대신 피부 표면의 차원에 머물러있다는 것과 통한다. 하바나는 어머니의 모습을 비디오로 지켜보며 그녀를 불러내면서도 어머니가 자신이 원치 않을 때 나타나면 소스라치게 놀란다. 환영은 TV 화면처럼 켜고 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환영의 특성은 크로넨버그가 지금껏 그려온 기계의 속성을 그대로 닮았다. 기계는 인간이 만들었으나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다.

크로넨버그의 영화 속에서 예전처럼 자율적으로 행위를 하는 도구는 사라졌지만, 이제는 인간이 적극적인 행위의 이행자로 등장한다. 그리고 도구는 자신이 가야 할 곳을 분명히 향한다. 행위자는 애거사지만, 하바나를 죽인 건 하바나의 트로피다. 결국, 하바나를 짓누른 것은 어머니, 그리고 자신의 과거의 무게다. 애거사와 벤지가 마지막에 집착하는 사물이 반지인 것 역시 흥미롭다. 둥근 원환은 결합의 상징인 동시에 크로넨버그의 회귀적 작품세계를 상징한다.

죽은 필름의 환영들이 디지털에 이르러 비슷하지만 다른 것으로 반복된다. 디지털 시대에 이르러 물컹한 기계의 신체들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를 차가운 환영이 메운다. 그 외양과는 달리 환영이 가진 에너지는 인간과 접속하길 원하는 기계가 뿜어내던 에너지에 버금간다. <맵 투 더 스타>는 환영의 잠복된 에너지가 자동기계들의 에너지만큼 충만함을 반짝 드러낸 경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