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친절하고 마음 착하지만 눈치는 없는 우리 동네 동물병원 원장님에게 고민이 생겼다. 얼마 전에 부원장이 바뀐 후로 보호자들이 이상하게 그 사람만 찾는다는 것이었다. “이왕이면 원장한테 진료받고 싶지 않아요? 마요 엄마는 안 그래요?” 네, 안 그래요.
그동안 원장님에게서 수입품이라 만원이 넘는, 고양이에게 알약 먹이는 기구(한번 써보세요, 신세계가 열립니다)와 새로 나온 처방 사료 등을 공짜로 받아온 죄가 있어 차마 부원장 진료를 요청하지 못하고 간호사가 부르는 대로 원장실에 들어갔던 나는 솔직하게 대답하기가 뭣해 말을 돌렸다. “그거야 보호자들이 대부분 여자니까, 싱글도 많고…. 근데 부원장님은 미혼이시고….” 원장님 미간의 주름이 깊어졌다. “그래서 더 이상하다니까요. 부원장이 여자한테 인기 있을 타입이 아니거든요. 우리 부원장은 뭐랄까… 나쁜 남자 스타일?” 네! 그러니까요!
환자가 없어 심심했던 원장님에게 붙들려 30분 넘게 수다를 떨다가 장모님 생신 기념 식당 선정 문제까지 상담해주고 간호사의 도움으로 풀려난(그사이 내 고양이는 영문도 모르고 주사 두방을 맞은 데다 항문까지 능욕당했는데 집에도 못 가는 스트레스를 의자를 쥐어뜯으며 풀고 있었다) 나는 병원을 나서며 다짐했다. 나도 이제 착한 남자 안 할래, 담엔 나쁜 남자로 만날 거야.
하지만 나쁜 남자라고 하여 나쁜 수의사라는 법은 없다. 여자들에겐 천하의 쌍놈이라는 것이 자부심의 근원이자 정체성의 척도인 영화 <첫키스만 50번째>의 하와이 수족관 수의사 해리(애덤 샌들러)는 며칠 놀아난 여자를 떼버리기 위해선 모르는 남자 허리 안고 제트스키 타기도 불사하는 차가운 남자지만, 내 동물에게만은 따뜻하지. 세상 비린 건 혼자 다 먹는 바다코끼리에게 인공호흡을 해주고, 구석구석 이빨도 닦아주고, 미지근한 생선 따위 절대로 주지 않아. 하와이의 태양이 제아무리 뜨겁게 불타올라도, 해리는 연애도 차갑게 생선도 차갑게.
하지만 좋은 수의사라고 하여 성실한 수의사라는 법도 없다. 하와이 가서 해리처럼 살 수만 있다면 다시 수험생으로 돌아가 영어 참고서 보기를 맛집 메뉴판 보듯 하겠다. 해리는 정말 한가하다.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애인을 위해 날마다 각본•감독•촬영•편집을 도맡은 영상물을 제작해 그녀의 사라진 기억을 기록하는데, <메멘토>라면 상영시간 30분은 걸릴 일을 한 시간 반짜리 영화에서 30번은 할 정도다. 이런 월급 도둑, 그것도 대도(大盜). 월급이 어찌나 많은지 돛대 두개 달린 대형 요트도 있잖아.
절대 동안이라고 자랑하면서 치사하게 저자 사진은 뒷모습으로 실은 수의사 최종욱은 동물원에서 보낸 행복한(하지만 유심히 보면 야근과 특근과 시간 외 재택 근무로 점철된) 나날을 기록한 책 <동물원에서 프렌치 키스하기>에 이렇게 썼다. “KBS에서 일요일 아침에 하던 <대관령>이라는 드라마도 나의 선택에 일조했다. 지금은 줄거리도 거의 생각나지 않지만 어쨌든 그곳에 나오는 수의사는 일도 별로 안 하고 노래만 부르는 베짱이 스타일이었다.” 영화는 영화고, 드라마는 드라마니 속으면 안 되겠다.
그래도 영화와 현실이 일치하는 점은 있다. 동물은 작업의 동반자, 남자들의 성형수술, 수수료 없는 마담뚜. 에세이 <파리에 간 고양이> 시리즈의 작가 피터 게더스는 동물을 무척 싫어했지만 여자친구가 강제로 선물한 스코티시폴드 고양이(귀가 접힌 고양이, 찐빵을 닮았다) 노튼을 키우면서 생각지도 못했던 장점을 발견한다. 노튼을 데리고 나가니까 온 세상 여자들이 나한테 말을 건다! 나를 경계하지 않아, 전화번호도 쉽게 딸 수 있어! (이봐, 여자친구 선물이라며.)
<화차>의 수의사 문호(이선균)는 병원 밖에 내놓은 개를 미끼로 선영(김민희)을 낚고, <사이코메트리>의 유괴범 수의사도 개를 미끼로 아이들을 낚고, <별>의 유오성은 조폭영화로 갈고닦은 험악한 인상을 비싸고 훌륭한 개 알퐁스(비싸고 훌륭하지만 이름은 왠지 부끄러워)로 극복하며 수의사를 낚고, 심지어 만화 <동물의사 Dr. 스쿠르>의 우루시하라 교수는 어릴 때만 귀여웠던 (크고 나선 사람 무는 투견으로 오해받기 일쑤) 시베리안허스키 강아지를 미끼로 수험생을 낚아 수의과에 입학시킨다. 돈은 많이 벌지만 동물을 싫어한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어 아이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닥터 두리틀>의 사람 의사 두리틀 박사(에디 머피)는 동물과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깨닫고는 동물 의사로 전업하면서 세상 최고의 아빠 대접을 받는다. 애들이 고생을 덜 했군, 대학 들어가 등록금 고지서 한번 받아봐야 할 텐데.
동물을 키우는 남자가 연애에 유리하다는 사실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바 있어 어느 미국 신문에 기사로 실리기도 했는데, 다른 남자들보다 착해 보여서 그렇다고 한다(원통하게도 그 반대는 성립되지 않는다고. 여자들은 원래 동물을 좋아한다는 인식이 있어서 그냥 그러려니 한다는 것이다. 아닌데! 나 여자고, 원래 동물 싫어했는데!).
이 이야기를 들은 원장님은 묵직한 고뇌가 눈썹에 얹혔는지 일자였던 눈썹이 팔자가 되었다. “다음엔 여자 부원장을 데려와야 할까요?” 그럼 환자가 떨어질 텐데요. 혼자 사는 보호자와 장례식장까지 동행해주었다는 마음 착한 원장님이 안쓰러웠던 나는 또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저희 집 근처에 잘생긴 30대 초반 남자 의사가 개업해서 문전성시였던 병원이 있었거든요. 아, 그렇다고 제가 거기 갔다는 건 아니고, 전 소문만…. 어쨌든 그랬는데 접수대 간호사가 사모님이었다는 거예요. 지금은 파리 날려요.” 모든 수의사가 결혼을 하는 건 아니겠지만 나이를 먹지 않는 수의사는 없으니까, 힘을 내요, 착한 원장님, 동네 수의사들이 몽땅 아저씨가 되는 그날까지.
‘좋아요’를 받고 싶어요~
수의사를 행복하게 해주는 두세 가지 것들
매일이 모험
한가하고 평화롭게만 보였던 오후의 동물병원, 갑자기 의사 셋이 피를 뚝뚝 흘리며 진료실에서 뛰쳐나왔다. “오셨어요?” 의사는 환하게 웃었다. 원장님, 손등에 사, 살점이…. “아, 저기 호랑이가, 아니 사나운 고양이가 와서요, 하하하. 얼굴은 착하게 생겼는데, 하하하.” 소아과 의사도 그렇다지만 날마다 피와 비명과 원한으로 얼룩진 스펙터클한 수의사의 일상이었다. 그래도 심심한 날이 있다면 <첫키스만 50번째>의 해리처럼 바다코끼리하고 쎄쎄쎄, 펭귄하고 드라이브하면 되… 아, 맞다, 나 어린이대공원 동물 진료소에 현장 체험 취재 가서 아기 펭귄 옮기다가 대박 쪼이고 울었지, 너구리 먹이 주다가 뺨 맞았지. 나 그냥 이대로 심심할래.
매일이 선물
말 못하는 동물을 맡기는 탓에 수의사들은 선물을 많이 받는다. 영국 요크셔 지방 수의사로 <아름다운 이야기> 등의 유머러스한 에세이를 썼던 제임스 해리엇도 그랬는데, 왕진을 요청한 농부들로부터 순수한 지방 100%의 잘 구운 비계 한 덩어리(그게 요크셔에선 진미라고)와 약초로 담근 술(이지만 숙취 심하기로 동네에서 소문난) 등을 대접받고는 울며불며 먹곤 했다. <닥터 두리틀>의 동물들은 대부분 주인이 없는 바람에 딱히 드릴 것이 없어 다른 환자들을 데려오지만, 선물이 없는데 진료비라고 있을 리가.
매일이 로망
<동물원에서 프렌치 키스하기>의 저자 최종욱은 로망이었던 코끼리를 한꺼번에 아홉 마리나 얻어 어루만지고 닦고 문지르고 타고 놀면서… 선생님, 새 차 뽑았습니까. <베토벤>의 악당처럼 동물 유괴와 학대를 낙으로 삼는 수의사도 있지만 동물을 좋아하는 수의사라면 매우 자주 자그만 로망 하나를 성취하기 마련이다. 털 색깔이 모두 다른 페르시안 잡종 아기 고양이 세 마리를 데리고 간 날이었다. 안절부절못하던 의사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 아기들 사진 좀 찍어도 될지… SNS에 올려도 될지….” 그의 로망은 세 자리 수의 ‘좋아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