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배우의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다. 먼저 지난 6월19일 서울 성북구의 한 고시원에서는 연극배우 김운하가 안타깝게도 숨진 지 5일 만에 발견됐다. 뒤이어 또 다른 배우 판영진의 사망 소식도 전해졌다. 지난 23일 자신의 승용차에서 발견된 그는, 조수석에 타다 남은 번개탄이 있었고 지인에게 자살을 암시하는 내용의 문자메시지를 보냈으며 평소 우울증을 앓아왔다는 점으로 미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런 일련의 사건을 통해 지난 2011년 최고은 시나리오작가가 생활고로 사망하면서, 국회에서 일명 ‘최고은법’으로 불리는 예술인복지법이 제정되고도 여전히 사각지대에 놓인 예술인 복지 문제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애초 알려지길 배우 김운하의 경우 본명은 김창규이며, 대학 졸업 후 배우 생활을 하면서 역시 배우였던 돌아가신 아버지의 이름 ‘운하’를 예명으로 썼다고 했다. 그의 아버지뻘 되는 배우들 중에서 지금 세상을 뜨고 없는 배우로 분명 김운하가 있다. 김기영 감독이 발굴한 배우로 <현해탄은 알고 있다>(1961)를 시작으로 이만희 감독의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 등 수많은 작품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법창을 울린 옥이>(1966), <왕십리>(1976), <낙동강은 흐르는가>(1976), <불의 딸>(1983), <티켓>(1986) 등 1970~80년대 임권택 감독의 거의 모든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최무룡, 신성일, 남궁원처럼 당대를 풍미한 탁월한 미남자나 그 반대편에서 장동휘, 박노식, 이대엽처럼 남성미 물씬 풍기는 마초적 매력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 특유의 쓸쓸한 표정과 유약한 이미지로 기억되는 배우였다. 특히 <돌아오지 않는 해병>에서 고아 소녀(전영선)를 유독 챙기는 그 마음씀씀이가 애틋했다.
배우 김운하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면서 몇몇 언론은 왕년의 김운하와 얼마 전 세상을 뜬 김운하를, 그 예명의 사용이라는 측면에서 서둘러 부자 관계로 단정지었다. 이번 호에 추모글을 보내온 배우 권병길 또한 한동안 그렇게 믿었다고 한다. 과거 활발하게 활동했던 배우 김운하에 대해 선명한 기억을 갖고 있던 그가, 그 아버지의 이름을 예명으로 사용하던 아들 김운하에 대해 가진 애틋한 마음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그의 글을 실을 수 없게 됐다. 몇몇 언론을 통해 마치 기정사실처럼 보도된 것과 달리 취재를 통해 두 사람은 부자 관계가 아니었음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비록 싣지는 못했으나, 원고 작성 마지막 단계까지 극단 관계자와 지인들, 그리고 여러 친구들에게 연락을 취하며 후배의 죽음을 안타까워한 권병길 배우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다.
취재 도중 알게 된, 고인의 가족과 평소 연락을 취해오던 지인은 그의 아버지가 영화인이 아니었으며, 예명 또한 아버지의 것이 아님을 얘기해주었다. 구체적인 사실관계를 확인하지 않고 기사를 양산한 언론에 아쉬움을 표한 그는 “물론 무명 배우들이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추측이 마치 진실로 엮여가는 게 마음이 아프다. 창규가 생활고보다는 지병으로 세상을 떴는데, 마치 무능한 40대 남자로 비쳐지는 것도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당초 경찰도 김운하 배우의 연고지를 찾지 못해 조용히 시간이 흘러 화장을 치를 운명이었지만, 그러지 않게 되어 다행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