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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 우리가 마주한 얼굴들

레오스 카락스 <홀리모터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맵 투 더 스타>, 조너선 글레이저 <언더 더 스킨>을 중심으로 - 박소미의 이론비평 요약

<언더 더 스킨>

메이슨의 얼굴은 정직하다. <보이후드>에서 그의 얼굴은 개인의 역사가 기록되는 영화적 공간이다. <보이후드>에 대한 지지는 우리가 잃어버린 영화 속 얼굴에 대한 향수이기도 하다. 기술의 발전으로 한편의 영화에서 배우의 현재 모습과 노인이 된 모습을 동시에 만나는 것은 흔한 일이 되었다. 대신 슈퍼히어로 시리즈가 멀티플렉스를 지배하는 시대에 사는 우리는 (감독이 아니라) 영화 산업과의 공고한 관계 속에서 (늙지 않을 뿐 아니라) 불멸하는 캐릭터를 목도하게 되었다. 히스 레저의 죽음 이후에도 조커의 영화는 계속된다. 이곳에서 대체 불가능한 것은 배우의 얼굴이 아니라 캐릭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에서는 여전히 얼굴의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홀리모터스> <맵 투 더 스타> <언더 더 스킨>은 동시대 얼굴에 관한 서로 다른 세개의 영화적 사유이다.

<홀리모터스>에서 오스카(드니 라방)의 연기는 출근 전과 퇴근 후에도 계속된다. 연기가 현실을 대체한 이 세계에는 죽음을 위한 자리가 없다. 암살자를 연기하는 장면에서 오스카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테오를 칼로 찌른다. 테오 또한 오스카를 찌른다. 우리는 살아 돌아온 자가 오스카인지 테오인지 알 수 없다. 이것은 그(들)의 생사 여부가 중요치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스카의 옛 연인 역시 자살하는 여인을 연기할 때 조금도 망설이지 않는다. 이들에게 죽음은 연기의 일부일 뿐이다. 영화에서 죽음을 근심하는 존재는 따로 있다. 바로 “우리도 곧 폐차장으로 밀려날 거야”라고 말하는 리무진들이다. 이 죽음에 대해 말하기 위해 약간의 우회가 필요하다.

산업 자본주의에서 문화 자본주의로, 소유에서 접속의 시대로 이동하면서 경험과 이미지가 거래되기 시작했다(<소유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지음). <홀리모터스> 역시 얼굴이 거래되는 세계다. 오스카가 리무진에서 뛰쳐나가 식사 중인 남자를 총으로 쏘는 장면에서 남자는 오스카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는 오스카가 리무진으로 출근 전에 연기했던 부유한 은행원이다. 오스카는 “드디어 정리됐군”이라고 말한다. 정리되었어야 하는 것이 미처 정리되지 못했던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누군가가 은행원을 연기하기 위해 은행원을 연기했던 오스카의 얼굴로 분장했고, 이것은 오류이기 때문에 오스카는 아직도 자신의 얼굴을 하고 있는 은행원을 보자마자 뛰쳐나갔다. 여기에는 하나의 얼굴과 세명의 인물이 뒤섞여 있다. 오스카, 은행원, 오스카의 얼굴로 은행원을 연기하는 또 다른 연기자. 은행원은 실존 인물일 수도, 가상의 존재일 수도 있다. 어느 경우든 은행원이라는 (가상의) 인물은 연기자의 얼굴에 접속함으로써 존재한다. 연기자들은 그/그녀가 되어주는 대가로 돈을 받는다.

<맵 투 더 스타>

스스로를 대여한다는 점에서 오스카와 리무진은 유사하다. 리무진들은 자신보다 작은 기계가 나올 미래를 두려워한다. 소유물과 달리 접속의 대상은 쉽게 대체 가능하다. 소유는 항구적이지만 접속은 일시적이기 때문이다. 오스카도 비슷한 근심을 내비친 적이 있다. 리무진에 찾아 온 남자가 “이제 못 믿겠다는 불평이 들어와서요”라고 말하자 오스카는 “카메라 때문이에요. 옛날에는 육중했는데 이제는 보이지도 않잖아요”라고 답한다. 이들의 대화는 기술의 진보로 인해 언젠가 오스카가 직업을 잃게 될 것임을 예견한다. 엔딩에서 오스카의 집과 똑같이 생긴 집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이어서 똑같이 생긴 리무진들이 주차된 장면이 나온다. 동일한 집들, 동일한 리무진들은 오스카와 리무진의 대체 가능성을 암시한다. 오스카에게는 연기 중인 개별 얼굴의 죽음이 아니라 아무것도 연기할 수 없게 되는 사태야말로 진정한 죽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반대로 오늘날 자기 자신의 얼굴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맵 투 더 스타>는 이에 대한 하나의 답변이다. 하바나(줄리언 무어)의 얼굴은 영화 출연에 대한 욕망으로 들끓는다. 일련의 장면들을 거쳐 아지타의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 시퀀스에서 하바나의 욕망하는 얼굴은 클라이맥스에 달한다. 사고 소식에 충격받는 얼굴, 아지타 대신 주연을 맡을 수도 있다는 기대에 설레는 얼굴, 이내 손사래를 치며 아지타가 해야 한다고 말하는 얼굴, 결국 영화에서 가장 기쁜 표정으로 죽은 아이에게 작별 인사하는 얼굴 등은 서로 충돌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개별 감정이나 표정이 아니라 하바나의 욕망이 만들어내는 상반된 얼굴들 그 자체이다. 하바나의 개별 얼굴들은 모두 대문자 하바나의 욕망에 예속되었다. 더불어 그녀의 얼굴은 매번 진심으로 과잉되어 있어 섬뜩하다.

하바나는 “나의 모든 일정, 테라피까지도 배역에 맞춰 짰다고요”라고 말한다. 테라피 치료사가 집필한 책 제목은 <최선을 다하라>이다. 테라피를 받을 때 하바나는 붉게 상기된 얼굴로 두려움과 불안을 폭발적으로 분출한다. 그녀는 이번에도 최선을 다한다. 테라피 치료사는 배우인 아들이 폭행사고를 저질렀을 때에도 “토크쇼에서 고백하면 돼. 새로운 돈줄을 만들 수 있어”라고 말한다. 하바나를 비롯한 성과주체들은 자기 자신의 가장 내밀한 부분, 표정과 무의식과 상처까지도 조절하고 통제하고 활용한다.

<홀리모터스>

스스로를 최대한 활용해야 하는 성과사회에서 죽음에 대한 병적인 기피는 필연적이다. 인물들은 폐경기를 배설물과 같은 층위의 농담거리로 다루며 나이 듦을 조롱한다. 이곳에서 나이가 든다는 것은 생명에 대한 통제력을 잃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죽음보다 나쁜 것은 죽어가는 것, 바로 노화이다. 원하던 배역을 얻어낸 하바나는 이제 젊음을 욕망한다. 하바나는 애거서의 애인을 유혹하며 “애거서보다 내 피부가 더 곱지”라고 묻는다. 둘의 성관계를 목격한 애거서는 하바나를 살해한다. 애거서는 하바나의 머리가 아닌 얼굴을 촛대로 내리친다. 최고의 형벌은 그녀의 얼굴, 욕망의 장을 파괴하는 것이다.

두 영화에서는 죽음이 아니라 살아 있지만 기능하지 못하는 상태, 늙어서 쓸모가 없어진 상태가 가장 문제적이다. <언더 더 스킨>에는 바로 이 죽음과도 같은 상태의 얼굴들이 등장한다. 로라(스칼렛 요한슨)의 얼굴은 텅 비었다. 그녀가 외계인이라는 사실이 무표정한 얼굴을 정당화해주지는 못한다. 인간이 아닌 얼굴에 표현성을 부여한 사례들은 많다. 의도적으로 표현력을 결여한 얼굴의 로라는 타인과 교류가 불가능하다. 로라의 대사는 대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사냥을 위한 알고리즘의 작동일 뿐이다. 무리에서 이탈한 뒤 로라는 거의 말을 하지 못한다. 로라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고 감정이 없으며 목소리가 없다. 감독은 마치 인간의 얼굴에서 비인간을 구현하는 실험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로라가 사냥한 남자들은 푸른 액체에 잠겨 형체를 잃은 채 흐느적거린다. 남자들은 죽기 직전까지, 그러니까 흐느적거리는 피부로만 존재했을 때,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니다. 그는 생물학적으로만 살아 있을 뿐이다. 인간적인 삶이 끝난 뒤에도 생명이 지속되는 상태에 처해 있는 남자(의 피부)는 식물인간의 몸과 다를 바가 없다. 인간을 가축처럼 도축해 식용고기로 가공하는 원작 소설의 설정이 근대적이라면 생명과 피부를 분리해내는 영화의 도살 방법은 탈근대적이다. 로라와 피부만 남은 남자의 얼굴에는 인간적인 것들이 제거되었다.

연기 중인 오스카의 얼굴과 쉼 없이 변하는 하바나의 얼굴은 닮아 있고, 로라가 사냥한 남자의 피부는 오스카가 근심하는 죽음의 상태와 닿아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이 순간 스크린에 비친 우리의 얼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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