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회 미쟝센단편영화제 ‘장르의 상상력전’이 6월25일부터 7월1일까지 아트나인과 메가박스 이수에서 열린다. 나홍진, 윤종빈, 조성희, 허정, 이수진 등 한국영화계에서 주목할 만한 흐름을 만들어나가고 있는 감독들이 이 영화제에서 발굴되었다는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며, 지난해 절대악몽 부문의 최우수상을 수상한 장재현 감독 역시 <검은사제들>로 장편 데뷔를 준비 중이다. 한국신예감독들의 현재를 가늠해볼 수 있는 미쟝센단편영화제는 올해 경쟁부문 57편의 단편과 류승완 감독의 단편영화를 모은 ‘류승완 단편 특별전’, ‘집’을 조명한 단편영화를 소개하는 ‘가(家)가-호호!’ 등의 초청 프로그램 등을 준비했다. 이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부문인 다섯개의 경쟁부문 상영작에서 15편의 추천작을 꼽았다.
사월
이오은 / 35mm / 2015년 / 절대악몽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T. S. 엘리엇의 그 유명한 구절로 영화의 문을 여는 <사월>은 한국인에게 영원한 ‘절대악몽’으로 기억될, 2014년 4월16일에 대한 기록이다. 타국에서 세월호 참사를 접한 이오은 감독은 이 사고의 비극적, 사회적 면모와 사고로부터 물리적, 심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던 그녀 자신의 단상을 흑백 3D 이미지와 담담한 영어 내레이션으로 재구성한다. <사월>은 세월호라는 비극의 무작위성에 대해 에둘러 경고한다. 그 배에 탄 사람은 어쩌면 당신이나 내가 되었을 수도 있다고. 분노와 슬픔의 감정에 매몰되지 않은 채 냉철한 시선으로 조명한 세월호 사고는 그 어떤 가상의 이야기보다 섬뜩하고 공포스럽다. 이런 다큐멘터리를 한번쯤 보고 싶었다.
굿나잇 미스터 리
노혜연, 홍승찬 / HD / 2015년 / 절대악몽
중섭과 절친한 전우였던 문형이 병을 앓다 세상을 떠난다. “다음은 너야!”라는 말과 함께. 그 이후 중섭에겐 이상한 일들이 일어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놈들’이 그를 쫓고, 집에 가보니 웬 정체 모를 남자가 버젓이 목욕을 하고 있다. 중섭은 ‘놈들’에 맞서 반격을 준비한다. 다섯개의 장으로 구성된 <굿나잇 미스터 리>는 이 영화가 단편이라는 점을 종종 잊게할 만큼 짜임새 있는 구성과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가 인상적인 영화다. 흑백 영상과 무성영화의 자막처럼 처리되는 대사는 이 작품이 후반부에 장전해놓은 결말과도 잘 어울리는 구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올해 칸국제영화제 단편영화부문 초청작.
출사
유재현 / HD / 2015년 / 절대악몽
한 낯선 마을에 당도해 사진을 찍는 여자가 있다. 그녀는 마을의 황량한 풍경과 사람을 찍다가 한 소년을 만난다. 소년은 ‘예쁜 것’이 있는 장소를 알려주겠다며 여자와 함께 길을 나선다. 그녀가 마을에 오래 머물수록, 그곳에선 정체를 알 수 없는 호루라기 소리가 점점 더 빈번하게 들린다. <출사>는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과 사람들을 낯설고 두려운 존재로 탈바꿈하는 재능이 돋보이는 영화다. 그저 대낮에 가만히 서 있는 동네 주민을 찍었을 뿐인데도, 그들이 좀비가 아닐까 하는 상상을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하게 만드는 영화. 마을 곳곳에서 들려오는 경쾌한 호루라기 소리는 이 작품의 미스터리적인 정서와 더불어 기괴하고 섬뜩한 사운드로 변모하는데, 영화가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귓가에 남는다.
초능력자
권만기 / HD / 2015년 / 절대악몽
민구는 자전거를 훔쳐 동생을 먹여살리는 소년가장이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우연히 악명 높은 선배의 자전거를 훔친다. 사람을 죽여 교도소에도 갔다온 적이 있는 그 선배는, 민구에게 자전거를 훔쳐 판 가격의 10배를 갚으라고 말하더니 아예 민구의 집을 점거한다. 돈을 갚지 않으면 동생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민구는 돈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닌다. 인정사정 볼 것 없는 악당이 어느 날 갑자기 일상으로 걸어 들어왔을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초능력자>는 아슬아슬한 위기의 순간과 긴장의 결을 놓지 않고 마지막까지 전력질주하는 영화다. ‘초능력자’라는 영화의 제목과 걸맞은 엔딩 신이 인상적인 작품.
그리고 가을이 왔다
최정호 / HD / 2015년 /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진웅과 지선은 오랜 친구다. 결혼을 앞둔 지선은 뒤늦게 군생활을 하고 있는 진웅에게 청첩장을 주기 위해 만난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하면서도 서로에게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듯한 이들의 재회는 밤이 깊어가며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흐른다. <그리고 가을이 왔다>는 대사의 묘미를 느낄 수 있는 영화다. 술집에서 거리로, 거리에서 바닷가로 자리를 옮기며 진행되는 두 남녀의 대화는 이미 수많은 멜로영화들이 다뤄왔던 감정에 대한 것이지만, 오랫동안 서로를 잘 알고 있는 이들에게서만 가능할 인위적이지 않은 진솔함이 보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주연배우 배유람과 박예영의 호흡이 좋다.
여름의 끝자락
곽새미, 박용재 / HD / 2015년 /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10대 말미에 접어든 소녀들에게, ‘3’이라는 숫자는 위험하다. 둘도 없는 단짝친구였던 경희와 주연 사이에, 어느 날 전학온 소영이 끼어든다. 부쩍 친해지는 경희와 소영을 지켜보며 주연은 상실의 감정을 경험하고, 수의사인 소영의 아버지와 주연의 아버지가 저지른 일은 이 세 소녀의 여름을 뒤흔들어놓는다. <여름의 끝자락>은 사랑과 우정을 쉽게 분간할 수 없는 질풍노도의 시기,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생채기를 가슴에 남기게 되는 소녀들의 일상을 조명한다. 때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회피하는 것이 최선의 대답이 될 수 있겠지만, 주연의 긴 울음은 이 여름이 그녀에게 꽤 오랫동안 기억될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9월9일
정혜진 / HD / 2015년 /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바닷가 마을에 살고 있는 어느 중년 여성의 하루가 시작된다. 그녀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생선을 말리고, 떡을 포장하고, 사람들을 만난다. 해가 저물고 그녀의 친구들이 모여들면 영화가 감춰두고 있던 사연이 고개를 내민다. <9월9일>은 담백한 영화다. 인생의 풍파에 크게 흔들리던 순간도 분명 있었을 테지만 이미 그 시절을 다 겪고 잔잔한 바다처럼 평온해진 중년 여성이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던지는 대화에서 인생에 대한 가볍지 않은 성찰이 묻어난다. “지는 지대로 살고, 나는 내 팔자대로 사는 거지.” 마음속에 묻어 두었던 이야기 한 자락과 막걸리, 고요한 바다가 어우러지는 후반부 시퀀스가 잔잔한 여운을 남긴다.
정글
박병훈 / HD / 2015년 / 4만번의 구타
등산로. 여대생 소미는 선발대 MT 대열에 뒤처져 있다. 교수의 잦은 성추행에 질려 늑장을 부린 탓이다. 마침 그곳에서 소미를 본 측량기사 우진이 길안내를 자처한다. 우진은 업무 미숙으로 상사와 동료에게 핀잔을 들은 차였다. 호의로 시작된 만남은 우진이 길을 잘못 들면서 급반전된다. 소미는 우진을 탓하고, 우진은 그런 소미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여긴다. <정글>은 이들이 직장과 학교라는 사회에서 겪은 피해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우진의 공격에 소미는 “니들이 다 그렇지”라고 냉소하고, 우진은 “내가 아직 만만해 보이지”라는 말로 응수한다. 인적이 없는 밤의 숲길은 물리적 힘이 더 센 우진이 우위에 설 수 있는 장치다. 이는 바로 인격과 도리를 잃어버린 지금의 사회를 은유하는 공간이다. 여성혐오나 상대에 대한 무시가 일반화된 사회는 정글과 다를 바 없다. 남은 건 이제 폭력뿐이다.
야누스
김성환 / HD / 2014년 / 4만번의 구타
사건의 발단은 눈길에서 사람을 친 두 남녀다. 사건 처리를 두고서 남녀는 의견 차이를 보이는데, 신고를 하자는 여자와 달리 남자는 그런 그녀를 위협한다. 사실 오늘의 사건은 남녀의 오랜 관계를 드러내줄 계기로 작용한다. 연인으로 보이는 둘은 오랫동안 보험사기를 공모해 온 범죄자들이다. 여자는 이제라도 정신을 차리고 새 삶을 살고자 하지만 남자는 그 설득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야누스>는 끝없는 범죄행각에 종지부를 찍을 한 여자의 결단의 순간을 그린다. 이를 극대화하기 위해 영화는 최소한의 보여주기 방식을 택한다. 외부 상황은 차 앞 유리, 선루프, 옆 창 등을 통해 전달되며, 차창을 통해 전달되는 인물 묘사는 제한적이다. 대신 긴장 섞인 대화, 가쁜 숨소리, 고성 등 사운드가 주는 긴장은 덕분에 더 부각된다. 미니멀한 장치로 인물들의 급박한 상황과 스릴감 넘치는 심리를 전달하는 실험적 형식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옆구르기
안주영 / HD / 2014년 / 희극지왕
중학생 소미의 일상은 또래 아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고장난 MP3 대신 새 것을 사고 싶고, 남동생과는 맨날 티격태격하며, 집에서는 TV만 보는 아빠와 대화 없이 보내는 평범한 사춘기. 체육 시간에 하는 옆구르기는 그런 소미에게 근래 들어 가장 큰 고민거리다. 남들은 다 되는데 나만 안 되는 것 같아 억울한데, 관심 가는 남학생에게 잘 보이려면 어쩔 수 없이 옆구르기를 해야 한다. <옆구르기>는 사춘기 소미의 아기자기한 성장담이다. 그땐 내 기호를 무시한 엄마가 사다주는 꽃무늬 속옷이 맘에 안 들 나이이고, 바바리맨을 통해 성에 대한 공포를 더 크게 갖는 나이다. 마음으로는 다 컸지만 모든 게 미숙한 시절. 영화는 어른이기엔 그렇게 ‘초보’인 소녀의 감정을 일상의 해프닝과 함께 섬세하게 엮어낸다. 옆구르기 연습을 하다 다리를 다친 소미처럼, 그 시절 ‘삐끗’했던 경험을 통과해온 모든 이들에게 잔잔한 웃음을 선사하는 작품.
누구인가
손기호 / HD / 2014년 / 희극지왕
내가 누구인지 말해줄 자 누구인가. 민상은 이 <리어왕>의 질문으로부터 시작되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 태리는 그의 작품에 출연하기 위해 민상이 여자를 밝힌다는 걸 알면서도 그에게 접근한다. 태리를 좋아하는 조연출 주현은 민상을 증오하지만 언젠가 연출이 될 자신을 생각하며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한다. 자신을 알고 싶어 자신의 이야기를 쓴 희곡작가 지웅은 민상에게 작품을 뺏긴다. 연극판을 무대로 네 등장인물의 얽히고 설킨 관계를 풀어나가는 이 작품이 주목하는 건 ’진실’이다. 민상은 ’자신을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이 진실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그가 누누이 말해왔던 건 그저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알게 되는 블랙 코미디. <아가씨>에 캐스팅된 김태리의 연기를 미리 만나볼 수 있는 즐거움도 있다.
실버벨
유수민 / HD / 2014년 / 희극지왕
도어 수리공인 70대 노인 문수(전무송). 어느 날 함께 카바레를 다니던 여자친구 춘자가 핸드백을 날치기당하고 병원에 입원했다. 문수와 친구들은 춘자의 물건을 찾고 보상비를 받고자 범인을 찾아나선다. 슈퍼 아주머니의 증언을 바탕으로 야쿠르트 배달원을 찾아가 범인의 몽타주를 구성하는 등 노인들의 ‘탐정’ 활동은 꽤 그럴듯하게 전개된다. 그런데 이 대결의 구도가 흥미롭다. 춘자에게 몹쓸 짓을 한 범인은 노인을 만만하게 본 한참 어린 고등학생이었다. 잡힌 소년이나 그 부모나 노인들을 몰아붙이기는 매한가지다. 젊은이들의 패악질에 대고 아무리 “어디 노인들에게 그게 할 소리냐”, “우리도 자존심이 있는 사람들인데”라고 해봤자 돌아오는 건 무시와 냉소뿐이다. <실버벨>은 사회적인 활동 연한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노인들에 가해지는 일상의 폭력을 소소한 에피소드로 비판한다.
연희
백해선 / HD / 2014년 / 비정성시
“최연희, 이번 과제는 좀 살살해라. 기죽는다.” 과 친구들에게 이런 핀잔을 들을 정도로 연희는 문예창작과 학생 중에서도 글 잘 쓰는 ‘과톱’이다. 하지만 교수에게 “연희가 긴장 좀 해야겠는데”라는 평가를 들은 청강생 강희의 등장으로 그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 그간 무명작가의 글을 베껴서 인정을 받아왔던 연희는 자신의 능력으로 좋은 글을 생산하는 강희에게 크나큰 열등감을 느낀다. 그리고 ‘비밀 드러내기’ 수업시간을 통해 자신에게 관심을 되돌릴 특단의 조치에 나선다. 자신의 치부를 남김없이 털어놓는다는 전제로 행해지는 이 수업은 영화 <연희>의 긴장이 극대화되는 지점이다. 표절로 인한 죄의식 한편으로 최고가 되고자 하는 열망, 또래에 대한 경쟁심리 등 분리될 수 없는 연희의 복잡한 심정이 하나의 신으로 응축된다.
열정의 끝
곽은미 / HD / 2015년 / 비정성시
고등학생 미란은 체육대회를 앞두고 자원한 단체줄넘기 연습에서 번번이 걸린다. 담임교사 채영은 그런 미란을 봐주지 않는다. 채영은 미란만 교체하면 팀이 우승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 결정을 밀어붙인다. 미란은 기회를 박탈하는 채영의 교육방침이 잘못된 것이라며 팽팽히 맞선다. 얼핏 보면 미란의 성장기 같지만 <열정의 끝>은 성장영화의 결과는 사뭇 다르다. 채영과 미란은 사제지간이 아닌, 선생과 학생으로 대처하는 각각의 인물들이다. 끝까지 단체줄넘기에 참여하고 싶은 미란의 열정은, 이번 대회에서 반이 우승해 새로 부임한 교장에게 신임을 얻고자 하는 선생의 욕망과 팽팽하게 맞선다. 문제는 사건의 공간이 학교라는 점이다. 부당한 선생의 처우를 향한 미란의 극단적 항거는, 학교만큼은 여전히 평등한 기회의 장이라는 원칙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걸 시사해주는 지점이다.
열대야
서은선 / HD / 2015년 / 비정성시
열대야로 잠 못 이루는 여름 밤. 화장품 체인점 직원이자 오랜 결혼생활로 남편과도 설렘 없이 지내는 지애. 일상에 지친 지애의 삶도 더위와 함께 끓어오른다. 옆집 여자 수영은 그런 지애와는 사뭇 다르다. 수영의 고양이를 계기로 지애는 잘나가는 직장, 멋진 인테리어로 점철되는 수영의 럭셔리한 생활을 엿보게 된다. 그 결과는 결국 자신에 대한 총체적 비난으로 돌아온다. 지애가 그런 자신의 열등감을 채우는 방식은 기이하다. 그녀는 출장 간 사이 ‘고양이를 봐달라’고 수영에게 건네받은 아파트 비밀번호로 그 집에 들어가 수영의 생활을 몰래 대리 체험한다. 명품 옷과 서구식 음식, 안락한 소파, 쾌적한 침대에서의 섹스 모두 지애가 가지지 못한 어떤 결핍이다. 지애의 비밀 행각을 안 남편은 그녀에게 비루한 자신의 집을 가리키며 “여기가 우리 집이야”라고 일깨운다. 자본이 극대화된 사회. 남과의 비교로 생긴 결핍의 뿌리는 깊다. 지애의 극단적 행동이 지금의 이 욕망의 정체를 가감 없이 드러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