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는 약자를 알아본다. 마흔 가까운 나이에 최연소이자 유일한 싱글 여자로 가평에 끌려갔던 그 밤, 꼬마들은 열명이 넘는 어른 중에서 누가 가장 약한지를 대번에 눈치채고는 배드민턴 라켓을 들고 왔다. “이모, 우리랑 놀아요.” 누가 네 이모라는 거니, 그건 그렇고, 너 이름이 뭐니. 부모들이 고기를 굽고 술을 마시는 동안 나는 통성명도 하지 않은 생면부지 꼬마 무리를 거느리고 두 시간 동안 배드민턴을 쳤다. “이모, 왜 이렇게 못 쳐요, 깔깔깔.” 그래, 나 배드민턴으로 체육 실기 시험 봐서 C 맞은 사람이다! 그래서 20년 넘게 라켓을 꺾었는데 너네 때문에 이러고 있다! 야외에 나온 꼬마들이 흥분해 좀처럼 잠들지 않았던 그날 밤은 매우 길었다.
내가 전전한 다양한 직업과 아르바이트 중에서 절대 다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나만 고르라면 단연코 애 보기다. (돈 받고 한 일도 아니고 일하던 가게 주인 아줌마가 가끔 떠맡겼다.) 뽀로로가 없던 암흑의 1990년대, 세평 가게에 갇힌 꼬마가 가지고 놀 장난감이라곤 하나뿐이었다. 그건 나, 바로 나. “언니, 개구리 접어줘.” 날 언제 봤다고 반말이니. “언니, 나 잡아봐라.” 잡히면 죽는다. “언니는 왜 남자친구도 없어?” 그러는 너는 있냐. 아, 있다고, 좋겠다. 태엽 감은 것처럼 지치지도 않고 가게 안을 빙글빙글 돌던 그 애가 오는 날이면 나는 고작 네 시간 노동에 초주검이 되곤 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당시 나는 보모로 꽤 괜찮은 조건이었다. <내니 다이어리>의 고학력 보모 애니(스칼렛 요한슨)가 말하기를, 백인이고 대졸이고 싱글이면 뉴욕 어퍼이스트사이드에 사는 부잣집을 골라서 갈 수 있다. 나 한국인, 대학생, 싱글, 거의 비슷하지. 이왕 애를 봐야 했다면 돈 받고 볼 걸 그랬다. 그런데 가만, 나는 이제 대졸이 아닌가. 지금이라도 할 수 있을까, 보모? 대규모 실업의 시대를 맞아,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20대의 기억을 지우고 텅 빈 잔고만큼이나 깨끗하게 열린 마음으로 탐구해보았다, 곳곳에 부비트랩이 깔린 정글의 세계, 보모의 도(道)를.
2004년 국제내니협회가 선정한 ‘올해의 내니’였다는 미셸 라로위는 아이가 처음 떼를 쓸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완전히 무시하는 거라고 했다. 이분 뭐랄까… 스파르타야, 내니 맥피보다 무서워. 철의 마법 보모 <메리 포핀스>의 계보를 잇는 <내니 맥피> 시리즈의 내니 맥피(에마 톰슨)는 1편에선 아이 일곱을, 2편에선 다섯을 손바닥 위에 놓고 굴리는 놀라운 기예를 선보인다. 어딘가 조교답다 싶더니 2편에선 아예 군복까지 입고 꼬마들을 지휘하는 내니 맥피, 필요하다면 폭력도 불사하는 스파르탄 보모. 하지만 내가 그랬다간 “엄마한테 이를 거야”로 보복당했겠지. 내니 맥피의 마법 지팡이보다 무서운 마법의 한마디, “엄마한테 이를 거야”.
그래도 보모에게 있어 군인 정신이란 소중한 무기가 될 수 있다. 숱한 상륙 작전과 폭격전을 지휘한 불굴의 해병대원에서 다섯 꼬마에게 농락당하며 판다 댄스나 추는 굴욕의 구렁텅이로 추락한 <패시파이어>의 울프 대위(빈 디젤)도 그 군인 정신을 소중히 간직한 끝에 불굴의 보모로 거듭나지 않았던가. 돈 주고도 간다는 해병대 캠프, 내니 울프가 집으로 배달해드립니다.
하지만 아이 다섯에서 일곱 정도는 이 남자에 비하면 깃털처럼 가벼울지니 <유치원에 간 사나이>의 킴블 형사(아놀드 슈워제네거)는 열댓은 되는 꼬마들을 돌봐야 한다. 애완용 족제비, 그리고 군인 정신에 입각한 구령과 호각과 규율에 힘입어 훌륭하게 꼬마들을 조련하는 킴블을 보자니 즐기자고 영화를 보기 시작한 내 마음이 다 무거웠지만, 나는 상상하고 말았다…. 저 많은 꼬마들과 그 꼬마들만큼이나 많았을 애 엄마들과 더불어 지냈을 영화 스탭들의 고난을. 거긴 지옥이었을 거야, 아주 끔찍해.
그럴 수밖에, 맨몸으로 정글에 던져진 보모에게 애보다 무서운 것이 있다면 그건 애 엄마니까. 애를 만나자마자 정강이를 걷어차인 <내니 다이어리>의 애니는 아이에게 금단의 열매 땅콩버터를 제공하여 환심을 사지만, 천하무적 엄마만은 당할 수가 없다. 분명 영화 초반엔 가정부가 있었는데 어느새 장을 보고 집안일을 하고 조개 관자로 프랑스 요리까지 만들라고 시키는데…. 엄청 부잣집이라며, 요리사는 어디 갔어. 길고도 고단했던 가평에서의 그 밤, 어느 술 취한 애 엄마도 나에게 그랬다. “정원씨는 왜 술도 안 마셔? 우리랑 놀기 싫다는 거야?” 과연 그럴까요, 내가 지금 라켓을 놓고 술을 마시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그에 비하면 애 엄마가 어찌나 안 나오는지 영화 중반이 될 때까지 얼굴도 못 알아볼 <업타운 걸스>는 얼마나 건전한가. 꼬마 주제에 어른을 타이르고 훈육하는 조숙한 숙녀 레이(다코타 패닝)가 조금 기분 나쁘기는 하지만, 어린이는 어른의 거울이라잖아, 나처럼 모자란 어른은 얼마든지 어린이한테 배울 자세가 되어 있다고.
꼬마 무서운 줄 몰랐던 스무살, 정신이 나갔던지 제 발로 공부방에 걸어 들어가 초등반을 가르쳤던 내가 2년 만에 봉사 활동을 그만둔 건 남자애들의 선물을 받고 나서였다. 그 애들이 어렵게 마련한 선물은 방금 잡았는지 보드라운 털에 윤기가 흐르고 피가 딱 한 방울 맺힌 죽은 쥐. 그 순간, 새벽 다섯시에 일어나 김밥 30줄을 싸고 교사 대 꼬마 비율 1 대 5의 난장판 소풍을 다녀온 끝에 아르바이트하던 카페에서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다리가 풀려 넘어졌는데도 꿋꿋하게 버텼던 내 영혼이 무너졌다. 아, 이게 사는 건가, 지금부터 내 인생에 꼬마란 없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고 연휴로 꽉 찬 이번 가정의 달을 보내던 나는 야생동물처럼 공원을 뛰어다니는 꼬마들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저토록 귀여운 생명체가 어떻게 자라면 이런 어른이 되는 걸까. 꼬마 없는 세월 1X년, 무서운 거라곤 태엽 장치 여섯살배기뿐이었던 시절이 오히려 평온했다. 무서운 꼬마가 자라면 더욱 무서운 어른이 되니, 차라리 그나마 덜 무서운 꼬마들과 더불어 사는 편이 낫겠다.
고양이야 미안해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보모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두세 가지 필살기
애완동물
<유치원에 간 사나이>의 킴블은 강력범보다 난폭한 꼬마들 사이에서 이성을 잃고 타고난 그대로의 성질을 부리다가 아이들이 울음을 터뜨리자 당황해한다. 킴블이 어디론가 뛰어갔다가 들고 온 것은 애완용 족제비, 매우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존재만으로 동심을 휘어잡는 마법의 존재. 수백명 꼬마들에게 닳고 닳은 유치원 교사인 내 동생도 인정하는 말 많고 귀찮은 꼬마였던 내 조카(그러니까 자기 딸)가 우리 집에 왔을 때도 고양이 한 마리만 던져주니 모든 난동을 잠재울 수 있었지. 미안했어, 내 고양이, 조카가 가고 나니 곡기를 끊고 잠만 자더구나.
개인기
아무리 잠입 수사 중인 경찰이라고 해도 그렇지 요리도 하기 싫고 청소도 하기 싫고 애들 단속하기도 싫은 <빅마마 하우스2: 근무 중 이상무>의 나태한 위장 보모 빅마마, 본명 말콤 요원(마틴 로렌스)이 한 가지 잘하는 것이 있다면 춤이다. 해고될 위기의 순간, 치어리더인 딸에게 춤을 가르쳐야 한다며 붙어 있는 동시에 엄마에게도 춤바람을 불어넣는 신의 한수. 본인은 매우 열심히 하지만 애들은 싫어하는 <패시파이어>의 내니 울프에게 신의 한수는 호신술이다.
눈치
<내니 다이어리>의 보모 애니는 꼬마에게 땅콩버터를 퍼먹이는 순간, 그 마음을 사로잡는다. 고칼로리 지방은 언제나 성공적. 하지만 모든 꼬마가 고칼로리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업타운 걸스>의 레이는 빵에 설탕을 뿌리기 전에 크림을 발라야 한다는 보모에게 냉정한 한마디를 던진다. “살쪄.” 하지만 그 꼬마가 티타임을 좋아한다는 걸 눈치챈 보모 몰리(브리트니 머피)는 엄청난 승부수를 던지니, 유원지 코니아일랜드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거대한 티컵 놀이기구. 티타임을 원한다고? 이게 진짜 티타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