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절대, 단 한번도 나 자신이 ‘프리티 걸’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다. 간혹 ‘엄청나게 예쁜’ 캐릭터가 등장하는 시나리오를 받으면 왜 이 시나리오를 내게 보냈는지 의문이 든다.” 롭 마셜의 뮤지컬영화 <숲속으로>(2014)를 통해 신데렐라의 유리구두를 신은 안나 켄드릭이지만, 그녀는 자신이 ‘공주’과의 여배우가 아니라고 단호히 말한다. 1m 60cm가 채 되지 않는 아담한 체구, 고집스런 인상을 주는 날렵하고 뾰족한 코, 살짝 돌출된 치아를 시원하게 드러내며 웃는 표정 등 켄드릭의 외형적 특징은 전형적이기보다 개성적이다. 가녀린 듯 강해 보이고, 순진한 듯 영악해 보이고, 어린 듯 성숙해 보이는 이중적 이미지의 공존 또한 켄드릭의 매력을 증폭시킨다. 하지만 모두가 공통적으로 동의하는 것 한 가지는 그녀가 ‘작은 거인’이라는 사실이다.
12살이던 1998년에 뮤지컬 <하이 소사이어티>의 디나 역으로 토니 어워드 뮤지컬 부문 최우수 여배우상 후보에 오른 켄드릭은 일찍이 될성부른 떡잎이었다. 스티븐 손드하임의 뮤지컬 <어 리틀 나이트 뮤직>으로 뉴욕시티오페라 무대에 선 것도 10대 때의 일. 영화 데뷔작은 뮤지컬영화 <캠프>(2003)였다. 미성숙한 10대 소녀 프리치의 질투와 열정과 오기를 한껏 응축해 터뜨렸던, <The Ladies Who Lunch>를 부르는 무대 장면이 압권이었다. 켄드릭의 폭발적 에너지는 속사포처럼 떠들어대며 토론을 주도하는 여고생 지니를 연기한 <로켓 사이언스>(2007)로 이어졌고, <인 디 에어>(2009)의 제이슨 라이트먼 감독은 <로켓 사이언스>에서의 켄드릭을 보고 <인 디 에어>에 그녀를 캐스팅한다. <인 디 에어>에서 온라인 해고 시스템을 개발한 당찬 신입사원 나탈리로 열연한 켄드릭은 골든글로브와 오스카 여우조연상 후보에 이름을 올리며 할리우드의 샛별로 당당히 떠오른다. 규모가 작은 영화의 개성 있는 캐릭터로 눈도장을 찍으며 커리어를 쌓았지만 동시에 <트와일라잇>(2008)과 <뉴 문>(2009)에 주인공 벨라의 친구 제시카 역으로 출연하며 대중적인 인지도 또한 함께 쌓았다.
<트와일라잇> 시리즈에서 켄드릭의 역할은 사실 미미했다. 영리한 그녀는 블록버스터영화의 평범한 캐릭터에 기대는 대신 에드거 라이트 감독의 <스콧 필그림 Vs. 더 월드>(2010), 조셉 고든 레빗 주연의 <50/50>(2011) 등에 출연하며 배우로서의 영역을 넓히는 데 집중한다. 그리고 2012년, 자신의 대표작 <피치 퍼펙트>를 만난다. <피치 퍼펙트>에서 켄드릭은 음악적 재능과 배우로서의 매력을 폭죽 터뜨리듯 마구 터뜨린다. <피치 퍼펙트> 전반엔 켄드릭의 특별한 인장인 아름답고 힘 있는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제이슨 무어 감독의 <피치 퍼펙트>는 바든대학교의 여성 아카펠라 그룹 벨라스 멤버들의 좌충우돌 ‘배틀’을 그린 흥겨운 음악영화다. 켄드릭은 커다란 헤드폰과 음악 믹싱 프로그램을 벗 삼아 DJ의 꿈을 키워가는 신입생 베카를 연기했다. 환상적인 하모니와 흥겨운 군무가 포인트인 이 영화에서 켄드릭은 주인공답게 몇번의 독무대를 갖는다. 그리고 매번 그 무대를 완벽히 자신만의 순간으로 만들어버린다. 특히 인상적인 공연 장면은 플라스틱 컵을 두드리며 <Cups>를 부른 오디션 장면과 가창력뿐 아니라 완벽한 리듬감을 자랑하며 <No Diggity>를 부른 ‘리프 오프’(riff off) 대결 장면, 샤워실에서 알몸으로 <Titanium>을 부르던 장면이다. 특히 ‘컵 송’의 인기는 쭉쭉 치솟았고, 안나 켄드릭의 컵 반주 따라하기는 유튜브를 통해 유행처럼 퍼져나갔다. 그리고 켄드릭은 따로 <Cups>의 뮤직비디오까지 찍었다. 영화의 30초짜리 한 장면이 4분여의 뮤직비디오로 확장되는 흔치 않은 일이 벌어진 셈이다.
3년 만에 선보이는 <피치 퍼펙트>의 후속편 <피치 퍼펙트: 언프리티 걸즈>에선 사회 진출을 앞두고 있는 벨라스 멤버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벨라스는 미국 대학 최고의 아카펠라팀에서 망신살 뻗친 아카펠라팀으로 전락하는데 세계 챔피언 무대에서의 우승을 목표로 이번에도 쉽지 않은 단합의 과정을 거친다. 켄드릭은 벨라스의 리더 베카로 돌아와 영화의 중심을 잡는다. 베카가 독자적으로 핀 조명을 받는 장면은 많이 줄었다. 2편에선 팻 에이미(레빌 윌슨)를 중심으로 한 에피소드가 많아졌다. 팻 에이미의 코미디와 러브 라인이 주목받게끔 설계된 터라, 켄드릭은 한발 물러서서 개성 강한 캐릭터들이 한데 뭉칠 수 있게끔 균형을 잡는 역할에 집중한다. 체격과 인상으로 먼저 상대를 제압하는 독일 아카펠라팀 앞에서 작고 보잘것없는 ‘루저’가 되어버리는 베카의 모습은 의외의 재미를 안겨준다. 12살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브로드웨이와 할리우드를 섭렵한 여배우가 ‘호빗’ 같다는 얘기를 들으며 루저들의 리더를 연기하는 모습이라니…. 영리한 배우 안나 켄드릭은 자신의 신체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자신의 끼를 어떻게 발산해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듯 보인다.
<캠프>, <피치 퍼펙트>, <더 라스트 파이브 이어즈>(2014), <숲속으로>, <피치 퍼펙트: 언프리티 걸즈>로 이어지는 일련의 음악영화, 뮤지컬영화로 켄드릭은 할리우드의 디바가 되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립 싱크 배틀> 프로그램에 출연해 원디렉션의 <스틸 마이 걸>을 부르며 한껏 망가지곤 한다(이 프로그램에 출연한 많은 배우들이 스스로 망가지길 주저하지 않지만). “배우는 항상 야망보다 겸손이 더 커야 한다”고 말하는 켄드릭은 기꺼이 자신을 낮춘다. 그녀의 야망 혹은 희망은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계속해서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필모그래피를 쌓아가는 것이다. 조 스완버그의 <디깅 포 파이어>, 딜런 키드의 <겟 어 잡>, 존 크래신스키의 <더 홀라스>, 게빈 오코너의 <어카운턴트>, 제이크 시맨스키의 <마이크 앤드 데이브 니드 웨딩 데이트>, 마이크 미첼의 <트롤>, 파코 카베자스의 <미스터 라이트>, 제프리 블리츠의 <테이블 19> 등 그녀의 차기작 목록을 보면(제목을 열거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다), 그 바람은 이미 순조롭게 실현되고 있는 듯하다.
Magic hour
모두 컵을 두드려봐
레스토랑의 여느 평범한 주방 한켠. 푸른색 브이넥 셔츠를 입은 안나 켄드릭이 밀가루를 반죽하고 있다. 컵을 엎어 반죽을 둥글게 떼어내고, 손에 묻은 밀가루를 털어내고, 서서히 컵 하나로 리듬을 타기 시작한다. 단순하지만 막상 따라하려면 쉽지 않은 컵 박자 맞추기를 레스토랑의 모든 손님들이 따라한다. 켄드릭이 <Cups>를 부르기 시작하면 원 테이크로 촬영된 화면이 쭉 이어진다. 그때부터 켄드릭은 자유자재로 레스토랑의 공간을 누비며 자기만의 동선을 만들어간다. 물론 사전에 계획된 동선이고 동작이겠지만 켄드릭의 표정이며 행동엔 연기를 하고 있지 않은 듯한 자연스러움이 배어 있다. 기어이 플라스틱 컵을 꺼내 두드리게끔 하는 중독성 강한 노래와 뮤직비디오다. 참고로 <Cups>의 원곡은 1931년 발표된 카터 패밀리의 포크송 <When I’m Gone>이며, <피치 퍼펙트>의 베카가 부른 <Cups>는 2009년에 밴드 룰루 앤드 더 램프셰이즈가 컵을 두드리며 부른 <You’re Gonna Miss Me>를 변주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