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자’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출범한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올해로 17회를 맞았다. 이번 행사는 5월27일(수)부터 6월3일(수)까지 8일간 메가박스 신촌,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열린다. 총 37개국 111편의 작품이 상영된다. 비경쟁부문 작품을 중심으로 상영작을 미리 살펴봤다.
영화제는 자매의 이야기인 <마이 스키니 시스터>로 문을 연다. 동생의 시선에 비친 언니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동생 스텔라에게 언니 캇차는 부러운 존재다. 캇차는 실력을 인정받는 피겨스케이팅 선수이며, 가족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 언니를 따라 스텔라 역시 피겨를 배우지만 통통하게 살이 오른 그녀를 지탱하기에 스케이트 날은 너무 가볍고, 얼음은 너무 미끄럽다. 그러던 어느 날 스텔라는 언니가 식당 화장실에서 손가락을 입에 넣어 먹은 것을 게워내는 장면을 목격한다. 스웨덴의 산나 렌켄 감독은 전작 <점심식사>에서 식이장애 병동을 배경으로 한 작품을 연출한 바 있다. <마이 스키니 시스터>는 식이장애에 관한 감독의 관심이 지속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동생의 콤플렉스에서 언니의 강박으로 극의 중심을 자연스럽게 옮기면서 대조적으로 보였던 두 사람이 유대를 맺을 수 있는 지점을 마련한다.
세계 여성영화의 흐름을 조망할 수 있는 새로운 물결 섹션에서 소개될 <비비안의 이혼재판>은 이미 유수의 영화제에서 소개되며 주목받았다. 남매인 로니트 엘카베츠와 술로미 엘카베츠가 공동 연출했으며 누나인 로니트 엘카베츠는 비비안 역을 맡아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다. 영화는 다소 실험적인 성격을 띤다.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공간은 오직 재판정과 대기소뿐이다. 헤어드레서인 비비안은 남편과의 이혼을 원하지만, 남편은 이를 들어주지 않는다. 비비안이 왜 이혼하기를 원하는지, 두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두 사람의 관계를 증언하기 위해 출석한 이웃들에 의해 조금씩 드러난다. 재판정이라는 좁은 공간을 백분 활용한 카메라 구도와 인물의 심리를 반영한 타이트한 숏을 통해 영화의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전한다. 이와 함께 이혼을 쟁취하기 위한 지난한 과정을 관객 역시 그대로 체험하게 한다.
<걸후드>는 가난하고 폭압적인 가정 형편 아래 억눌려온 마리엠이 자유분방한 세명의 소녀 무리를 만나면서 조금씩 변화하는 이야기다. 영화에서 그리는 소녀들의 세계가 마냥 가볍고 유쾌하지만은 않다. 마리엠은 때로는 지나가는 약한 학생의 돈을 갈취하고 손위 여성을 협박하는 짓도 서슴지 않는다. 영화 속 소녀 무리의 성격은 ‘보이’를 ‘걸’로 치환한 제목처럼 남성들의 전유물로 일컬어지고 소년들의 것이라고 여겨왔던 반항적인 행동을 성 역할만 바꿔버린 것에 가깝다. 소녀들은 미식축구를 하거나 모래밭에서 몸싸움을 벌인다. 소녀들의 행위는 위악적인 데가 있고, 영화도 이를 알고 있다. 감독 셀린 시아마는 전작 <톰보이>에서 남자처럼 꾸미길 좋아하는 소녀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마리엠은 톰보이의 주인공이 성장한 뒤의 모습 같다. 주인공의 욕망이 비교적 명확했던 <톰보이>와 달리 이 작품에서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오가는 주인공의 혼란스러운 위치가 분명히 드러난다.
영화제는 매년 새로운 국가를 선정해 그 나라의 영화를 특별전 형식으로 소개해왔다. 올해는 스웨덴 여성영화를 소개한다. <말 타는 소녀들>은 승마곡예단 소녀들의 사랑과 우정을 그린다. 제목이 주는 동적인 이미지와 달리 영화는 훨씬 정적이다. 엠마는 곡예단 입단 테스트를 통과해 훈련생으로 합류한다. 거기에서 도발적인 눈빛을 지닌 소녀 카산드라와 사랑과 우정 사이의 은밀한 감정을 공유한다. 소녀들의 희희낙락대는 웃음소리가 갑작스러운 침묵에 젖어드는 순간을 통해 장난스러움과 위험함이 맞붙어 공존하는 10대의 불온한 감정을 보여준다.
올해의 쟁점은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는 선언적인 부제를 달고 있다. SNS를 통해 뜨겁게 달궈진 여성과 페미니즘에 대한 혐오, 이에 대한 반발과 조롱으로 터져나온 페미니스트 선언이라는 일련의 사태를 반영한 것이다. <분노할 때 그녀는 아름답다>는 여성운동의 역사를 되짚는 다큐멘터리다. 사진, 영상, 글 자료를 통해 과거의 여성운동을 조명하고, 페미니스트 활동가를 다시 찾아가 인터뷰하는 회고적인 성격의 작품이다. 이제는 과거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노쇠했지만, 힘주어 말하는 목소리와 눈빛은 여전히 분노해야 함을 후세대에 권한다.
회고전에서는 ‘누아르 퀸, 금기를 찍다’라는 제목으로 아이다 루피노의 작품을 소개한다. 아이다 루피노는 고전영화기 할리우드에서 활동했던 감독이다. 아시아에서 그녀의 작품이 소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953년작 <히치하이커>는 히치하이커가 자신을 태워준 차량의 운전자를 살해했다는 실화에서 출발한 이야기다. 자동차로 미국에서 멕시코로 향하던 두 남자가 길에서 히치하이킹하는 한 남자를 태운다. 두 사람이 경계를 풀고 있을 때 남자는 느닷없이 총구를 들이밀어 둘을 당황시킨다. 한 남자가 두 사람을 밤낮으로 통제한 채 국경을 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서부극을 연상시키는 공간, 한밤의 항구 등 누아르적인 공간을 오가며 펼친다.
여성영화제는 때때로 주목할 만한 시선을 지닌 남성감독의 작품 역시 소개해왔다. 퀴어 레인보우 섹션의 <우리 삶의 이야기들>은 케냐의 짐추추 감독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극영화다. 영화는 몇편의 단편들로 구성된 옴니버스 형식을 띠고 있다. 게이 소년과 섹스 경험을 자신의 파트너에게 털어놓는 레즈비언 소녀, 이성애자 남성을 좋아하게 된 게이 등 다양한 인물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다. 다섯 에피소드 가운데 자신의 게이 정체성에 눈뜬 남자의 심정을 달리는 남자의 측면숏에 담아낸 <RUN>이 인상적이다.
지난해 다큐멘터리 옥랑문화상 수상작인 이희원의 <홀리 워킹데이>는 월드 프리미어로 상영된다.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발급받아 호주로 떠난 감독이 그곳에서 만난 20대 청춘들의 이야기를 듣는 형식의 사적다큐멘터리다. 영화 전반에는 20대의 전유물처럼 일컬어지는 다소 자조적인 톤의 일기체 내레이션이 시종 흐른다. ‘왜 호주까지 와서 이러고 있을까’라고 푸념하면서도 결국 농장에서 고된 노동을 하는 이들의 모습은 의미를 찾지 못하면서도 살아가는 보편적인 삶의 모습이기도 하다. 자신의 수확량에 따라 값이 매겨지는 상황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는 여성의 위치와 남성 동료에 의해 구술되는 유럽 여성의 작업량의 비교, 거기에 지지 않기 위해서 이를 악무는 여성의 모습 등에서 사회적 모순이 언뜻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