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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그랜트] <한 번 더 해피엔딩>
이화정 2015-04-07

휴 그랜트

<들어는 봤니? 모건부부>

마크 로렌스 감독은 휴 그랜트와 지속적으로 작업을 하는 유일한 감독이다. <투 윅스 노티스>(2002)를 시작으로 <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작곡>(2007), <들어는 봤니? 모건부부>(2009), 또 <한 번 더 해피엔딩>(2014)에 이르기까지 벌써 네 번째 작업에 이른다. 제아무리 성공적인 결과에도 특정 영화인과의 관계망에 좀체 연결고리를 형성하지 않는 휴 그랜트로서는 특이한 선택이다. 횟수는 이렇게 늘어가는데, 아쉽게도 이 협업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긴 힘들어 보인다. 잘라 말해 그는 배우 휴 그랜트의 최고치를 끌어내주는 감독이 아니다. 로맨틱 코미디의 기념비적 작품이자 휴 그랜트의 출세작인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1994)은 마이크 뉴웰 감독이 연출했고, 휴 그랜트를 대중적인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화신으로 굳건하게 만들어준 <노팅 힐>(1999)의 연출은 로저 미첼이었다. 바람기 다분한 뺀질미를 가지고도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로맨티스트 휴 그랜트 캐릭터의 방점을 찍은 <브리짓 존스의 일기>(2001)는 샤론 맥과이어의 연출이었으며, 단순히 그가 연애 문제에만 국한하지 않고 인간적인 고민을 하는 남자라는 획기적 이미지를 심어준 <어바웃 어 보이>(2002)는 크리스 웨이츠, 폴 웨이츠에 의해 탄생했다.

안타깝지만 이 쟁쟁한 리스트에 ‘명함을 들이밀기’에 마크 로렌스 감독의 작품은 좀 약하다. 그는 휴 그랜트의 획기적 면모를 끌어내는 대신, 일종의 ‘활용편’으로 보여주는 영리한 감독이다. 바람둥이 부동산 재벌이 돈 욕심 없는 환경문제 변호사를 만나 충돌하고 대립하다, 그 싸움이 사랑싸움으로 번져 결국 진정한 사랑을 찾아간다는 <투 윅스 노티스>는 휴 그랜트가 아니었다면, 식상하고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로 남을 뻔했다(솔직히 식상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 경우의 휴 그랜트 역시 그의 최고작에서 보여준 ‘멋짐’을 잃지는 않는데, 관객으로서 그 매력에 빠져들지 않을 재간이 없다. 애써 연기하지 않으면서도 시들어가는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 흠뻑 물을 주고 생기를 더하는, ‘역시 휴 그랜트지’ 싶어지는 순간이다. 재기를 노리는 왕년의 팝스타가 수다쟁이 작사가 아가씨를 만나 사랑도 찾고 지지부진한 상황의 돌파구를 만들어내는 <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작곡>에서나, 별거 중인 변호사 폴 모건이 외딴집에서 아내와 지내면서 잊었던 사랑을 되찾아가는 <들어는 봤니? 모건부부>에서는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 조금씩 나이 들어가는 휴 그랜트의 인간적 면모를 더해간 익숙한 시도다. 이미 <노팅 힐>이나 <어바웃 어 보이>, <러브 액츄얼리>(2003)에서 그가 로맨틱 코미디물의 완벽한 왕자가 아닌 인간적 면모도 지녔다는 걸 각인시켜두었으니, 이 경우의 휴 그랜트의 이미지도 무리 없이 ‘덤’으로 연결되는 정도다.

휴 그랜트가 그사이 워쇼스키 감독과 <클라우드 아틀라스>(2012)에서 못 알아볼 분장을 한 채 악당으로 등장한 건 획기적인 시도였으나, 아쉽게도 바람결 같은 파장밖에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마크 로렌스 감독은 그새 지치지도 않고 또 한번 휴 그랜트가 연기한 캐릭터를 ‘한번 더’ 활용할 방안을 강구해낸다. <한 번 더 해피엔딩>의 주인공 ‘키스’는 한때 <잃어버린 낙원>이라는 작품으로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성공한 시나리오작가다. 하지만 15년이 지난 현재는 이후 한편의 히트작도 생산하지 못한, 이젠 자존심밖에 남지 않은 실패한 남자다. 영화가 시작한 지 채 얼마 되지 않아 키스의 집이 체납 때문에 단전되는 순간, 우린 그가 처한 상황의 심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순간이야말로 마크 로렌스 감독이 휴 그랜트라는 카드를 꺼내들었다는 걸 떠올릴 차례다. 키스가 처한 상황이 제아무리 난처할지라도, 휴 그랜트에겐 그걸 상쇄시킬 냉소와 유머와 로맨틱함이 장착되어 있다.

어떤 배우는 등장만으로 영화의 장르를 규정한다. 이 말을 휴 그랜트에게 적용해본다면 99% 정도는 맞다고 본다. 그는 어떤 상황도 멜로로 치환할 수 있는 로코의 본능을 장착한 배우다. 휴 그랜트가 있어서 로코 장르가 기획된 건지, 로코 장르에 유독 휴 그랜트가 딱 맞았던 건지 정답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이 분야에서 휴 그랜트의 가치는 독보적이다. 그리하여 <한 번 더 해피엔딩>의 기본 베이스는 여전히 휴 그랜트의 특기를 활용한 로맨틱 코미디다. 키스는 순전히 경제적 위기에서 탈출하고자 지방 대학의 시나리오 쓰기 강좌를 맡아 교수로 오게 되는데, 내려온 그날 그 대학의 여학생과 교칙에 어긋난 연애 행각을 벌이기 시작한다. 수강생을 외모순으로 선발해 경고를 받고, 수업은 시간 때우기로 설렁설렁하는 것이 영락없이 ‘휴 그랜트적인 상황’이다. 그의 수강생이자 싱글맘인 홀리(마리사 토메이)는 반대로 어린 딸들을 건사하며, 레스토랑, 구내매점 아르바이트로 바삐 뛰어다니며 학업을 하는 열정적인 여성이다. 일찍 성공하고 더이상 글을 못 써 좌절한 키스에게, 대기만성을 꿈꾸는 여자가 벌이는 제법 익숙한 티격태격.

하지만 영국 귀족식 악센트라고 우리가 알고 있는 휴 그랜트의 발음을 들으며 무작정 설레던 시절은 마법이 풀리듯 지나갔다. 그리하여 달달한 연애 장면보다 <한 번 더 해피엔딩>에서 와닿는 부분은 키스가 제작자들로부터 거듭 시나리오를 거절당하는 순간의 씁쓸함이다. 할리우드가 원하는 건 보다 자극적인 장치이고, 그는 15년 전과 지금의 영화 환경이 달라졌다는 걸 매번 절감하는, 시대를 거쳐간 쓸쓸함을 연기한다. 이 지점과 관련해 영화에는 잠깐 눈을 의심하게 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영화 속 지금은 별 볼일 없는 작가 키스로 분한 휴 그랜트가 바라보는 화면에 젊은 휴 그랜트가 있다. 아카데미 시상식, 수상 트로피를 들고 “이렇게 흉한 트로피를 좋아하게 될 줄이야”라고 너스레를 떠는 특유의 말투, 웃음을 지을 때 잔뜩 애교 주름이 지는 얼굴은 대역이나 컴퓨터그래픽으로 살려내기 힘든 거부할 수 없는 그의 모습이다. 이 장면은 그가 1995년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으로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을 받을 당시 녹화된 실제 수상 장면인데, 그때 휴 그랜트의 나이가 불과 35살이었다. 54살의 진짜 나이 든 주름을 장착한 휴 그랜트는 화면 속 전성기 때의 파릇한 자신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은 워킹타이틀의 성격을 규정하게 만든 기념비적 영화로, 주인공인 휴 그랜트를 로맨틱 코미디의 제왕으로 격상시킨 작품이기도 했다. 이후 늘 로맨틱 코미디에 관한 질문을 받을 때면 그는 “왜 이렇게 많은 로맨틱 코미디가 만들어지는지 모르겠다”, “로맨틱 코미디는 내가 끌리는 장르가 아니다”와 같은 냉소적인 말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동시에 로맨틱 코미디 덕분에 얻게 된 혜택을 잊지는 않았다.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을 하기 전에는 배우라는 직업, 내 일에 대한 태도가 썩 좋질 않았다. 20대부터 저예산 독립영화도 무조건 하던 고군분투의 시절, 매일 밤 여배우들과 술 마시고 인생을 그저 탕진하기만 했다. 이 작품을 거치고 나자 더 좋은 역할들이 내게 들어왔다. 이후에는 한번도 돈 걱정하지 않고 작품을 선택하고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덧 세월은 속절없이 흘렀다. 블록버스터가 각광받는 지금의 시대, 제아무리 휴 그랜트라고 할지라도 로맨틱 코미디의 제왕으로 군림하던 시절의 좋은 선택은 불가능해졌다. 그 역시 시장경제 원리에 따라 그가 가장 돋보일 수 있는 로맨틱 코미디 장르가 사라진 걸 절감하는 배우다. 로맨틱 코미디 장르는 너무 작은 시장이고, 또 너무 소소하고 화려하지 않은 볼거리로 전락해버렸다. “사람들이 그러더라. 배우들이 등장해서 서로 대화하는 이런 유의 영화는 더이상 만들어지는 시대가 아니라고. 제작사는 화려한 속편을 만드는 데만 급급해 있다. 정말 슬픈 일이다.”

사실 지난 몇년간 휴 그랜트는 영화와는 다소 거리를 둔 생활을 해왔다. 언제나 최고로 그를 대접해주는 쇼비즈니스계를 떠나 그는 영국에서 정치적인 캠페인 활동을 하며 정치인, 변호인 같은 다른 직업군의 사람과 관계를 맺었다. 어떤 연결 끈도 없는 그 세계가 오히려 그는 편했다고 말한다. “난 같은 업계의 사람들과 생활하는 걸 피한다. 그래서 배우 친구가 없다. 완전히 다른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생활하는 걸 좋아한다.” 다시 마크 로렌스 감독과 작업을 하는 것도 어떤 끈끈한 애착과 의도가 보이지는 않는데, 역시 그게 휴 그랜트적인 작업 스타일인 것 같다. “그의 시나리오가 좋다. 항상 보면 나를 웃게 만드는 사람이다. 사람들에 대한 이상한 방식의 긍정적 마인드가 있는데, 그건 내가 사람들을 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의 태도다. 세트에서 촬영할 때면 죽이 참 잘 맞는다. 세트에 앉아서 영화 생각도 하지만, 우크라이나와 IS와 죽음에 대해서 서로 걱정을 나눈다. 이런 격 없는 관계가 지속적으로 그와 작업을 하게 만든다.” 물 흐르듯, 그는 또 한번 더 로맨틱 코미디 영화 안에서, 나이 들어가는 모습과 지금의 상태를 풀어놓는다. <한 번 더 해피엔딩>은 휴 그랜트의 대표작이 될 수 없지만, 서서히 변모해가는 그의 지금을 가장 잘 설명해줄 작품이다.

<투 윅스 노티스>

Magic hour

철없는 왕자님의 각성

휴 그랜트의 ‘순간’을 고르는 건 부질없는 짓이다. 그는 늘 여성들의 마음을 뒤흔들 준비가 되어 있는, 로맨틱 코미디 장르, 그 자체의 남자다. 현실의 섹스 스캔들이 연신 타블로이드를 장식하건 말건 물과 기름처럼 그걸 분리해 관객을 납득시킬 수 있는 유일한 남자. 돈 많은 부동산 재벌에, 바람둥이 기질이 다분하며, 제 손으로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는 철없는 왕자님이라 여성들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조지 웨이드는 글로 풀어보면 뭐 별거 없어 보이지만, 휴 그랜트의 말과 미소를 입는 순간, 세상에 둘도 없는 ‘조지 웨이드’가 된다. <투 윅스 노티스>에서 환경문제 전문변호사 루시(샌드라 불럭)를 부단히도 괴롭히던 그는, 그 괴롭힘이 결국 사랑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조지가 유일한 친구인 토니에게 속내를 털어놓는 장면에서 친구는 벽에 불과할 뿐, 조지는 자신과 대화하고 자신의 마음을 확인한다. 상투적이지만 더없이 감동적인 장면이다. 이 경우, 마크 로렌스 감독보다 휴 그랜트의 로코 재능 코드를 백배 활용한 건 이 영화의 제작자이자 직접 휴 그랜트의 상대역으로 등장한 샌드라 불럭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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