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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명현] 중간은 없다
이주현 사진 백종헌 2015-04-08

KT&G 상상마당 영화사업팀 나와 1인 에이전시 준비 중인 진명현

“상상마당의 꿈돌이”였던 진명현 KT&G 상상마당 영화사업팀 팀장이 “애정이 컸던 꽃밭”을 떠난다. “월급쟁이로 10년을 살면 그 뒤 10년도 월급쟁이로밖에 못 살 것 같아서” 독립을 결심했다. 강진아 감독의 <환상속의 그대>(2013), 이유빈 감독의 <셔틀콕>(2013), 김경묵 감독의 <이것이 우리의 끝이다>(2014), 우문기 감독의 <족구왕>(2014) 등 젊은 감독들의 젊은 영화를 주로 배급•마케팅하며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승부해온 그가 이번에 새로이 준비하는 일은 독립영화 감독 및 배우들을 지원하는 1인 에이전시. 독립영화에 대한 애정을 연료 삼아 또 다른 ‘재미’를 찾아나서려 하는 진명현 팀장을 만났다.

-공식 퇴사일은 언제인가.

=4월20일. 출근은 3월31일까지 하는데, 그동안 쓰지 않은 연차를 붙이니 퇴사일이 늦어졌다.

-사표 내던 날 기분은 어땠나.

=처음 영화 일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이 주르륵 지나가더라. 기분이 이상해서 그날 페이스북에 ‘상상마당을 떠납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라고 글을 올렸는데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요’를 누를 줄 몰랐다.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했고, 백두대간 기획실과 매니지먼트사인 키이스트를 거쳐 KT&G 상상마당에 정착한 이력도 재미나다.

=대학에서 제품디자인을 전공했다. 무대디자인을 하고 싶었는데 서울시립대에 수석으로 입학하면서 집안 분위기상 무조건 거기 가야 하는 분위기였다. 제품디자인과에는 대부분 자동차를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들어온다. 반면 나는 수학적 사고가 제로인 사람이다. 대학원에서 미학을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에 백두대간에서 직원을 채용한다는 공고를 봤다. 영화미술아카데미도 다니고, <맥스무비> 객원기자도 하고, 씨네큐브는 수시로 들락거리면서 대학 생활을 보낸 터라 영화는 늘 가까이 있었다. 그렇게 아트하우스 모모의 개관 멤버가 됐는데, 회사가 풍랑을 맞으면서 나 역시 회사를 떠나게 됐다. 외국 예술영화 수입 일을 하다 보니 한국영화를 하고픈 마음이 컸고, 한국영화를 하려면 배우들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키이스트 홍보실에 들어가 1년 정도 일했다. 배용준의 도쿄돔 공연도 쫓아다니고, 한국에 온 일본 아주머니들도 인솔하고. (웃음) 매니지먼트는 결국 가게무샤 같은 거더라.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결국은 배우가 잘한 게 돼버리니까 성취감을 느낄 수 없었다. 그즈음 상상마당 배주연 프로그래머가 그만두면서 프로그래머 자리 제안을 받았다. 그렇게 2010년 10월에 상상마당에 입사했다.

-입사 6년째에 퇴사를 결심한 이유는 뭔가.

=상상마당이 영화사가 아니다 보니 장기적인 비전과 계획을 세워서 일하기가 힘든 구조의 회사다. 또 이러다간 상상마당의 꿈돌이로 계속 살아야 하는 게 아닌가 싶더라. 영화 일은 길게 하고 싶지만 이쯤에서 멈추는 타이밍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2013년부터 영화사업팀 팀장직을 맡았는데, 팀장이 되고서 목표했던 바는 무엇이었나.

=전에는 상상마당에 해외사업부가 있었다. <우먼 인 블랙> 같은 중급 규모의 상업영화도 수입했는데 사업이 잘되지 않아 팀이 해산됐다. 나는 어찌 버텼고, 팀장이 됐다. 회사에선 한국 독립영화 배급을 하고 싶어 했다. 배급과 마케팅 담당자를 새로 뽑아서 2013년 5월 <환상속의 그대>를 시작으로 <러시안 소설>(2012), <경복>(2012), <마이 플레이스>(2013), <셔틀콕>, <이것이 우리의 끝이다>, <족구왕>, <꿈보다 해몽>(2014)까지 4인 체제(극장/배급/마케팅/팀장 체제)로 배급•마케팅을 진행했다. 독립영화의 후반작업부터 개봉까지 지원하는 지금의 일원화 체제도 만들었다. ‘대단한 단편 프로젝트’를 통해 지원한 첫 영화가 <마이 플레이스>, 두 번째 영화가 <반짝이는 박수소리>(4월23일 개봉)다.

-배급 작품을 결정할 때 영화사업팀 4명이 만장일치로 동의하는 영화만 배급한다고 들었다. 1명이 끝까지 반대해서 배급하지 못한 경우도 있나.

=찬성이 3, 반대가 1일 땐 한명을 설득하는 작업에 들어간다. <족구왕>이 그런 경우였다. 개인적으로는 안선경 감독의 <파스카>가 정말 좋았다. 워낙 호불호가 갈리는 영화라 세명이 극구 반대해서 배급하지 못했다. 배급 라인업을 꾸릴 때 잡은 컨셉은 너무 독립영화 같지 않은 독립영화, 스타일링이 가능한 독립영화였다.

-한국독립영화협회가 선정하는 ‘2014 올해의 독립영화인’에 상상마당 배급마케팅팀이 이름을 올렸다. 그때 참 뿌듯했을 것 같다.

=<족구왕>의 흥행보다 더 좋았다. 무엇보다 팀으로 이름을 올려줬다는 사실이 기뻤다. 독립영화를 배급하던 초반엔 우리를 보는 곱지 않은 시선이 있었다. 대기업 직원이 아닌데 대기업 직원이라 생각하는 분도 있었고, ‘극장도 있으면서 배급이 어려워?’ 하는 시선도 있었다. 지난해, 상상마당 영화사업팀이 만들어진 이래로 처음 수익이 났지만 우리는 보너스도, 성과금도, 한푼도 못 받았다. 우리는 배급사와 제작사의 수익배분 구조가 2:8로 되어 있다. 감독 및 제작사가 8을 갖는 구조다. 보통은 6:4나 5:5로 나누는데, 우리는 회사에 손해만 안 끼치면 되니까 수익을 크게 가져가지 않아도 된다. 그런 마음으로 일을 했고 지난해 연말에 상까지 받아 기분이 무척 좋았다.

-함께 일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아이디어가 무궁무진한 사람이라는 거다.

=어릴 때부터 TV 보는 걸 좋아했다. 드라마, 영화는 가리지 않고 많이 보는 편이다. 온갖 걸 다 좋아한다. 책, 영화, 드라마, 화장품, 신발, 여행, 커피…. 매일매일 좋아하는 게 생긴다. 그런데 나는 창작자가 아니다. 창작자들이 만든 것을 크리에이티브하게 스타일링하는 사람이다. 어떻게 꾸미면 예쁠까, 어떻게 조합하면 달라 보일까, 그런 궁금증을 늘 달고 산다. 회의 때 내내 떠든다. 심지어 이젠 동료들이 내 말을 받아 적지도 않는다.

-시각적인 것에 예민한 편인가. 촌스럽고 세련되지 못한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관객이 독립영화에 대해 가지는 편견들이 있잖나. 독립영화는 독하고, 무섭고, 거칠고, 가난해 보인다는 편견. ‘이 영화를 봐야 합니다’, ‘이 영화를 봐주세요’ 식의 마케팅도 문제다. 마케팅 비용이 많지 않다면, 포스터 한장 만들어야 한다면, 그 포스터만큼은 상업영화와 비교했을 때 퀄리티가 떨어져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 정점이 <셔틀콕>이었다. ‘너를 향한 마음의 포물선’ , ‘혼자선 연습도 못하는 첫사랑’이라는 태그라인과 카피 잡는 것부터 신경을 많이 썼다. <셔틀콕> 포스터는 사랑도 많이 받았고 욕도 많이 먹었다. 2NE1 신곡인데 러블리즈 노래처럼 포장했다고. (웃음)

-자신이 하는 일도 즐겁고, 그걸 보는 사람들도 즐거운 일을 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일한다고.

=예전엔 재미가 있어야만 움직였다. 요즘은, 재미는 여러 부분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나이가 들어서일 수도, 경력이 쌓여서일 수도 있는데 어느 틈에 내가 이 판에서 더이상 애가 아니더라.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 그 일을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재미와 대의가 혼재된 상황이다.

-독립영화를 둘러싼 최근의 환경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을 것 같은데.

=근래, CGV아트하우스에서 배급한 작품 외에 <족구왕>만큼의 스코어를 낸 독립영화가 없다. 시장의 기폭제가 된 독립영화들은 전부 아트하우스에서 배급한 영화들이다. 그런데 지금의 몸집이 맞는 건지 모르겠다. 아트하우스는 이제 ‘갓(God)트하우스’가 돼버렸다. <한공주>에 이어 올해 <소셜포비아>까지 이어지는 흐름을 보면서 에이스가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는 시장이 되었구나 싶더라. 예를 들면 이런 느낌이다. 독립영화라는 반이 있는데 모두 얇은 코트를 입고 있다. 그런데 누군가가 저 혼자 몽클레어 패딩을 입고선 ‘이것도 같은 옷이야’라고 말하는 느낌? 그걸 누가 몰라? (웃음)

-상상마당을 나와 새로 차리는 회사의 이름은 ‘무브먼트’로 정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계획하고 있나.

=독립영화 배우 및 감독 에이전시를 차리려 한다. 감독들에겐 투자•배급•마케팅 과정을 축약해서 옆에서 일 봐주는 비서 개념으로 붙고, 배우들에겐 스타일링 및 개별 브랜드 홍보에 치중한 에이전시 역할에 충실하려 한다. 좋은 배우들이 본인의 개성과 매력을 잃어가는 경우를 많이 봤다. 회사에서 붙여주는 스타일리스트,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에 갇혀 자기가 뭘 봐야 할지 모르는 상태로 멍해지고, 자꾸만 차로 데려다주니까 겉멋만 들고. 배우가 스스로 오롯이 빛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하고 싶다. 무브먼트라는 이름은 모든 부분이 완벽하게 합이 맞아야 1초라도 움직일 수 있다는 뜻으로 지은 거다. 그런데 이게 수익 구조를 만들기 어려운 일이다. 먹고살기는 해야 할 것 같아서 이것저것 준비를 하고 있는데, 우선 5월부터 <파스카>의 배급•마케팅 준비를 시작할 계획이다. <파스카>는 산달을 넘겨 낳는 아이 같은 느낌이라, 가장 좋은 모습으로 관객에게 보여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독립영화가 작은 영화라는 것도 편견이고 선입견일 수 있는데, 어떤 면에선 굳이 배급 타이밍을 잡고 영화관 수를 최대한 늘려서 가는 게 꼭 좋은 배급•마케팅인가 싶다. 배급 타이밍에 상관없이 5개관 정도의 소규모로 개봉해, 이 영화에 가장 잘 어울리는 관객에게 보여주면 되지 않을까.

-수익 구조에 대한 고민은 계속되겠다.

=진명현이라는 개인이 할 수 있는 일도 늘려야 할 것 같다. 찔끔찔끔 쓰던 외고나 라디오 방송도 청탁이 오면 거절하지 않고 다 해야겠지. 개인의 브랜딩과 회사의 브랜딩을 함께 키워가려 한다. 신뢰를 주는 개인이 되는 게 혼자서 새로 일을 시작할 때 중요한 것 같다.

-진명현이라는 브랜드, 무브먼트라는 브랜드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추어졌으면 좋겠나.

=<서바이벌 오디션 K팝스타>로 치면 안테나뮤직 같은 거. YG, JYP에 비하면 규모도 작고 돈도 없는 회사지만 안테나뮤직을 지지하는 확고한 팬덤이 존재하고, 그들 옆에 있어도 존재감이 떨어지지 않는다. 유희열을 보면서 어떻게 저렇게 상업 무대의 꼭대기까지 올라가서도 자신의 톤을 잃지 않을 수 있나 싶다.

-1인 회사를 고집하는 이유는 뭔가.

=누구한테 민폐 끼치고 싶지 않다. 작품의 준비 기간을 길게 잡으면 손이 많이 필요할 것 같지도 않다. 최지웅 포스터 디자이너, 표기식 포토그래퍼 등 좋은 동료들과도 계속 협업할 수 있을 테고. 배우 이영진도 처음엔 배우로 만났지만 지금은 친구가 됐는데, 일하면서 만난 좋은 사람들과 함께 대형 매니지먼트사 혹은 대형 영화사로부터 독립영화의 오롯한 예쁨을 지키기 위해 결계를 치는 작업을 하고 싶다.

-상업영화는 해보고 싶은 생각이 없나.

=‘큰 영화’라는 말이 안 와닿는다. ‘큰 영화가 뭐지? 큰 얼굴 같은 건가?’ 이런 느낌. (웃음) 영화 일을 하는 사람들이 ‘큰 영화 하고 싶다, 큰 회사 가고 싶다’고 말하는데, 천만영화 하면 큰 사람이 되나? 다들 크기에 너무 집착한다. 일하는 동안 그런 반감이 차곡차곡 쌓여서 독립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된 걸 수도 있다.

-무브먼트는 언제쯤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 예정인가.

=4월 한달은 놀 생각이다. 요즘 매일 새벽마다 땡처리 항공권 풀리는 걸 보고 있다. 앞으로 이렇게 쉴 수 있는 시간이 또 언제 올까 싶어서 가보지 않은 나라 중에 가성비가 훌륭한 나라의 항공권을 끊으려고 한다. 어제는 60만원대에 나온 뉴욕 항공권을 찜해뒀다. 2주간 해외여행을 다녀온 뒤엔 2주간 국내여행을 할 생각이다. 5월부터는 <파스카>에 돌입할 거고.

-장기적인 계획이나 목표는 뭔가.

=곱게 늙는 거. 주름살은 늘 수 있으나 군살은 늘지 않아야 하고, 근심거리는 늘겠지만 빚은 늘지 않아야 한다. 누구한테 잔소리는 할 수 있겠지만 욕은 덜 먹어야 하지 않겠나.

지난해 여름 개봉한 <군도: 민란의 시대> <명량> <해적: 바다로 간 산적> <해무>와 함께 <족구왕>은 “5대 블록버스터”로서 어깨를 나란히 했다. 물론 “5대 블록버스터”라는 건 진명현 팀장 및 상상마당 팀원들의 재기 넘치는 마케팅이었다. 당시 인터넷 영화 사이트엔 “이 영화 패기 보소, 돈 없이 영화하려면 이 정도 패기는 있어야지”라는 댓글이 달렸다. 진명현 팀장의 패기는 여전하다. “이름을 날릴 거면 확 날리고, 망할 거면 쫄딱 망하고.” 중간은 없다는 마음으로 진명현 팀장은 새로운 출발선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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