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만 35살의 오스카 아이삭은 지금 활동하는 남자배우 중 가장 내실 있는 필모그래피를 쌓고 있는 중이다. 물론 시작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일찌감치 <체 1부: 아르헨티나>(감독 스티븐 소더버그), <바디 오브 라이즈>와 <로빈 후드>(감독 리들리 스콧), <본 레거시>(감독 토니 길로이) 등에 비중 있는 조연으로 출연하기는 했지만 아쉽게도 배우로서의 존재감이 크게 드러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2013년에 출연한 <인사이드 르윈>(감독 코언 형제)부터 사정은 변했다. 여린 듯 까칠해 보이는, 그래서 응원을 하고 싶다가도 어느 순간 다시 거리를 두게 만드는 독특한 뉘앙스의 연기에 오스카 아이삭의 이름은 자연스레 알려지기 시작했고, 그 후 그는 마치 오랫동안 계획을 세워온 사람처럼 드라마를 앞장서 이끌어가는 흥미로운 캐릭터들을 잇따라 선보였다.
먼저 <인사이드 르윈> 이후 에밀 졸라의 원작을 영화화한 <테레즈 라캥>(감독 찰리 스트레이턴, 2013)이 개봉했다. <인사이드 르윈>을 보고 이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영화가 끝날 때까지 오스카 아이삭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수도 있다. 수염을 깨끗하게 면도하고 깔끔한 정장을 입은 까닭도 있지만 과감하게 유부녀를 몸으로 유혹하는 모습과 예민한 예술가 사이의 이미지 차이가 너무 컸던 것이다. 그리고 오스카 아이삭은 여기서 더 나아갔다. <1월의 두 얼굴>(감독 후세인 아미니, 2013)에서는 사기꾼 기질에 파더 콤플렉스를 가진 20대 청년을, <엑스 마키나>(감독 알렉스 갈랜드, 2015)에서는 광기에 사로잡혀 로봇과 사는 천재 과학자를, 그러고는 다시 <모스트 바이어런트>(감독 J. C. 챈더, 2015)에서는 말끔한 양복으로 갈아입고 수완 좋은 사업가를 연기한 것이다.
이 다섯편의 영화를 놓고 볼 때 놀라운 것은 외모만 바꾸었을 뿐인데도(주로 머리 모양과 수염) 오스카 아이삭이 전부 다른 배우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소위 메소드 연기를 한다고 알려진 배우들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자신의 고유한 이미지를 변주한다면서 오히려 자신의 원래 존재감을 더 도드라지게 만드는 역설적인 상황과는 구분된다. 오스카 아이삭이 가진 무기 중 하나는 그의 이름을 들었을 때 즉각 떠오르는 고정된 이미지가 없다는 점이다. 그는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영화마다 완전히 새로운 인물상을 선보였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인사이드 르윈> 이후 우리가 만난 다섯편의 영화에서 그는 마치 다섯편의 각기 다른 데뷔작을 찍은 신인배우처럼 보인다.
자신으로부터 다양한 모습을 끄집어낼 수 있는 그의 특징, 혹은 능력을 설명하려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오스카 아이삭의 가족 내력이다. 프랑스인 외할머니와 과테말라인 어머니, 그리고 쿠바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오스카 아이삭 에르난데스’는 특정한 인종적 특징으로 포착하기 힘든 이목구비를 부모로부터 물려받았으며 이는 그가 다양한 국적의 인물을 소화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즉, 그에게 국가나 인종적 특징은 별다른 장벽이 되지 않는다. <아고라>(감독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2009)에서 로마인을 연기한 그는 <바디 오브 라이즈>에서 이라크인을 연기했으며, <로빈 후드>에서는 잉글랜드 왕자를, <테레즈 라캥>에서는 프랑스인, <발리보>(감독 로버트 코널리, 2009)에서는 동티모르인을 각각 연기했다. 남미 출신의 미국인 사업가로 출연한 <모스트 바이어런트>에서 능숙한 스페인어 대사를 들려준 것은 물론이다. 이처럼 스테레오 타입의 캐스팅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벗어날 수 있는 것은 배우로서 가질 수 있는 큰 자산이며, 오스카 아이삭은 이를 적극 활용했다. 하지만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그는 단순히 ‘다국적 역할 전문 배우’로만 남았을 것이다.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정말 흥미로운 점은 단순히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는 능력이 아니라 자신이 맡은 배역의 복잡한 심리적 상태를 연기해내는 기술과 재능이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성격 유형에 숨어 있는 맥락의 다발을 읽어내면서 캐릭터의 내면을 미로로 만들어버린다. 다시 말해 그의 연기는 한 줄기 빛을 수십 가지 색깔로 분해하는 프리즘 같아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색을 어떤 한 가지 이름으로 부를 수 없게 한다. <인사이드 르윈> 이후 그의 출연작들이 하나같이 관객으로 하여금 등장인물의 심리를 적극적으로 해석하게 만들며 극적 긴장을 쌓아간다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그는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감독들이 다층적 내면을 지닌 남성상을 그리려 할 때 떠올리는 배우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오스카 아이삭의 최근 연기를 확인할 수 있는 <모스트 바이어런트>를 보자. 이 영화의 주인공인 아벨은 선과 악을 쉽게 구분하기 힘든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옳은 길’을 걷고 있다고 진심으로 믿으며, 또한 실제로 나쁜 선택 앞에서 단호히 발걸음을 돌리기도 한다. 그러나 관객은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음을 알고 있다. 그는 부패의 공범이고, 사실상 폭력의 가장 큰 수혜자이며, 결정적인 순간 부조리한 현실에 눈을 돌려버리는 인물이다. 그리고 오스카 아이삭은 이 복잡한 드라마와 감정의 스펙트럼, 나아가 도덕적 애매함까지 한꺼번에 밀도 높게 압축시켜 하나의 표정으로 보여준다. 이때 그 표정에 어떤 독점적인 해석은 존재하지 않는다. 많은 배우들 중에는 단호한 해석과 그에 바탕한 연기로 극에 방점을 찍는 이들도 있지만 적어도 지금의 오스카 아이삭은 그 해석의 지점을 의도적으로 지워버리는 배우다. 이를테면 죽음을 마주한 부하 직원 앞에서 보이는 표정과 위협적인 검사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그의 눈빛은 어떤 성격의 것일까. 오스카 아이삭이 연기하는 아벨에게서 한 가지 정답을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리고 이것이 그가 자신이 맡은 캐릭터에 ‘다양성’을 부여하는 방식이다.
그는 <모스트 바이어런트> 개봉 당시 가진 한 인터뷰에서 시나리오상의 인물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대한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한 적이 있다. “내가 캐릭터에 대해 내린 해석과 설정은 모두에게 동의받아야 할 필요가 없어요. 그건 이야기상의 문제가 아니라 캐릭터의 감정적 역사에 대한 문제거든요. 그리고 그 캐릭터가 작가나 감독의 것이라고도 절대 생각하지 않아요. 영화 속의 모든 캐릭터는 연기하는 사람의 연장선 위에 놓여 있어요. 일단 배우를 데려오는 순간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일들이 일어나죠. 왜냐하면 배우는 자신의 개성을 가져오고, 또 가져와야만 하기 때문이죠.”
이 자신감 넘치는 대답에서 오스카 아이삭의 연기관을 살짝 엿볼 수 있다. 그는 개인으로서의 오스카 아이삭과 시나리오상의 가상 인물을 억지로 분리하지 않는다. <테레즈 라캥>에 대한 인터뷰에서 “나는 인물을 분석하기보다는 직감적으로 연기하려 했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연기를 할 때 시나리오에서 정해진 답을 찾으려 하기보다는 자기 안에서 여러 가지 답안을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배우에 가까우며 언제나 해석의 여지를 일정 정도 남겨둔다. 그리고 바로 그때 오스카 아이삭의 인물에 현실적인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고, 관객은 이에 설득된다. 앞으로 출연을 앞두고 있는 <엑스맨: 아포칼립스>와 <스타워즈> 시리즈의 신작이 몹시 기대되는 것도 그가 지금까지 출연한 영화와는 완전히 다른 색깔의 작품에서 자신의 고유한 스타일을 밀어붙일 수 있을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그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보여줄 또 다른 다양함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Magic hour
로봇과의 커플 댄스
<엑스 마키나>에서 오스카 아이삭이 연기한 네이든은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인물은 아니다. 인간과의 접촉을 차단한 별장에 혼자 산다거나, 매일 밤을 엄청난 양의 술로 보내는 것, 또는 괴상한 패션 감각 역시 그렇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네이든의 ‘똘끼’를 보여주는 건 역시 로봇과의 커플 댄스 장면이다. 잔뜩 심각한 분위기에서 느닷없이 흥겨운 춤을 추는 것도 이상하지만 정말 이상한 것은 말로 설명하기도 어려운 방정맞은 동작이다. 그 춤을 바라보는 돔놀 글리슨의 ‘이게 뭐야!’ 하는 표정은 아마 연기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스카 아이삭은 전위적으로까지 보이는 안무를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하게 선보이며 <엑스 마키나>의 기괴함 지수를 급격히 상승시킨다. 배우로 활동하면서 가수 활동 역시 꾸준히 이어가고 있는 오스카 아이삭이니 좀더 기다리면 그의 흥겨운 춤동작을 다른 무대에서도 곧 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