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상속자들>이 끝난 지난해 1월, 2014년을 빛낼 신인배우로 강하늘을 처음 만났다. 그때만 해도 강하늘은 가능성의 배우였다. 그리고 1년 뒤. 그는 매일 무대에 오르고 있다. 한달에 한편꼴로 자신의 영화가 개봉하고 있다. 2014년을 그 누구보다도 바쁘게 보낸 강하늘과 다시 마주 앉았다. <상속자들> 이후 강하늘은 <소녀괴담> <엔젤 아이즈> <쎄시봉> <순수의 시대> <스물> <미생>을 차례로 찍었다. 작품과 작품 사이 쉴 틈도 없었다. 2015년의 시작은 연극과 함께였다. 1월9일부터 3월1일까지 두달 가까이 월요일을 빼곤 매일 무대에 섰다. 자신의 생일(2월21일)과 설 연휴까지 몽땅 연극에 바쳤다. “생일이요? 그냥 토요일이에요. 공연 두 타임 있는.” “설이 뭐예요? 3시 공연밖에 몰라요.” 능청스럽게 말한 뒤 크게 웃음을 터뜨리던 강하늘은 오히려 연극 <해롤드 앤 모드>가 자신에겐 “힐링이었다”고 했다. 지금 이 순간이 더없이 행복한 배우 강하늘. 그의 시간을 들여다보았다.
어제의 시간
<미생>의 장백기는 내일을 도모하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더 나은 미래를 담보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 대기업 입사 시험을 통과한 엘리트 신입사원 장백기는 그러니 정체된 상태를 견디지 못한다. 자신의 능력을 써먹으려 하지 않는 회사 선배와의 마찰은 불 보듯 뻔한 일. 기본이 되어 있지 않은데 자신이 고수인 줄 알고 날뛰던 장백기와 달리 강하늘은 자만을 모른다. 고집스럽게 단것보다 쓴것을 집어삼킨다. 자신의 연기를 단단하게 만드는 것은 달콤한 상찬이 아니라 약이 되는 쓴소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칭찬은 안 들어도 돼요. 그런데 못한다는 얘기는 절대 들으면 안돼요. 못한다는 얘기 안 들으려고 노력하며 살고 있어요. 그건 장백기와 닮은 구석이에요.” 무엇이든 배우려 한다는 점에서 강하늘은 장백기보다 장그래에 가깝다. 그가 좌우명으로 품고 사는 말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배우고 배워서 또 배우면 배우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미생>의 촬영이 끝나갈 즈음 연극 <해롤드 앤 모드>를 차기작으로 택한 것도 순전히 배우기 위함이었다. 어쩌면 더 쉽고 편한 선택지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두달을 꼬박 무대에 매여 있기로 결심했다. 순전히 그의 고집이었다. “반대, 많았죠. 다들 미쳤냐고 그랬어요. (웃음) 저는 딱 하나였어요. 공부. 시간 날 때 하는 게 아니라 시간을 내서 하는 게 공부잖아요. 공부가 필요한 시기라 생각했어요. 1~2년 내다보고 연기하는 거 아니잖아요. 더 멀리 보고, 더 멀리 가고 싶었어요.” 고민과 탐구의 시간이 넉넉히 주어지지 않는 드라마의 촬영 시스템은 “점점 나 자신이 비어져가는 느낌”이 들게 했고, “내실을 다져야겠다”는 생각을 품게 했다.
연극을 통해 소진된 힘을 채우려 한 건 “으쌰으쌰 다 같이 밀도를 쌓아나가는 연극”을 경험한 뒤부터 연기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중학생 때 일종의 호기심으로 교회 성극단 소품팀에 들어간 그는 연극이 끝난 뒤 커튼콜 인사를 하다 펑펑 눈물 쏟았던 일을 아직도 기억한다. “시원했던 건지, 섭섭했던 건지, 개운했던 건지” 눈물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후로 연극에 홀딱 마음을 빼앗겼다. 일반계 고등학교에 진학해 1년을 다니다 2학년 때 서울국악예고 연기과에 편입했고, 18살엔 뮤지컬 <천상시계> <카르페디엠>의 주연으로 무대에 올랐다. 남들보다 이른 데뷔는 책임지고 노력하는 자세를 몸에 배게 만들었다. 중책으로 인한 부담감에 한동안 무대공포증에도 시달렸고, 100kg이 넘었던 10대 중반엔 외모에 대한 스트레스도 심했다. 지금으로선 잘 상상이 되지 않는 그의 과거는, 욕먹지 않으려고, 욕먹고 울지 않으려고 쏟았던 노력의 시간들로 채워져 있다. 노력형 배우 강하늘의 탄생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오늘의 시간
<해롤드 앤 모드>의 해롤드는 극성맞은 어머니 앞에서 수시로 죽음을 시연하는 19살 소년이다. 80번째 생일을 앞둔 천진난만한 할머니 모드를 만나며 소년은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지 깨닫는다. 10년 동안 6번째 <해롤드 앤 모드>를 공연하고 있는 대선배 연극배우 박정자 옆에 선 강하늘은 잘해야겠다는 의욕이 돌출된 연기가 아니라 즐기고 호흡해야겠다는 마음이 드러난 연기를 선보인다. 클로즈업이 아닌 풀숏에서 강하늘은 자유로워 보였고, 진솔한 리액션은 관객의 마음을 움직였다. “연극을 하면 양보나 배려를 배워요. 지금은 이 사람의 대사가 중요하니까 기다려주고 반응해주는 거죠. 내가 여기서 튀려고 뭘 하는 대신에.” 연초부터 시작한 연극은 한달도 되지 않아 1만명의 관객을 불러모았다. ‘힘들게 왜 연극하냐’던 사람들에게 떳떳해질 이유도 생긴 셈이다. “남자는 말보다 행동이죠. (웃음) 행동으로 보이면 돼요.”
“매일매일 새로운 경험을 하려고 노력하기보다 하루하루가 다르다는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강하늘은 최근 2년간 새로운 캐릭터를 받아들이고 떠나보내는, 헤어짐에 익숙해지는 과정을 반복해서 경험 중이다. 그 결과 매번 다른 강하늘이 우리 앞에 나타났다. “작품에서 ‘내’가 돋보이는 게 싫어요.” <미생>에서 장백기의 꽉 막힌 성격과 보수적인 스타일을 표현해주었던 2 대 8 가르마와 안경도 강하늘의 선택이었다. “주변에선 다들 안경과 헤어스타일을 반대했어요. 예쁜 헤어스타일 하라며. 하지만 그건 강하늘한테 어울리는 거지 장백기한테 어울리는 게 아니거든요.” 강하늘은 “장백기가 강하늘이었어?”라는 말이 “최고의 찬사, 행복한 칭찬”이었다고 했다.
관객에게 보여진 건 <미생>이 먼저지만 촬영은 <쎄시봉> <순수의 시대> <스물>이 먼저였다. 세편의 영화에서도 강하늘은 사라지고 캐릭터가 오롯이 부각된다. ‘<쎄시봉>의 윤형주가 강하늘이었어?’, ‘<순수의 시대>의 욕정에 눈먼 진이 강하늘이었어?’, ‘<스물>의 공부만 잘하는 지질이 경재가 강하늘이었어?’ 싶게끔. 단순히 노래 잘하고 기타 잘 치는 것을 넘어 강하늘은 높은 음색의 목소리를 강조해 윤형주의 미성을 맛깔나게 재현했다. 말할 때의 목소리와 노래할 때의 목소리가 사뭇 달라 다른 사람이 대신 부른 것 아니냐는 오해를 살 정도였다. <순수의 시대>에선 빛과 어둠이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얼굴을 보여준다. 신분에서 비롯된 제약이 많아 출세에 대한 꿈도 꿀 수 없고 첩도 둘 수 없었던 왕의 사위 진은 “순수한 욕정”에 사로잡혀 순간의 쾌락에 집중한다. 그 쾌락은 간음으로 이어진다. 어수룩한 왕의 사위이거나 못난 아들이거나 나쁜 남편이거나 그저 불쌍한 인간이거나. 강하늘은 퇴폐적인 눈빛 하나로 그 순수한 욕정을 드러낸다. 열 마디 말보다, 대규모 액션 신보다 인상 깊은 순간을 만들어낸다. 강하늘의 ‘분량론’에 따르면 “분량을 생각하는 사람은 작은 그릇이 된다”. “출연 분량이 많으면 캐릭터를 표현할 여지가 많은 게 당연하죠. 그런데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게임이란 거예요. 주어진 분량 안에서 잘 표현하는 게 더 재밌지 않아요? 어려운 문제를 풀 때 느끼는 희열처럼.”
내일을 위한 시간
<스물>에선 “빙구 같은 웃음”을 한 보따리 풀어놓는다. 여자 밝히는 놈, 돈 벌어야 하는 놈, 잘하는 건 공부밖에 없는 놈 중에서 강하늘은 “연애 감정조차 글로 배운” 공부 잘하는 경재를 연기한다. <스물>의 이병헌 감독은 “웃는 모습이 예쁘고 밝은 배우를 캐스팅했으면” 싶었고 “첫 만남에서 대번에 ‘경재가 나한테 인사하네’ 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전했다. 강하늘은 잘 웃는다. 자주 웃고, 환하고 시원하게 웃는다. “만날 웃고 다니니까 사람들이 가식적인 웃음이라고 놀리기도 하는데(웃음) 대체 웃는 걸 왜 만들어 연습해요.” 연기 연습하기도 바쁜데, 라는 말이 생략됐을 것 같은 강하늘의 대답. 이병헌 감독 역시 강하늘의 노력을 빼먹지 않고 언급했다. “<스물>은 코미디 감각, 애드리브, 순발력을 필요로 하는 장르의 영화인데, 하늘이는 그런 것마저 노력으로 만들어내더라고요. 이런 식, 저런 식 다 따라올 수 있는 능력을 가졌어요.” 3월25일 개봉하는 <스물> 이후의 계획은 아직 세워두지 않았다. 윤동주 시인의 삶을 그리는 이준익 감독의 <동주>에서 윤동주 시인을 연기할 거란 얘기가 있지만, 아직은 그 어느 것도 확정된 상태가 아니다. 2년 가까이 일주일 이상 쉬어본 적 없어 긴 잠과 맛집 기행, 여행 같은 소박한 바람이라도 얼른 실현됐으면 하는 마음이 크다. “날씨 좋은 날 제주도 여행가서 스쿠터나 자동차를 렌트해서 타보고 싶어요. 꿈이에요. 진짜.”
변치 않는 바람도 있다. 1년 전 인터뷰 때 자신이 했던 이야기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던 강하늘은 2014년의 다짐과 똑같은 2015년의 다짐을 들려주었다. “제가 가진 신념, 생각, 고집이 흔들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꺾이고 싶지 않아요.” 고집스럽게 오늘을 사는 강하늘을 우리는 내일 또 만날 것이다. 내일 또 봅시다, 강하늘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