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 태조 이성계는 개국 한달 만에 세자를 책봉했다. 첫째 부인 한씨의 자식이자 조선 개국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이방원 대신 계비 강씨의 소생 중 가장 나이가 어린 방석이 간택됐다. 정도전을 비롯해 개국공신들 역시 이같은 세자 책봉에 동조했다. 왕이 되고 싶었던 이방원에게 정도전은 자신의 야망을 위협하는 존재였다. 정도전과 이방원의 갈등이 점점 심해지던 1398년 8월25일, 이방원은 자신의 사병을 동원해 정도전을 제거하고, 세자 방석을 살해했다. 이것이 제1차 왕자의 난이다.
<순수의 시대>는 왕자의 난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다. 정도전의 사위이자 왕의 사돈이자 전군 총사령관 김민재(신하균)와 그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기녀 가희(강한나) 그리고 김민재의 아들이자 왕의 사위 진(강하늘), 세명의 가상 인물이 이방원(장혁)과 정도전(이재용)의 권력 암투 한가운데에 던져진다. 개국 조선의 국경 지대를 호시탐탐 노리던 여진족을 토벌하고 개선한 장군 김민재. 이방원이 그의 공을 치하하는 축하연에서 김민재는 다른 장수로부터 능욕을 당할 위기에 처한 가희를 구한다. 가희는 김민재에게 마음을 주기로 하고, 목숨을 걸고 절개를 지켜 그의 사랑을 얻게된다. 물론 진짜 목적은 어린 시절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복수를 하기 위해 접근한 것. 하지만 김민재와 사랑에 빠지면서 가희는 사랑과 복수 사이에서 갈등한다.
등장인물이 많고, 그들의 사연이 얽히고설켜 있는 만큼 이야기가 출구 없는 미로만큼이나 복잡하다. 김민재와 가희의 위험한 사랑, 김민재를 앞세운 정도전과 이방원의 권력 암투, 사랑과 복수 사이에서 갈등하는 가희, 아버지 김민재에게 인정받지 못해 생긴 콤플렉스 때문에 여자를 탐하는데 골몰해 있는 진의 사연들이 깔끔하게 연결되지 않아 장황한 느낌이다. 그러다보니 등장인물들만 심각해지고, 그들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어느 인물에 마음을 둘지 몰라 갈팡질팡하다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긴장감이 와르르 무너진다. 적지 않은 비중인 데다가 서사를 연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섹스 신 또한 김이 빠진다. 각기 다른 역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섹스 신마다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신하균, 장혁, 강하늘, 강한나 등 배우들의 호연이 안쓰럽다.
영화는 개봉 당시 흥행과 비평 두 마리 토끼를 잡았던 스릴러영화 <블라인드>(2011)를 만든 안상훈 감독의 신작이다. 재기 넘치는 아이디어로 서스펜스를 구축한 감독의 신작이라기엔 실망스러운 결과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