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좋아하는 배우가 나와서 <쎄시봉>을 봤다. 송창식이 부른 유명한 노래, 스페인어가 원곡인 <사랑이야>(작사 한성숙)가 흘렀다. “당신은 누구시길래 이렇게 내 마음 깊은 거기에 찾아와 어느새 촛불 하나 이렇게 밝혀 놓으셨나요… 밤이면 밤마다 이렇게 타오를 수 있나요… 단 한번 눈길에 부서진 내 영혼….” 순간, 나는 “당신”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때부터 눈물과 소리내지 못한 콧물까지 범벅이 되어 화면이 보이지 않았다.
<사랑이야>에서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 삶을 ‘그 사건’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트라우마, 그것이 “당신”이다. 상실과 완전한 절망, 호소할 수 없는 통증, 좌절, 버려진 경험, 모욕과 차별.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그런 “당신”이 있을 것이다. 어젯밤까지 가장 믿었던 사람이 오늘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내 앞에 나타났을 때의 느낌은 배신감이라기보다 혼란이다. 현실을 인정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
이후 스스로 배신자가 되고,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을 포기하고, 그럭저럭 살거나 살아지지 않지만 살아낸다. 나는 30대 초반에 비슷한 일을 겪었는데, 그 뒤로 정말 저 가사처럼 살았다. 내가 겪는 일, 당신은 누구시길래?를 계속 물었다. 당신이 무엇이건대 그렇게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고 사라지지 않는가? 왜 촛불을 켜서 어둠 속의 나를 수치스럽게 밝히고 있나? 어떻게 그렇게까지 숨을 빼앗아가며 계속 타오를 수 있나? 단 한번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고 평생 내 영혼을 무너뜨릴 수 있나….
우리가 아는 촛불은 자신을 희생하면서 주위를 밝히는 존재다. 그러나 그것은 내 몸 밖에서 탈 때다. 몸 안에서 촛불이 탄다면? 꺼지지 않고 몸속의 산소를 잡아먹고 나를 말라비틀어지게 한다면? 그런 촛불은 부검할 때 Y자 절개를 해야만 꺼낼 수 있다. 몸 밖에서는 끌 수 없다. 고통은 그렇게 우리 몸 안에 있다.
이 노래의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고통이라는 생각이 들자, 그토록 노력했건만 벗어나지 못한 이유를 알았다. 어떤 책을 읽어도, 하염없이 걸어도, 누구를 만나도 해명되지 않았던 것은 고통이 있는 곳을 몰랐기 때문이다. 동시에 분노했고 허망했다. 사회는, 나는 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을까. 그 완강한 사고의 형틀.
고통은 몸의 일부여서 떼어낼 수 없다. 고통은 나 자신이기 때문에 쳐다볼 수 없다. 몸을 열지 않고 촛불을 꺼내는 방법은 몸을 변화시키는 방법밖에 없다. 변화는 가장 어려운 일이다. 투석(透析)으로 피를 교체하듯 몸 안의 산소를 빼내면 촛불은 꺼질 것이다. 그러면 “당신”도 사라지겠지만 나도 죽을 것이다. 내 마음 깊은 거기에 촛불을 켜고 들어앉은 당신. 잊을 수도 없앨 수도 없으니, 평생 씨름하고 신음하는 것이 인생일까. 내 몸에 “당신”이 있다고 해서 나를 미워하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