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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라는 이름의 60년대 폴란드

어둠의 역사를 향한 영혼의 순례, <이다>

“내가 누군지, 무슨 일을 하는지 아니?” 자신을 찾아온 조카 안나에게 이모는 묻는다. 안나는 자신의 뿌리를 되짚어가야만 한다. 이 물음은 <이다>를 관통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다>는 서원식을 앞둔 견습 수녀 안나가 이모 완다를 만나 자신을 억압하던 것들을 걷어내고 본래의 이름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스탠더드 화면비의 흑백 화면 속에는 수녀복, 팝송과 재즈 등 이질적인 요소들이 뒤엉켜 있다. 기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여정을 따르다 보면 1960년대 전후 폴란드 사회가 품고 있던 어둠이 보일 것이다.

보기 드물게 개봉하는 폴란드영화 <이다>(2013)는 극도로 조용한 흑백 영상으로 폴란드 사회가 안고 있던 어둠과 죄의식을 담아낸 작품이다. 19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에 유럽 영화계를 석권했던 전성기 폴란드파 영화의 흔적이 느껴지는, 아울러 그 시기의 폴란드 역사를 더듬어볼 수 있는 작품이다. 가령, 폴란드는 원래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이 전개된 곳이지만, 다른 한편 유대인 박해의 역사 또한 갖고 있었다. 2차대전의 종전, 나치의 집단 학살이 끝난 뒤 유대인들은 수용소에서 해방되었지만 그들이 원래의 땅으로 돌아오는 것에 위험을 느낀 일부 폴란드인들이 유대인을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1946년 7월 폴란드의 카일체에서는 유대인들이 폴란드 소년을 죽여서 종교의례에 사용했다는 거짓된 소문들이 퍼지면서 대학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학살은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이 전쟁 이후 유럽을 떠나도록 하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다>는 그런 어둠의 역사를 아주 은밀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영화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화면의 부자연스러움이다. 지금은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고풍스런 흑백 화면, 1.33:1의 스탠더드 화면비, 꽤 정적인 인물들의 부자연스런 연기(주인공 안나 역의 아가타 트셰부호프사카가 초연이기에 그렇다는 게 아니라, 반대로 그녀는 현실에서 부자연스런 인물을 가장 잘 소화하고 있다) 등이 그러하다. 영화는 가시성의 장치이지만 사각의 프레임으로 둘러싸인 시선의 한계, 카메라와 피사체 사이에 기록되는 시간, 구도의 중심을 불가피하게 갖는다. 프레임을 짜는 것은 공간의 배치에서 무엇을 포함하고 배제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이기에, 특정한 경계들, 한계들, 가장자리가 만들어진다. 사실 이러한 한계와 제한 없이는 화면의 구도가 만들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작가가 어떤 프레임을 선택하는가에 따라 어느 특정의 시점이 불가피하게 형성되어버린다. 그렇다고 영화가 내부만 지닌 가시성의 프레임에 갇혀 있지는 않다. 그랬다면 사진이나 회화의 모방, 혹은 텔레비전과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프레임 내부로의 유도와 외부의 소거는 대체로 텔레비전이 하는 방식이다. 반대로 영화는 바깥을, 주변을 끊임없이 내부로 끌어들여 세계를 확장한다.

첫 장면이 이를 예시한다. 1962년 겨울, 폴란드의 어느 수도원. 나이 어린 견습 수녀 안나가 복원된 예수 조각상에 채색을 하고 있다. 그녀는 수직으로 긴(수평으로 늘어진 최근의 화면들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길다는 의미다) 화면의 왼쪽 하단 끄트머리쯤에 위치한다. 나머지 화면의 1/4은 대체로 비어 있다. 이어지는 장면은 그녀가 잠시 붓질을 멈추고 예수상을 바라보는 순간으로 조각상과 안나가 화면의 중앙에 위치하는데, 꽤 부자연스런 연극적 구도처럼 보인다. 이어 반대의 각도에서 그녀가 조각상에 채색하는 순간은 화면의 왼쪽 하단에 둘이 위치하고 나머지 1/4은 비어 있다. 발의 클로즈업, 눈이 내리는 가운데 수녀원의 외부로 세명의 수녀가 예수상을 들고 정원으로 나가고 있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 또한 화면의 오른쪽 하단의 끄트머리쯤에서 아주 작게 그녀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 장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전후의 폴란드, 스탈린 사후, 고무우카 정권은 교회에 실용주의적인 태도를 보였고, 이 영화의 배경인 1962년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계기로 교회와 사회간의 관계가 새로이 혁신적으로 설정되던 때이다. 교회가 사회의식에 보다 관심을 갖던 갱신운동의 시기로, 수도원 바깥의 정원에 상을 세우는 것은 그러므로 꽤 상징적으로 표현된 시대상을 드러낸다. 작가는 여기에 다른 하나의 이야기를 덧댄다. 이어 우리는 원장 수녀가 고아인 견습 수녀 안나에게 수녀의 맹세를 하기 전에 유일한 육친인 완다 이모를 만나고 오라는 장면을 보게 된다. 그녀는 처음에 원치 않았지만 떠밀려 바깥, 즉 현실로의 여행을 떠난다.

역사의 가장자리에서

안나의 여행이란 관점에서 보자면 이 영화는 일종의 로드무비이다. 하지만 이 여행에서 중요한 것은 장소와 공간을 돌아다니는 탐색이 근원적으로는 내부와 외부의 접촉에 있다는 것이다. 이 테마는 흑백의 정적인 화면의 배치와 중심에서 비껴간 프레임 장치들을 통해 미학적 정당화를 얻는다. 대체로 인물들은 프레임의 좌우측 하단의 가장자리에 위치한다. 중심에서 벗어난 프레임으로, 이런 부자연스런 프레임은 화면이 스탠더드 사이즈일 때 손쉽게, 자연스럽게 발생할 수 있다(이 비슷한 사례가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이다. 그는 스탠더드 사이즈를 모럴의 문제로 여겼다). 이때 우리는 영화를 성립시키는 프레임이라는 장치가 얼마나 불안정하고 부자연스러운 것인가를 느끼게 된다. 프레임 바깥에 잘린 부분들이 몹시 신경 쓰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꽤 민감하게 프레임을 보게 되고, 무언가 부자연스럽게 숨겨진 것들, 혹은 스크린에 이미 한발을 걸쳐놓고 있었지만 이제 막 그 안으로 들어오려는 무언가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이 장치가 주제에 어울리는 이유는 수녀가 되려는 안나의 삶에 이미 한발을 들여놓고 있었지만 그녀가 몰랐던 일들, 과거 평범한 폴란드인들이 유대인에게 벌인 학살의 과거사들을 민감하게 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로드무비는 중심을 계속 변경하면서 주변을 넓혀가는 이야기와 역사를 보여주는 형식이다. 형식의 과잉이 도드라지는 작품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도리어 이 영화는 침묵과 풍경, 빛들만으로도 감정이 동하는 꽤 서정적인 영화다. 사실 이런 형식은 삶을, 역사를 표현하는 중요한 장치로 활용되고 있다. 1960년대 초, 마치 빙하기의 얼음이 녹아내리면서 숨겨진 것들이 조금씩 드러나던 때이다. 억압되었던 삶의 중심으로 주변에 있던 것들이 하나둘씩 들어오던 시기이다. 감독 파벨 파블리코프스키가 영화의 시대적 배경을 변경한 것도 그 때문이다. 원래 그는 1962년이 아니라 1968년 3월, 즉 폴란드에서 학생 시위가 발생해 혼란에 빠진 시기 당시 공산정권이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아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반유대적인 배척운동을 벌였던 시기를 배경으로 시나리오를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폴란드 정권은 약 1만5천명의 유대인을 강제로 추방했다. 하지만 지나친 정치적 내용들을 피하면서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해 이야기를 단순화하고 인물을 함축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시대적 배경을 1962년으로 변경했다고 한다. 이 변화로 영화는 독일, 구소련의 지배하에 있던 폴란드 역사의 비극, 폴란드인과 유대인과의 미묘한 관계가 전후 10여년의 폴란드 역사의 숨겨진 단면으로 꽤 은밀하게 드러난다. 감독은 이 시기가 폴란드인이 가장 재기발랄하게 산 시대였다고 말한다. 이 시대의 자유로움은 영화 내내 흐르는 팝송과 재즈 음악으로 표현되고 있다. 특히 존 콜트레인의 음악이 그러하다. 물론, 여전히 과거 어둠의 잔여가 있다. 이의 가장 아름다운 사례는 외양간 창문에 어울리지 않게, 하지만 치명적인 아름다움으로 남아 있는 안나의 어머니가 남긴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이다.

아직 중심에 들어서지 못한, 하지만 끊임없이 주변에서 중심으로 회귀해 들어오는 것은 처음에는 인물들의 숨겨진 내력이다. 안나를 처음 만난 이모의 첫 질문은 “내가 누군지, 무슨 일을 하는지 아니”라는 말이었다. 누구인가, 무슨 일을 했는가, 라는 물음은 영화의 주된 질문이다. 안나는 자신이 유대인이며, 부모님이 폴란드인의 손에 살해당해 숲속에 버려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는 정체성의 혼란을 느낀다. 안나의 수녀원 바깥으로의 여행은 갑작스런 운명, 숨겨진 과거, 혹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 역사의 시간과 만나는 탐험이다. 가시의 영역을 불안정하게 좁힌 이 영화의 불완전한 프레임이란 그러므로 그 가장자리, 절단의 바깥에서 무언지 모를 것들이 방문하도록 허용하는 장치이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부모님 묘소에 가보겠다는 안나의 말에 이모는 “시신도 못 찾고 있다. 그러다 신이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떻게 할래?”라 묻는다. 안나의 여정은 그러므로 상관적인 두 질문의 해답 찾기로 이어진다. 그 하나가 부모, 과거의 내력, 자신의 정체성 찾기라면 다른 하나는 그녀가 되돌아와야 할 신으로 열린 영혼의 탐구이다.

가장 멀리서 오는 지금 여기

프레임의 영역적인 경계를 해체하는 이러한 민감한 프레임(칼 드레이어의 <잔 다르크의 재판>에서와 같은 이런 식의 프레임을 파스칼 보니처는 데카드라주라 불렀다)은 구도의 중심성을 깨는 것만이 아니라 주체의 방향성을 상관적으로 잃게 한다. 인물을 프레임 바깥으로 기입되게 하고, 중심의 밖으로 놓는 것이 그 기능이다. 이때 프레임의 경계, 한계, 끝, 모서리는 그 모든 만남을 이루는 접촉의 장소가 된다. 안나의 여행은 그 모서리 바깥으로 나서는 탐색이며, 이때 수녀가 되려던 안나는 자기완결적, 자기충족적 단독자가 아닌 밖을 향해 열리는 존재가 된다. 안나의 ‘유대인 이다 되기’가 벌어지는 것이다. 이는 안나가 유대인 이다로 정체성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이다가 자신 내부로 침투되어 들어오는 것이다. 그때 그녀는 자신의 바깥에 있다. 그녀가 찾으려는 영혼 또한 수녀원의 내부가 아니라 바깥에 있게 된다. 영화가 후반부로 갈수록 우리는 안나/이다가 자기내면과 정체성을 외부와의 접촉으로 도달해가는 시도를 보이고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그녀는 수녀복을 벗고 드레스를 입고,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색소폰 연주자인 젊은 청년(같은 해 나온 폴란드영화 <라이프 필스 굿>에서 장애인 연기를 놀랍게 소화한 데이비드 가드너가 역시 훌륭한 연기를 보여준다)과 사랑을 나눈다. 이를 일탈로 읽어서는 안 된다.

감독은 안나의 이모 완다가 맹신적이고 냉소적인 공산주의자이자 페미니스트이며, 무신론자이자 공산주의 정권 시절에 정치적 여론조작재판에서 검사로서 악명이 높았던 인물이라 소개한다. 그런 완다는 창밖으로 몸을 던져 프레임의 바깥으로 사라진다. 안나/이다는 반대로 어디로 향하는지 확인되지 않는 곳을 향해 길을 걷는다. 바흐의 아름답고 슬픈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그녀가 길을 걸어가는 모습은 이전의 정적인 카메라와는 달리 흔들리는 카메라로 보이고, 프레임의 외부와 가장자리를 민감하게 두었던 영화가 이제는 온전히 내부의 움직임에 집중하고 있어 차이를 보인다. 이를 어떤 구속으로 읽어야 할지 아니면 자유로움으로 보아야 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기존의 테두리를 깨뜨리고 나가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내면의 영혼이 아니라, 몸의 바깥으로부터 그녀 자신에 접촉해 도달한 안나/이다의 또 다른 모험이 펼쳐지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다른 한편, 이는 스스로 폴란드 영화계의 아웃사이더라 생각하는 감독 자신의 입장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1957년 바르샤바 태생으로 14살에 폴란드를 떠나 독일, 이탈리아, 최종적으로는 영국에 정착해 영화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영화는 그가 처음으로 폴란드에서 만든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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