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섭(김태우)은 학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시간강사다. 소설을 써보려고 끄적거리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는 세상과 담을 쌓고 산다. 학원 동료들과 회식자리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피해 다닌다. 좋아했던 대학 동기 혜경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모임에 나가보지만 주식투자 따위가 화제인 술자리가 부대끼기만 한다. 재섭이 속마음을 털어놓는 유일한 사람은 그가 ‘혜경’이란 이름을 붙여준 창녀뿐이다. 재섭이 출강하는 학원에 여고 1학년 소희(김민정)가 새로 등록한다. 수다스럽고 당돌한 아이들의 도발을 받아넘기는 데 이골이 난 재섭이지만, 나이에 걸맞지 않게 조숙하고 냉소적인 소희는 왠지 무시하기 어렵다.어느날 재섭은 우연히 지하철 역에서 중년 남자와 심각한 대화를 나누는 소희를 목격한다. 재섭의 집까지 따라온 소희는 진실을 하나만 포함시켜 말하는 ‘거짓말 게임’을 제안한다. “우리 아버지는 뇌물 받아먹는 공무원이고, 엄마는 수영 강사와 바람났고, 제 친구 미정이는 성적 때문에 오늘 자살했고, 난 원조교제를 하고 있어요.” 소희는 거짓말 게임을 빌려 열일곱이 감당하기 어려웠던 끔찍한 비밀들을 털어놓는다.서로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향해 마음을 닫아걸었던 재섭과 소희는 조금씩 소통의 가능성을 느껴간다. 원조교제를 하던 소희는 임신 사실을 알고 중절수술을 받는다. 이후 소희는 학원에 나타나지 않는다. 재섭은 새삼 자기 마음속에 자리한 소희의 존재를 강하게 느낀다. 며칠이 지난 뒤에야 소희는 정류장에서 밤늦게 돌아오는 재섭을 기다린다. 재섭은 북받치는 울음을 참지 못한다.이미연 감독의 데뷔작 <버스, 정류장>은 조금 색다른 멜로 드라마다. 서른두 살 학원강사와 열일곱 살 여고생의 만남이란 소재 자체가 우선 매우 위태로워 보인다. 그럼에도 감독은 이런 ‘불온한’ 발상이 전혀 음습해 보이지 않도록 밝고 말끔하고 따뜻하게 처리했다. 다만 뭐든지 한 박자 이상씩 빠른 듯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대화의 호흡이 좀 가쁜 듯해 자연스럽지 못한 건 작은 흠이지만, 두 주인공의 감정의 흐름이 관객을 많이 앞질러 간 건 작다고 하기 어려울 것같다. 가령 거짓말게임을 하며 재섭이 “언제부턴가 네가 내게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걸 느꼈어”라고 고백하는 대목이 그런 예이다. 이런 대목들은 영화를 설명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8일 개봉. 이상수 기자leess@hani.co.kr▶ `상처’깊은 소희 온몸으로 느끼려 휴학까지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