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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카렐] <폭스캐처>
김세윤 2015-02-17

스티브 카렐

<에반 올마이티>

스티브 카렐이어야 했을까? 하나도 웃기지 않은 이야기의 주인공을, 뭘 해도 웃긴 배우가 굳이 연기할 필요가 있나? 실존 인물과 비슷하지도 않은 얼굴에 애써 가짜 코를 만들어 붙이면서까지? <폭스캐처>의 감독 베넷 밀러가 준비한 답은 이거다. “그를 캐스팅한 이유는, 존 듀폰을 연기하는 그를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스티브는 코미디 연기로 유명해졌고, 이전에 이같은 역할을 연기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듀폰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도 듀폰이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다고 생각지 못했다. 예상 밖의 일을 저지른 인물을 연기하려면 그 역할로 상상할 수 없는 사람이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스티브 카렐이어야 한다. ‘그 역할로 상상할 수 없는 사람’이 맞기 때문이다. 그는 매번, 항상, 정말 웃긴 사람이었으니. <40살까지 못해본 남자>(2005)만 봐도 알 수 있다. 가슴털을 왁싱하는 장면에서 자신의 무성한 가슴털을 실제로 쫘악, 테이프로 잡아 뜯으며 “켈리 클락슨!”을 목 놓아 부르는 장면은 매번, 항상, 정말 웃긴다. <겟 스마트>(2008)와 <브로큰 데이트>(2010)에서도 작심하고 웃겼고, <댄 인 러브>(2007)와 <크레이지, 스투피드, 러브>(2011)에서는 은근슬쩍 웃겼다. 부러 웃기려 하지 않은 <미스 리틀 선샤인>(2006)과 <세상의 끝까지 21일>(2012) 같은 작품을 볼 때조차 관객은 언제든 웃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스티브 카렐은 코미디언이니까. 코미디언이란 곧, 나를 웃게 만드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스티브 카렐이 처음부터 남을 잘 웃게 만드는 사람은 아니었다. 예전엔 다른 사람을 웃기는 게 참 쉽지 않았다고, 자기 입으로 순순히 털어놓는다. “난 내가 웃긴다고 생각해본 적이 한번도 없다. 실제로 좌중을 웃기는 데 늘 실패했다. 코미디언으로는 꽝이었다.”

한창 의욕에 불타던 30대 내내 끝까지 의욕만 불태우고 앉아 있던 스티브 카렐. 자기야말로 어서 양성되어야 할 후진이면서 어쭙잖게 후진 양성에 힘쓰는 코미디 연기 강사로 겨우 생계를 유지하면서 틈만 나면 오디션을 보았다. 그러나 코미디 배우가 되려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다. 드디어 방송에 출연한다고 좋아했다가 아예 전파도 타지 못한 비운의 프로그램만 여러 개.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SNL) 오디션에서는 윌 페렐에게 밀려 떨어졌다. 너무 멀쩡하게 생긴 자신의 얼굴을 탓했지만, 윌 페렐보다 웃기게 생겨먹기란 애당초 쉬운 일이 아니기도 했다. 결국 코미디 배우의 꿈을 접었다. 대신 코미디 프로그램 작가가 됐다.

이후 코미디언 존 스튜어트가 TV 프로그램 <더 데일리 쇼>의 새 진행자로 발탁된 1999년. 작가를 현장 리포터로 활용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어쩌다보니 스티브 카렐이 리포터로 발탁됐다. 점잖은 표정으로 하루의 이슈를 뉴스 형식으로 풍자하는 앵커맨이 되었다. 차츰 얼굴이 알려졌다. 마침 앵커맨을 찾는 영화가 있었다. <브루스 올마이티>(2003)의 잊지 못할 캐릭터 에반 덱스터가 그렇게 이 남자에게로 왔다.

그로부터 2년 뒤, 마흔살까지 주인공 한번 못해본 그가 <40살까지 못해본 남자>에서 처음 주인공이 된다. 다시 2년 뒤, 이번엔 <브루스 올마이티>의 속편 <에반 올마이티>(2007)의 주인공을 맡는다. 1편에서 단역에 가깝던 조연이 2편에서 일약 주연이 되는 흔치 않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좌중을 웃기는 데 늘 실패했다’던 코미디언이 이상하게 그때부터는 우리를 웃기는 데 한번도 실패한 적이 없다. 왜일까? “24시간 편의점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던 20대 시절. 훗날 내 연기의 모델이 되어준 수많은 캐릭터를 매일 밤 마주쳤다. 특히 무능하고 소심한 중년 남자들. 코미디를 연구하면서 줄곧 그런 남자에 관심을 가졌다. 왜냐하면 나 스스로 무능하고 소심한 남자가 될 수밖에 없는 몸뚱이를 갖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난 여자들이 환상을 품을 만한 남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남자들이 환상을 품을 만한 남자도 아니지 않은가.”

스티브 카렐의 코미디는 ‘리액션’이다. ‘액션’이 아니다. 스티브 카렐의 무기는 ‘연기’다. ‘개인기’가 아니다. 짐 캐리 같은 스탠드업 코미디언들이 타고난 액션과 개인기로 사람을 웃기는 방식과 다른 점이다. 그런 비범한 재능을 타고나지 못해서 현장의 ‘좌중’을 웃기는 데 늘 실패했지만, 다행히 극장의 ‘관객’을 웃기는 건 다른 재능으로도 충분히 가능했으니. 그게 바로 배우가 얼굴에서 웃음을 지울수록 관객은 오히려 더 크게 웃게 되는 시추에이션 코미디의 힘이다. 여기에 스티브 카렐이 곧잘 연기하는 ‘무능하고 소심한 중년 남자’가 힘을 보탰다.

사실 <폭스캐처> 이전에도 그는 종종 코미디의 울타리를 뛰어넘는 근사한 순간을 만들어냈다. ‘잘 웃지 않는 무능하고 소심한 중년 남자’ 캐릭터는 제법 운신의 폭이 넓기 때문이다. 특히 <미스 리틀 선샤인>에서 인생 최악의 순간을 맞이한 조카 드웨인(폴 다노)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네던 외삼촌 프랭크(스티브 카렐). 자신도 이제 막 자살 충동에서 헤어난 삼촌이 실의에 빠진 조카에게 충고한다. “프루스트는 인생의 막바지에 도달해서 뒤를 돌아보고는 이렇게 결론내렸어. 고통받은 날들이 인생 최고의 날들이었다고. 그때의 자신을 만들어준 시간이었으니까. 행복했던 때는? 완전히 낭비였지. 하나도 배운 게 없어.”

실패할 대로 실패하고 좌절할 만큼 좌절해본 사람이 건네는 인생사용후기. 인생의 ‘정답’을 가르쳐주지는 못하지만 ‘오답’이 뭔지는 말해줄 수 있는 듬직한 어른의 모습으로 그가 거기 서 있다. 적잖이 뭉클한 감동을 안겨주었다. 원래 빌 머레이와 로빈 윌리엄스에게 제안했던 배역이었지만 스티브 카렐에게 참 잘 어울렸다. 그때부터 그는 이미 코미디‘만’ 할 줄 아는 배우가 아니었던 것이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본다. 꼭 스티브 카렐이어야 했을까? 하나도 웃기지 않은 이야기의 주인공을, 코미디 배우가 굳이 연기할 필요가 있나? 실존 인물과 비슷하지도 않은 얼굴에 애써 가짜 코를 만들어 붙이면서까지? 이번엔 스티브 카렐의 오래전 인터뷰에서 한번 답을 찾아본다. “내 생각에 코미디 속 캐릭터는 자기가 코미디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존 듀폰은 ‘자기가 코미디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는’ 억만장자다. 그의 행동은 온통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어서 차라리 우스꽝스러운 광대처럼 보인다. 모든 것을 손에 넣은 갑부로 알려졌지만, 실상은 ‘무능하고 소심한 중년 남자’에 불과하다. 시종일관 서늘하고 불안한 영화의 기운에 눌려 관객이 소리내어 웃지 못할 뿐, 사실 존 듀폰이 만들어내는 모든 상황은 희대의 코미디라 할 만하다. 그러므로 스티브 카렐이어야 한다. 그는 ‘그 역할로 상상할 수 없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그 역할로 상상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배우이기 때문이다. <폭스캐처>의 잊지 못할 캐릭터 존 듀폰은 그렇게 이 남자에게로 왔다.

<브루스 올마이티>

magic hour

웃지 않아야 웃긴다

<브루스 올마이티> 첫 시사회가 열린 날. 스티브 카렐은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다(고 훗날 고백했다). 애초에 출연 분량이 얼마 되지 않는 데다, 그마저도 통편집당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가족에겐 미리 말해두었다. 몇 장면밖에 나오지 않을 거라고. 그리고 영화가 시작되었다. 정말 몇 장면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중 한 장면. 그가 연기한 뉴스 앵커 에반이 주인공 브루스(짐 캐리)의 농간으로 엉뚱한 뉴스를 전하는 시퀀스. “스웨덴 수상이 워싱턴에 온 오늘, 제 젖꼭지는 프랑스에 갔습니다.” 이래 놓고 굳은 표정으로 카메라를 쳐다볼 때 “다음 뉴스느으으으이히리야~. 바브루렐레바루루푸아~.” 이러면서 다 큰 어른이 난데없이 투레질을 해댈 때도. 영화 속 그는 좀처럼 웃지 않았다. 그저 최선을 다해 당황스러워할 뿐이었다. 진심으로 난감해하는 뉴스 앵커가 거기 앉아 있었다. 잘 웃지 않는 배우 때문에 관객이 오히려 더 크게 웃고 만 장면. 새로운 코미디 스타가 탄생하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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