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해고시키고 복직할 순 없어요.” <내일을 위한 시간>이 첫 상영되었던 2014년 칸국제영화제에서 적지 않은 관객은 산드라가 이 대사를 하는 순간 일제히 환호와 박수갈채를 보냈고 그것들은 이례적으로 더 우렁차고 뜨거웠다. 그런데 고백하자면 나는 세상과 영화의 간극을 느끼며 그 박수갈채 속에서 잠시 의문스러워하며 망설였다. 다르덴이라는 진귀한 창작자들이 만들어냈고 우리 사회의 가련하지만 명예로운 한 인물의 초상이 철학적으로 담겨 있는, 하지만 영화적으로 완벽히 동의할 수만은 없는 이 작품에 관한 복잡한 심중을 어떻게 말해야 좋을까 고민된다. 그런 점에서 다음과 같은 네편의 진술은 각자 서로 뜻이 다르고 별개의 귀결을 지닌 네개의 단상으로 읽혀도 좋고 하나의 글을 위한 네개의 장으로 읽혀도 좋다.
선택
선택이라는 화두에서 시작해보자. 선택은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 그 어떤 것보다도 전면에 배치되어 있는 중요한 화두다. 이 영화에서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는 감독도, 관객도, 등장인물도 모두가 다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산드라가 만나는 첫 번째 동료 윌리와 그녀의 대화를 기억한다. 윌리가 말한다. “널 반대한게 아니라 보너스를 택한 것뿐이야. 양자택일을 강요한 건 사장이야.” 산드라가 말한다. “알아요, 강요한 건 비열한 짓이지요. 하지만 제 일을 잃고 싶지 않아요.”
윌리와 산드라가 ‘강요’라는 말을 공유한다는 점을 눈여겨보자. 이 영화에는 선택의 괴로움과 난처함에 관한 무수한 언급이 등장하지만 주어진 상황을 이토록 객관적으로 서로 공유하고 압축하고 요약하는 대사는 거의 없다. 이것이 이 영화를 보는 모든 이들이 느껴야 할 상황적 대전제라는 뜻일 거다. 그 때문에 가장 첫 번째 대화에 등장한다. 산드라와 동료들은 지금 강요된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시스템에 빠져 있다.
정신분석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레나타 살레츨은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박광호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에서 “강제된 선택”이라는 장을 따로 할애하고 있다. 산드라의 사장이 직원들에게 제안한 투표의 의례, 그 무책임한 회피의 퍼포먼스는 정확히 이 장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강요된 선택의 종류는 실로 다종다양하다. 얼마 전 개인적으로 보험설계사를 만났을 때 그는 아무리 보아도 큰 차이가 없거나 장점이 없어 보이는 선택지 여러 개를 제시하면서 “고객님,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좋은 일인가요?”라고 내게 강권했다. 이것은 강요된 선택의 가장 유순한 차원에 해당할 것이다. 이 문제는 삶 안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며 사람의 생명이나 삶 전체를 결정짓는 중대한 사회적, 정치적 쟁점이 될 수도 있다.
살레츨은 미군에 수감되었다가 풀려난 어느 이라크인의 예를 들고 있다. 혐의가 없어서 석방되는 그에게 미군은 구금 기간 동안의 처우에 대한 확인서에 사인할 것을 요구했다. 이라크인은 두 문항 중 한 문항을 택일해야만 했다. 첫 번째 문항에는 구금 동안 학대가 없었다고 적혀 있었다. 두 번째는 학대를 받았다고 쓰여있었다. 그리고 문서를 작성하는 그의 앞에는 전기 충격기를 든 세명의 미군이 쏘아보고 있었다. 석방된 이라크인은 어느 쪽에 사인한 것일까, 아니 어느 쪽에 사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그는 강요에 부응하는 선택을 했을 것이다.
이라크인이 강제된 선택의 시스템 안에서 비교적 합리적 선택을 해 세상 밖으로 나왔다면, 영화 <선택>의 주인공인 김선명을 비롯하여 비전향 장기수들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비합리적 선택을 고수했고 수십년을 감옥에서 버텼다. 과장하자면 산드라의 선택이 김선명의 선택과 유사한 종류의 것이다. 김선명이 자유를 미끼로 한 이념의 강제적인 확답 요구 앞에서 (사실상 그 앞에서라면 사소하거나 보잘것없어 보이는) 개인의 명예를 지키고자 감옥에 남기를 고수했던 것처럼, 산드라는 강제된 시스템으로의 복속을 요구받는 자리에서 자존을 지키고 가난의 감옥에 남기로 선택한 것이다. 김선명과 산드라는 거대한 체제의 요구에 패배에 가까운 개인적이고 자존적인 선택으로 응수했다.
그러니까 <내일을 위한 시간>에 대해서는, 선택이 중요하다고 뭉뚱그려 말하는 대신, 여기 두 종류의 선택이 있음을 지적하고, 그 두개의 선택을 분리해낸 다음, 두개의 선택의 불가피한 충돌이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하다. 첫 번째 선택은 강요된 이데올로기적 시스템으로서의 선택이다. 두 번째 선택은 모두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산드라의 자존적인 선택이다. 우리는 이 영화에 대해 말할 때 전자의 선택이 끼치는 악영향에 대해서만 말하거나, 후자의 선택이 갖는 가치에만 감격하는 경향이 있다. 혹은 후자의 선택을 공적으로 영접하는 데에 바쁘다. 하지만 산드라의 선택은 공적으로 옳은 최고의 행위가 아니라 사적으로 다할 수밖에 없는 최소한의 실존적 행위일 것이다.
예컨대 감독 다르덴은 산드라의 선택의 고귀함을 연대라는 공적 용어로 줄곧 해명해왔다. 동의하기 어렵다. 산드라가 동료들을 향해 했던 것은, 연대의 호소이기 이전에 명백히 본능적인 개별의 동정과 연민에의 호소다. “거지가 된 기분”이라고 산드라는 고통스러워했는데, 그것이 사실상의 잔혹한 진실이다. 연대의 가치로만 산드라의 선택을 설명하려는 감독의 자세는, 그녀가 연민과 동정을 구하는 지난한 상황을 건너서야 그 선택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관객이 망각하고 산드라의 그 고귀한 선택의 순간에 영원히 머물기를 바라는 것에서 나온 것 같다.
그럴 수 없고 그럴 필요가 없다. 동정이나 연민이라는 비교적 개인적인 차원의 감정이 연대라는 드높은 공동체적 감정보다 밑지지는 않을 것이다. 산드라의 놀라운 선택은 자신의 말과 같이 거지처럼 동정과 연민을 호소해본 자만이 특별하게 행할 수 있는 가장 사적인 차원의 실존적 행위다. 산드라의 선택은 긍정적인 공적 연대가 아니라 부정적인 사적 실존의 의사표시다. 강요된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 시스템을, 자신의 자존과 명예를 지키기 위한 실존적 선택이라는 무기로, 강력하게 일격하는 것이다.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대해 ‘선택이라는 실존적 행위’로 맞섰다는 것이 그녀의 획기적인 일면이다.
피로와 우울
<내일을 위한 시간>과 관련하여 많은 이들이 선택이라는 화두에 집중한 것에 비하면, 사실상 영화 안에 같은 비중으로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는데도 거의 언급되지 않은 화두도 있다. 산드라의 피로와 우울이라는 지독한 증상에 관련한 것들이다. 물론 지금 이 말들은 재독 철학자 한병철이 쓴 탁월한 사회 철학 비평서 <피로사회>(김태환 옮김, 문학과 지성사 펴냄)의 개념들을 의식하며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영화의 주인공 산드라의 심리적, 육체적 상태에 이 피로와 우울 증상이 이미 처음부터 짙게 새겨져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내일을 위한 시간>의 첫 장면은 어떻게 설정되어 있는가.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는 산드라의 모습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산드라는 첫 장면에서부터 피로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는 집에만 돌아오면 “피곤하다”고 내내 호소하며 침대로 향한다. 그녀는 심리적으로 타격을 받으면 육체적으로 피로함을 호소한다. 동료인 줄리앙이 은근하면서도 악독한 말로 그녀의 심정을 괴롭혔을 때에도 그녀는 집으로 돌아와 “피곤하니 쉬고 싶다”고 남편에게 말한다. 그녀의 피곤함은 반복적이고 주기적이다. 그것은 육체적 피곤함이 아니라 두려움과 불안의 증상이며 호소다.
반면에 산드라의 우울은 영화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이미 심각할 대로 심각했다. 우리는 영화에서 전개되지 않은 시간을 상상하는 것이 필요하다. 산드라가 지금과 같은 해고 위기 상황에 봉착한 이유는 무엇이었던가. 사장은 산드라가 우울증(혹은 신경쇠약 혹은 소진증후군, 그것이 어떤 병명이라 해도)으로 병가를 내고 쉬는 동안 그녀의 부재가 회사에 타격을 입히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초과 근무제를 실시한다면 그녀를 제외한 직원들만으로도 제품 제조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고 가식적인 투표를 거친 뒤 산드라를 해고한 것이다. 영화는 바로 그 직후의 시점부터 진행된다. 그리고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산드라의 우울은 피로와 함께 정기적으로 찾아오며 더 많은 약을 부르고 급기야 그녀는 자살 시도에까지 이르게 된다.
한병철은 지금 이 시대를 ‘과잉 긍정이 넘쳐흐르는 긍정사회, 그로 인해 자기착취가 빈번해지는 성과주체들의 성과사회, 그 성과주의에 탈진해버린 결과로써 피로와 우울로 병든 환자들이 속속 양산되는 피로사회’로 설명해내고 있다. 한병철과 살레츨이 2010년 한해에 동시에 나온 각자의 저서에서 서로를 언급하는 경우는 없지만, 한병철이 “과도한 선택의 자유를 누리는 후기 근대의 성과주체”라고 표현할 때 이 자유라는 용어에 스며 있는 우려는, 살레츨이 ‘자유로운 선택 이데올로기로 포장된 자기계발의 환상 논리’를 지적할 때의 그 자유에 대한 우려와 그 얼마나 밀접한가.
두 예민한 철학자가 우연히 공유하고 교차하게 된 사회학적 용어로서의 자유에 대한 우려란, 우리가 신자유주의라고 할 때 그 자유의 핵심이기도 할 것이다. 산드라는 바로 피로사회라 불리는 신자유주의 사회의 일원이며 그 사회적 질병으로서 피로와 우울을 앓고 있다. 우리가 은연중 <내일을 위한 시간>을 신자유주의의 여파에서 나온 작품이라고 느끼고 있다면 이상의 상관성 때문일 것이다.
물론 한병철이 “긍정성의 과잉이 지배하는 성과사회에서 생기는 병이 우울증”이라고 단언할 때, 그건 우리 사회와 우울증이 맺고 있는 체험적 일반론과 다소 거리가 있는 철학적 주장이다. 예컨대 아직도 과잉 긍정의 부작용보다 과잉 부정의 부작용이 훨씬 더 큰 문제가 되는 한국 사회에서, 자기긍정이 지나쳐서 우울증을 얻는 경우보다 타자로서 부당하게 부정되어 우울증을 얻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가령 우울증이라는 병명을 특별한 학문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일반 상식적 쓰임새로만 사용한다면, 우리는 해고 및 실업 등을 겪으며 타자로서 전격 부정되어 그 외상으로 우울증에 걸리는 이들의 사례를 훨씬 더 많이 알고 있다. 실업우울증이라는 말이 사회적 관용어로 자리잡았을 정도다. 지나친 자기긍정의 폐해라는 개념은 해고노동자 이창근과 김정욱의 피로와 우울을 해명해내지 못한다.
하지만 이렇게 이해해야겠다. 산드라는 영화에서 자기긍정에 시달리지 않는다, 그러니 그녀는 긍정사회와 성과사회의 피해자 모델이 아니다, 라고 혹시라도 지적한다면 그건 오해일 것이다. 한병철이 우리 시대의 일반론이 아닌 신종적 양상의 특수한 핵심을 독창적으로 꿰뚫은 것처럼, <내일을 위한 시간>도 실업의 일반론이 아니라 실업과 관련한 이 시대의 신종적 면모를 작품에 새기고 있다. 관련하여 돌아보면 명백하고도 기이한 사실 한 가지가 있다. 적어도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 산드라는 실업 때문에 우울증에 걸린 것이 아니라 이미 걸려버린 우울증 때문에 해고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그녀의 우울증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영화는 설명하지 않지만 산드라가 이 사회가 요구하는 자신의 성과를 최대한 긍정하려다 탈진되어 그런 병에 걸렸을 것이라는 걸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
다르덴이 관객을 향해 켜놓은 유도등을 생각해야 한다. 다르덴은 누군가가 산드라의 우울증은 어디서 왔는가 기원을 찾으려 할 때 그것이 오직 회사와 그녀의 노동관계에서만 비롯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도록 안내하고 있다. 평론가 한창호가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씨네21> 986호) 다르덴 영화에서 이토록 안정적이고 화목한 가족구조는 처음 등장했다. 사회적으로 부도덕한 아버지와 갈등을 겪는 어린 아들(<약속>), 알코올 중독자 어머니와 싸우며 가장으로 살아가는 소녀(<로제타>), 아들을 잃고 슬픔에 빠져 사는 아버지(<아들>), 갓난아이를 팔아버리는 철없는 젊은 아빠(<더 차일드>), 시민권을 위해 마약 중독자와 위장 결혼한 이민자 여인(<로나의 침묵>), 아버지가 버린 아들(<자전거 탄 소년>). 이런 이들이 그동안 다르덴의 영화 세상에 살았다. <내일을 위한 시간>은 그렇지 않다. 그런데 왜일까, 그들은 왜 화목할까. ‘이 가정에는 문제가 없다.’ 감독은 그렇게 확실히 못박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그 우울증은 어디서 왔을 것인가 질문을 유도하고 싶어 한다.
다르덴이 1999년에 연출했고 실직이라는 서사적 모티브에서는 유사한 영화인 <로제타>와 비교해본다면 <내일을 위한 시간>의 피로사회적 면모는 더 확실해진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고 한병철은 말했는데, 전적으로 일치할 리는 없지만 로제타는 규율사회의 히스테리 환자에, 산드라는 피로사회의 우울증 환자에 가깝고 로제타는 면역학적으로 위험한 타자에, 산드라는 내부의 무능한 낙오자에 가깝다.
그리고 다르덴 영화에서 언제나 중요한 동선과 영역 혹은 “지리적 표상”의 문제도 비교의 항목이 된다. 로제타는 위험천만의 고속도로라는 경계선을 넘어야만 숲속 빈민의 캠핑촌이라는 자신의 터전으로 갈 수 있다. 그녀는 늘 그 경계를 넘어 이 아늑한 도시에 소속되고 싶어 하는 위험하고 거친 타자로 지시된다. 반면에 산드라에게는 그러한 자타를 구분하는 지리적 표상이 주어지지도 않거니와 산드라는 오로지 이 사회 내부 안에서만 방황하는 인물이다. 산드라가 바로 긍정사회, 성과사회, 피로사회를 살고 있는 전형적인 인물이며 소모되어 우울해진 인물이다. 누군가에게는 사장의 제안을 거절하는 그녀의 행위가 왜 그토록 단호하고 통쾌해 보인 것인가. 앞서 유사하게 말했지만, 그녀의 선택이 그녀를 망친 이 과잉의 긍정 상태에 저항하는 유일하고 정당한 부정의 일격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러할 것이다.
비(非)공감
어떤 영화에 대한 비평은 그 영화가 반영해낸 것들에 대해 충실하게 논평하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하지만 어떤 영화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그 반영의 형식적 과정들이 어떠한지 주목해야 할 때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내일을 위한 시간>이 반영해낸 세상의 철학적 면모(선택, 피로, 우울)에 깊이 공감하면서도 이 영화의 몇 가지 형식적 작동과 선택에 대해서는 의문이 뒤따르거나 공감되지 않는다.
서사적 안배주의라고 칭할 만한 것을 일단 문제 삼고 싶다. <내일을 위한 시간>은 다르덴의 모든 장편 극영화 중 영화적 결이 가장 무딘데, 그 이유는 역설적으로, 다르덴의 영화들 중에서 이 영화의 서사가 가장 다양하면서도 균형적이고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산드라가 만나는 12명이 같은 유형인 경우가 거의 없다. 그들의 거절과 지지와 인간적 유형의 강세는 세밀하게 조정되어 있다. 이토록 여러 인물이 등장하는 다르덴 영화를 우리는 본 기억이 없다. 산드라와 동료들이 만날 때 12개의 겹치지 않는 하위 서사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런데 같지 않고 다양해서 무엇이 문제라는 것인가, 그것은 차라리 장점이 아닌가 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다르덴은 산드라가 동료들을 만날 때마다 관객이 제각각의 서스펜스를 느낄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영화 관람 상 개인적인 체감은 확연히 달랐다. 우선 이것이 서스펜스라면, 명백히 주류영화에서 주인공이 조력자들을 불러모을 때의 관습적인 하위 서사를 연상케 한다(다양한 액션영화, 무협영화 등 장르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심지어 <소림축구>에 이르기까지). 다르덴이 말하는 서스펜스는 초반 서너명까지만 유효하며 이내 힘을 잃는다. 왜 잃을까. 산드라가 만나는 그다음 인물이 안겨줄 서스펜스가 무엇일지와 무관하게 우린 어쨌든 이것이 정해진 다양함이라는 큰 도식 안에서 펼쳐지며 안정감의 지도 안에 있다는 걸 이내 감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양한 유형들의 내정된 출현이라는 도식’이다. 다르게 말하면 다르덴 영화에서 서사는 늘 어떤 전제된 틀이 없는 것처럼 불규칙하면서도 귀납적으로 느껴져서 매력적이었는데, <내일을 위한 시간>만큼은 어떤 미리 주어진 틀 안에서 적당히 다양하게 도식화되어 있을 뿐이어서 심하게 연역적이다.
더군다나 다르덴은 서스펜스에 기대지 말았어야 했던 것 같다. 서사적 적당주의 또는 안배주의를 느끼고 느끼지 않는 것이 관객 개인의 편차라고 한발 물러선다 해도, 다르덴이 이 영화의 핵심을 서스펜스로 잡은 순간, 즉 다르덴의 설명대로라면, 인물과 카메라의 동력이 아니라 드라마틱 라인으로 잡은 순간, 확실히 실종된 건 그들 영화의 가장 비상한 장점이었던 특유의 물리적 전압이다. 그 물리적 전압은 힘을 잃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다르덴 영화 특유의 마찰의 리얼리즘(개인적으로 다르덴 영화의 리얼리즘을 이렇게 부른다), 즉 인물과 카메라의 일대일의 물리적 전압의 상승으로 느껴지는 그 마찰력의 리얼리즘이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도 느껴졌던가. 10대의 사나운 소녀의 이야기가 아니라 완숙한 40대의 여성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물리적 전압이 사라진 게 아니다. 다르덴이 서스펜스라고 부르는 서사적 라인이 영화의 주축이 되는 가운데 인물들이 다양하게 도식적으로 진열되면서 동시에 카메라가 한 발 물러서서 그 만남들을 단지 생기 없이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다르덴 영화에서 주인공과 일대일로 맺었던 카메라의 긴장감은 서사적 라인을 보정하는 하위의 역할로 밀려나게 된 것이다.
이와 동시에 긴장적인 감화의 이미지가 퇴보하고 결정론적이고 목적론적인 이미지가 강성해진 상황이라고 보아도 될 것 같다. 다르덴 영화의 예의 긴장적인 감화의 이미지란 가령 이런 것이다. <로제타>에서 로제타라는 소녀는 실직했고 남자친구 리키에를 만나 우정을 배웠지만 필사적으로 살아야 하기에 때때로 간악함을 버릴 수 없다. 그녀는 리키에를 밀어내고 그의 일자리를 차지하려는 동시에 고민한다. 그래서 이런 장면들이 마음을 흔든다. 물에 빠진 리키에를 구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고민할 때 그 찰나의 몇초간. 혹은 리키에가 부정을 저지르고 있음을 사장에게 고발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는 로제타, 그녀의 후면을 응시하는 카메라의 그 망설임의 기나긴 시간 30여초. 그리고 로제타의 고발로 직장을 잃었지만 끝내 다시 그녀를 부축하는 리키에의 동정과 연민의 손.
반면에 결정론적이고 목적론적인 이미지는 이런 경우다. 나는 <내일을 위한 시간>의 캐스팅에 관하여, 옳고 그름을 말할 순 없어도, 반대한다. 다르덴은 자신들의 영화에 스타가 기용됐을 때, 그에 대한 사회적 착란의 믿음이 영화 내적인 주인공의 운명을 어떤식으로 압도할 수 있는지를 간과했거나 알면서도 너무 기댄 것 같다. 모두가 마리옹 코티야르라는 스타를 알고 있고 그녀를 안다는 건 그녀를 믿는다는 것으로 착란된다(우리는 스타가 도덕적으로 잘못을 범하면 우리의 믿음을 저버린 것처럼 화를 낸다). 게다가 이건 주인공의 어떤 선택이 중요한 영화였다. 그러니 그녀가 그 믿음을 벗어나지 않는 옳은 선택을 하자 그것은 당연히 옳은 것이지만 그 때문에 적당하게 마무리된 정의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게다가 <내일을 위한 시간>은 이 하나의 수렴점이 되는 장면을 향해서 내처 달린 것 같다. 얼마나 결정적이었는지, 우리는 산드라가 명예로운 선택을 행사했다는 건 자주 말했지만 피로와 우울에 시달렸다는 건 잘 말할 수 없었다. 이 장면이 이미지의 측면에서 결과적으로 모든 걸 흡수하고 수렴했기 때문은 아닐까. 왜 다르덴은 산드라를 동료들과 일대일로 만나도록 설정했을까. 그건 같은 조건에 처하게 될 산드라의 결정이 있을 마지막 일대일 대면의 자리를 더 빛나 보이도록 그러했던 건 아닐까. 물론 산드라의 선택이 (로제타와는 다른) 어른의 선택이라는 건 더할 수 없이 깊은 감동을 준다. 하지만 여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영화가 자기의 긴장적 이미지를 형성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대신, 영화가 단숨에 세상의 이치가 되고 세상이 되고 싶다는 어떤 결정론과 목적론의 몸짓이 있다.
비밀과 불투명함 그리고 부정
“가장 가까운 사람의 경우에도 매력이 유지되려면 그의 일부분은 불명확하고 비가시적이어야 한다”는 게오르그 짐멜의 말을 인용하는 것과 함께, “비밀의 해석학은 투명성을 위해 어떻게 해서든 폐기해야만 하는 악마의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술, 다시 말해 설사 가상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뭔가 깊이를 창출하는 문화적 기술이다”라고 철학자 한병철은 자신의 저서 <투명사회>(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에서 아름답게 쓰고 있다.
서로 가깝기로 소문난 영화와 세상의 관계에 대해 생각할 때 경청해도 좋을 만한 정의인 것 같다. 모든 관객은 우리가 영화의 신비라고 부를 만한 그 비밀에 대해 각자의 해석학자가 되어야만 하는 행복하고 수고로운 권리를 지니고 있다. 비밀과 불투명함은 영화관객인 우리에게 주어진 아름다운 숙제다. 조금 다른 맥락으로도 읽히지만, “영화는 보이는 세상이고, 세상은 보이지 않는 영화다. 양자의 경계는 유동적이고 불투명하”(<보이지 않는 영화>, 강 펴냄)다고 평론가 허문영은 명료하게 통찰했다.
<내일을 위한 시간>은 다시 생각해보니 미니멀하기보다 투명한 것 같다. 예컨대 산드라와 남편 마누와 동료 안느가 차를 타고 가며 즐겁게 합창하는 장면은 투명성이 지나쳐서 다소 맥이 빠진다. 이 장면을 이렇게 말하는 건 너무 몰인정한 자세일까. 행복한 휴지기의 한 장면으로 혹은 들뜬 연대의 한 장면으로 보아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각자의 영화에는 각자의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 <내일을 위한 시간>은 켄 로치의 영화가 아니다. 서사가 적절히 안배되고 거친 마찰력이 사라지고 스타가 압도하며 이미지가 곧장 결정적인 세상의 선택이 되려 하는 것은, 적어도 다르덴이 그러하려는 것은, 영화가 비밀과 불투명함 없이 갑자기 세상이 되려는 위험한 징조다. 지금껏 다르덴 영화의 아름다움이 불투명한 유보와 마찰과 부정에 있어온 것과도 위배된다.
나는 다르덴이 전작 <자전거 탄 소년>에서 일종의 인간-매니퓰레이션을 작동시켰다고 서투른 의견을 제출한 바 있다. 이 영화가 리얼리티에 관한 동화처럼 보인다고 쓰기도 했다. 이 조작은 다시 생각해보니 어쩌면 비밀과 불투명을 방어하기 위한 긴급한 조작이었던 것 같다. 그들은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들이 고수해온 마찰의 리얼리즘의 최후를 지켜야 한다고 직감했던 것 같다. 그렇게 하여 아슬아슬하게, 그리고 거의 곡예사와 같이, 라스트신의 일시적 조작으로서 리얼리티를 간수하여 세상의 필연적 상태로 나아갔다. 일종의 매니퓰레이션을 감행하여 거기 비밀과 불투명의 막을 입히고 싶었던 것 같다. 같은 방식으로 <내일을 위한 시간>이 피로사회의 리얼리티에 관한 동화를 구연하는 것이었다면, 이번의 경우는 손이 훤히 보이는 마술사의 경우와 같아서 관객을 다소 압도할 수 없었다.
한 감독의 영화는 실패할 수도 있고 성공할 수도 있다. 그건 동시대의 위대한 감독인 다르덴에게도 넉넉하고 품 넓게 적용되어야 할 문제다. 그보다는 이런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세상은 투명하게 영화가 될 수 없다. 영화도 투명하게 세상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양쪽은 영원히 그래서도 안 된다. 유의할 건 ‘투명하게’라는 말이다. 지금 이 말은 세상과 영화가 영원히 다른 존재로서 달라야 한다고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라, 불투명만을 매개로 양자가 서로 밀접히 존재해야 한다는 걸 강조하려는 것이다. 양자는 서로의 친연성을 과시하면서 혹은 의식하면서 혹은 두려워하면서 영원히 가까이 있으나 결코 완전히 일치되지는 않는 그 미세한 존재론적 부정과 불일치의 긴장으로 내내 교차하고 평행할 것이다. 이것이 둘 사이의 운명적인 관계다.
동시에 이것이 영화가 세상을 향해 가질 수 있는 가장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부정의 에너지다. 이 부정의 에너지는 때때로 누군가의 영화에서는 섬광처럼 빛나고 사라지거나 누군가의 영화에서는 은밀히 내내 잠재되어 있거나 누군가의 영화에서는 시종일관 폭발하며 들끓을 것이다. 어느 쪽이 더 옳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다만 영화가 섣불리 투명해지겠다고 나설 때 우리는 그것이 오히려 세상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무디게 할 것이므로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세상이 영화를 흉내내려고 할 때에는 무한히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이러해야 하는 매체 혹은 예술이 영화뿐은 아니겠지만, 지적한 것처럼 영화는 세상과 가장 가깝기 때문에 더욱 그러해야 할 것이다. 불투명한 해석적 긴장의 여지를 의식하면서, 이것이 곧장 투명하게 저것이 되지 않는 불일치의 운명과 부정의 에너지를 의식하면서, 영화는 세상 앞에 있어야 할 것이다.
후기) 개인적으로 중요한 선택을 하나 했다. 그 선택이 내가 모르는 어떤 비밀을 품고 있을지 약간 흥분된다.… 그리고 몇몇 사람들이, 고맙고 그리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