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2
[김대명] 달라진 건 없습니다

<미생> 김 대리

시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풍부한 이야기를 하나의 단어, 하나의 문장에 함축하는 과정이 신비롭다고 생각했습니다. 틈틈이 시를 썼고 종이와 펜만 있으면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에 <8월의 크리스마스>를 만났습니다. 한편의 시와 같은 영화였습니다. 러닝타임 안에 필요한 것만 정확히 모아서 덜어낸 영화였습니다. 곱씹을수록 감상이 새로웠습니다. 당시 나이로 인물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순 없었지만 그때 커다란 무언가가 제게 왔습니다. 연기도 시와 비슷하구나 생각했습니다. 필요 없는 걸 치우고 필요한 것만 드러내는 것이 중요함을 배웠습니다.

스물네살 늦은 나이로 대학에 들어가 연기를 전공했습니다. 지도교수님이 연출하신 연극 <귀신의 집으로 오세요>(2006)에서 배우로 데뷔했습니다. <귀신의 집으로 오세요>가 끝나고 오디션을 보러 다니다 학전에서 올리는 <지하철 1호선>(2007)이란 작품을 했습니다. 꼭 ‘영화배우’가 되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연기를 하기로 한 계기가 영화여서인지 영화를 하고 싶다는 꿈은 항상 있었습니다. 월요일만 빼고 화•수•목•금요일엔 꼭 극장에 갔습니다. 돈이 없을 때라 하이텔 등에 시사회를 신청해 극장에 다녔습니다. 담당자 얼굴을 익히고 나서는 무작정 들여보내달라고 했습니다. 어느 날은 종로 씨네코아에서 라스 폰 트리에의 <백치들>(1998)을 보았고 그 다음주 <씨네21>을 통해 도그마 선언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무슨 작품인지 알지도 못하고 그냥 봤습니다. 덕분에 그 영화들이 지금까지도 제 안에 남아 기운이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개들의 전쟁>(2012)으로 첫 영화 출연의 꿈을 이뤘습니다. 지금은 제 매니저로 함께 일하는 친구의 소개로 오디션을 본 덕입니다. <더 테러 라이브>(2013)의 테러범 목소리 연기를 하며 더 많은 대중과 만났습니다. 추천을 통해 비공개 오디션을 보게 됐는데 조감독이 와서 대본을 통째로 녹음해갔습니다. 이름도, 성별도 다 빼고 목소리만 가지고 본 오디션인데 감사하게도 감독님이 제 목소리를 선택해주신 겁니다. 그 뒤로 <방황하는 칼날>(2013), <표적>(2014), <역린>(2014)에 참여했습니다. 꿈꾸던 대로 영화를 찍게 됐지만 일상엔 큰 변화가 없습니다. 수유동에서 삼청동을 지나는 파란 버스를 그대로 타고 다닙니다. 여전히 오래전 보따리장수 할아버지에게서 1만5천원을 주고 산 중고 태엽시계를 차고 다닙니다. 거리를 걸으며 대본을 외우는 것도 똑같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눈앞에 있는 이 역할을 잘해내야겠다는 생각뿐입니다.

<내부자들>로 윤태호 작가와 다시 만난다

드라마 <미생>(2014)은 저에게 아주 고마운 작품입니다. 가장 큰 수확은 긴 호흡으로 연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것입니다. ‘김 대리’가 되기 위해 제게 중요했던 것은 ‘생활감’을 놓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미생>을 보는 직장인들이 ‘우린 저러지 않는데? 직장생활 안 해봤나보네’ 하는 순간 김 대리는 텔레비전 속 가상의 인물로 그치고 맙니다. 주머니에 펜을 꽂고 다니는 이유, 바지 사이즈, 전화받는 방식까지 ‘우리’의 일상으로 녹아 있어야 했습니다. 수화기를 들자마자 “예, 원인터내셔널 영업3팀 김동식입니다”가 한 호흡으로 나와야 했습니다. 사회생활 이후 무너진 신체의 밸런스도 보여줄 필요가 있어 체중 관리도 했습니다. 평소 차고 다니는 이 시계는 누구 것인지도 모를 중고 시계입니다. 뒤에 ‘전략기획국 일동’이라고 써 있는 걸 보면 팀원들이 선물해준 모양입니다. 김 대리가 이런 시계를 차고 있을 것 같아 촬영 때도 일부러 차고 나왔습니다.

스크립터에겐 여러모로 미안합니다. 애드리브가 워낙 많아서 매번 적어둬야 하는 게 힘들었을 겁니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만 하는 드라마입니다. 다른 드라마는 일하다가도 연애를 하고, 야유회를 가고, 점심시간에 다같이 밥이라도 먹습니다. <미생>은 점심시간에 밥도 안 먹습니다. 그 안에서 윤활제 역할을 해줄 스무드한 유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뜬금없이 태어난 애드리브는 없습니다. 쪽대본은 없던 현장이라 미리 대본을 받은 뒤 유머가 들어갈 만한 자리를 표시했습니다. 그때마다 감독님에게 미리 즉흥적으로 만든 유머를 보여드리고 오케이가 나면 써먹었습니다. 가령 김 대리가 “향수냄새 맡아볼래?” 하며 손목을 내밀다 딱밤을 때리는 건 인물간의 관계도를 은근하게 보여줄 수 있는 장난입니다. 그 장난을 장그래(임시완)에게 할 때와 강 대리(오민석)에게 할 때 둘의 반응은 사뭇 다릅니다. 두 사람이 어떤 시간을 공유해왔는지,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지 그 한순간으로 짐작할 수 있는 겁니다.

<내부자들>로 윤태호 작가님과는 한번 더 만나게 되었습니다. <내부자들>에선 고 기자 역할로 출연하고 모든 촬영을 마쳤습니다. 고 기자는 야욕이 넘치는 인물입니다. 이번엔 기자들의 생활을 연구했습니다. 항상 들고다니는 노트엔 무엇이 적혀 있을까, 평소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고 어떤 단계를 밟아 위로 올라가는 걸까 궁금했습니다. 2월에 크랭크인할 <판도라>는 원자력발전소 폭발 이후를 다루는 재난영화입니다. 저는 발전소에 근무하는 기술자 역할로 참여합니다. 당장은 <뷰티 인사이드>를 촬영하고 있습니다. 주인공이지만 알다시피 20명 중 한 사람입니다. 영화를 여는 역할을 하게 돼 무척 기분이 좋습니다. 연초만 되면 올해는 무얼 할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일단 이번 한해는 보장된 셈이라 마음이 든든합니다. 내년에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꾸준하게 오래오래 연기할 수 있다면 그것이 제겐 행복일 것 같습니다.

김 대리의 포트폴리오

<미생> 9국에서 장그래 집에 다녀오는 길에 했던 대사가 기억납니다. 힘주어 말하지 않으면서 힘 있게 들리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당신 실패하지 않았어. 나도 지방대 나와서 취직하기 되게 힘들었거든? 그런데 합격하고 입사하고 나서 보니까 말이야, 성공이 아니라 그냥 문을 하나 연 것 같은 느낌이더라고. 어쩌면 우린 성공과 실패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 다가오는 문만 열어가면서 살아가는 게 아닐까 싶어.” 참 좋은 말입니다.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