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형제여, 그 물을
김혜리 2015-01-08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매년 12월이면 이삭줍기에 바쁘다. 게을러서 제때를 놓친 주요 영화를 해 바뀌기 전에 보려는 노력인데 말하나마나 중과부적이다. 올해의 가장 굵은 이삭은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였다. 스웨덴판 <렛미인> 이후 가장 아름다운 뱀파이어 영화, 올해의 제일 개성적인 코미디, 도시를 감식하는 고수의 안목, 덤으로 따라붙은 가장 멋진 소파와 최고의 디저트. 결정적으로 듀이 십진분류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독서광 이브(틸다 스윈튼)의 장서 더미는 <행복한 사전>의 편집실, <인터스텔라>의 블랙홀 서가와 더불어 온 세상 애서가를 황홀하게 만들 이미지다. 여기서 더 바라면 도둑이다.

12/05

리들리 스콧 감독의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은, 감독 자신이 별로 믿지 않는 이야기를- 정확히 말하면 그다지 개의치 않는 스토리를- 어쨌거나 장대하게 찍는 방법의 시범으로 보인다. 이 영화는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히브리의 신이 옳은지 그른지, 애초에 신이 있긴 한지 모세가 환각을 본 것인지 명시하지 않는다. 이집트에 닥친 대재앙을 과학으로 설명 가능한 자연재해로 보여주는 데에 주력하긴 했다. 홍해가 갈라지는 유명한 기적도 운석이 떨어져 생긴 기상이변과 ‘대규모 썰물’로 수위를 조절했다. 그러나 이집트 모든 가정의 맏아이들이 동시에 숨지는 이변만큼은 합리적으로 해명하지 않는 바람에 이도 저도 아닌 형국이 돼버렸다. 캐릭터의 궤적도 제대로 매듭지어지지 않는다. 파라오의 어머니 투야(시고니 위버), 히브리 원로 눈(벤 킹슬리), 여호수아(애런 폴)는 뭔가 해보려다가 그냥 퇴장해버린다. 제작진 인터뷰에 따르면 최초 편집본이 4시간을 넘겼고 블루레이에 포함될 삭제 장면만 25분가량이라고 하니 대략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편집을 포함해 이번 영화에서 리들리 스콧 감독은 한손을 뒤로 묶은 검투사처럼 듬성듬성 칼질을 한다.

소재에 대해 대략 무심한 포즈를 취한 이 영화에서, 감독의 열의가 유독 불거지는 대목은 파라오 람세스 2세에 관한 묘사다. 게다가 엔딩 크레딧 끝에 떠오른 “이 영화를 토니 스콧에게 바친다”는 헌사는 자연히 극중 람세스(조엘 에저턴)와 모세(크리스천 베일)의 관계를 곱씹게 떠민다(리들리 스콧의 동생 토니 스콧 감독은 2012년 자살로 타계했다). 우선 람세스와 모세의 모델은 감독의 전작 <글래디에이터>에 있다. 둘의 관계는 코모두스(와킨 피닉스)와 막시무스(러셀 크로) 구도를 반복한다(두 영화의 작가들은 겹치지 않으며 리들리 스콧의 이름은 각본 크레딧에 없다). 왕위 계승권자인 코모두스와 람세스는 부왕에게 친아들보다 두터운 신망을 산 막시무스와 모세를 깊이 질투한다. 괴벽스럽게도, 그들은 왕위에 올라 일국의 병력을 손에 쥔 만인지상의 존재가 된 다음에도 반드시 일대일 결투로 승부를 보려고 한다. 실제로 인물들이 극중에서 함께 자랐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이 집요한 원초적 경쟁심이 거꾸로 두 인물을 ‘형제적’ 관계로 바라보게 만든다. 형제가 아니고서야 이렇게까지!

<글래디에이터>의 코모두스와 막시무스가 루실라 공주를 중간에 둔 찌그러진 삼각형을 이루었다면,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의 람세스와 모세는 서로를 친척으로 알고 우애 깊게 성장한 사이다. 그런데 코모두스를 복잡해도 확고한 악당으로 그렸던 리들리 스콧이 람세스 앞에서는 머뭇거린다. 아니, 람세스 자체가 모세에 대해 러닝타임 2시간이 넘도록 갈팡질팡한다. 모세를 구석에 몰아넣고도 명줄은 끊지 않는가 하면, 유배 보내면서 칼을 슬쩍 넣어주기도 한다. 뭘까? 그는 아마도 자신이 품은 증오의 동기가 낯부끄럽다고 의식해 모세를 향한 미움을 부정하는 듯하다. 게다가 람세스는 모세가 히브리 혈통이라는 고발에 모세만큼이나 거부감을 느낀다. 모세가 형제가 아니라는 증거에 대한 반발이다. 가는 액션이 애매하니 모세의 오는 액션도 불확정적일 수밖에 없다. 귀양지에서 자객에게 습격당한 모세는 비로소 형제의 연이 종지부를 찍었다고 판단하지만, 나중에 관객은 “내가 안 그랬어. 엄마가 그런 거야”라는 람세스의 변명을 듣고 다시 긴가민가 헷갈린다. 한편 모세를 내놓으라며 숱한 히브리인을 목매단 람세스는 막상 궁에 잠입한 모세와 독대하자 어째 미온적으로 행동한다. 딱히 영화의 재미에도 밀도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이 기나긴 망설임은 어디서 왔을까? 이 주저는 캐릭터의 것일까, 연출자의 것일까.

드디어 더이상 미룰 수 없는 피날레가 온다. 장남을 잃은 분노로, 전차 부대를 이끌고 귀향길에 오른 히브리인들을 추격하러 나선 람세스는 이제 증오를 실천하기로 작심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예상대로 각자의 무리 속에서 홀로 떨어져나온 모세와 람세스는 얕은 바다에 발목을 담그고 프레임 양쪽에서 대치한다. 모세는 수세적 자세로 꼼짝하지 않고 람세스는 곧 선공할 듯 다가온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여전히 다른 선택이 충분히 개입할 거리가 남아 있다. 여기까지 와놓고 리들리 스콧은 ‘형제’가 결국 어떻게 능동적으로 애증을 해결하는지 보지 않는다. 관객에게도 보여주지 않는다. 형제의 칼끝이 서로의 몸에 닿기 전에 집채만 한 파도가 두 남자를 삼킨다. 오랜 세월 관계의 답을 고민한 끝에 간신히 결론을 제출하려던 즈음 신은 예고도 없이 타임아웃을 선고하고 커튼을 내려버리는 것이다. 허무하고 미진하다. 고작 이 애석한 미해결의 감정에 닿자고 여태? 반문했다가 나는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리들리 스콧 감독이 절감하는 형제의 역사 아닐까? 모세와 람세스는 (놀랍게도) 쓰나미에서 살아남지만, 훌훌 넘어가는 영화의 나머지는 덧댄 에필로그처럼 보인다. 파도가 덮친 순간 감독의 영화는 끝났다. 내 가설은 단순무식하다. 구약이 버티고 있으니 모세는 홍해에서 죽을 수 없는데 영화는 차마 형제 중 람세스만 죽일 수 없었다. 물론 나는 스콧 형제의 사정을 전혀 알지 못하며 독심술도 못한다. 모세와 람세스를 리들리, 토니 스콧에게 곧장 줄긋기하는 만용을 부릴 뜻은 더군다나 없다. 나는 다만 이 불균질한 대작이 다른 요소를 희생하면서까지 기어코 그려내려고 고집을 부린 관계와 이미지에 자꾸 신경이 쓰인다.

12/06

조엘 에저턴이 스모키 메이크업의 압박을 뚫고 섬세하게 연기하는 람세스 2세는, 아내보다 더 오래 아이를 품에 안고 재우는 정 많은 아버지다. 람세스가 부왕에게 목말랐던 애정을, 아들을 향한 넘치는 사랑으로 해소한다는 설정은 여러 번 각인된다. 그리고 이 복선은 람세스가 어린 아들의 시신에 입 맞추며 “네가 잘 자는 건 사랑받기 때문이란다”라며 영면을 기원하는 입관 장면에 이르러, 오직 이 순간을 위해 정성껏 쌓아올려진 ‘층계’였던 것으로 판명된다. 이 영결의 광경은 다음 시퀀스에 이어지는 파라오의 진노를 설명하는 원인이라기보다 그 자체가 목표이고 절정이다. 나는 문득 영화가 이집트에 닥친 10대 재앙 중 이 죽음의 맥락만 예외적으로 인과를 해명하지 않고 신의 영역에 내버려뒀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했다.

<패딩턴>

좋아요

아빠의 응원

지진으로 하루아침에 페루 밀림의 아늑한 집을 잃고 영국행 화물선에 밀항한 패딩턴(벤 위쇼)은 기차역에서 “이 곰을 돌봐주세요”라고 쓴 꼬리표를 목에 걸고, 새로운 가족이 손 내밀어주길 하염없이 기다린다. 2차대전 피난길에서 그랬듯, 런던 시민들이 연고 없는 미성년자를 따뜻이 거둬줄 거라는 낙천적 믿음으로. 그리고 정말 한 가족이 호의를 베푼다. 하룻밤 유할 곳을 얻은 패딩턴이 택시 차창으로 런던 거리를 내다볼 때 대로변 카페에서 눈길을 맞추며 와인 잔을 슬쩍 들어보이는 희끗한 신사가 있으니 바로 <패딩턴>의 원작자 마이클 본드다. 문장과 삽화에서 빠져나와 영화 속 세계에서 처음 여행을 시작하는 ‘내 아이’에게 건네는 응원인 셈이다. 저자 본드는 축복을 보내지만 이 우주는 자신의 소관이 아님을 명백히 하듯이, 사랑하는 곰에게 손을 내밀지도 말을 걸지도 않는다. 미소만 지으며 스쳐간다. 딱 좋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