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영화로 퍼즐을 맞추어보자. <타락천사>에서 하지무(금성무)의 집은 홍콩의 슬럼화된 거주지로 유명한 ‘청킹맨션’이다. 이곳에서 그의 아버지는 밀려드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상대로 숙박시설을 운영한다. 영어 제목부터 ‘청킹 익스프레스’인 <중경삼림>의 무대는 청킹맨션 1층의 패스트푸드 가게다. 금성무가 연기한 경찰223은 이곳에서 우연히 마주친 여자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녀는 청킹맨션의 외국인 노동자를 착취해 마약을 밀매한다. <첨밀밀>의 이요(장만옥)도 패스트푸드 가게에서 일한다. 그녀는 중국 본토에서 홍콩으로 돈을 벌려고 건너온 촌뜨기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번 돈으로 증권 투자와 환투기 시장에 입문한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는 즈음 그녀가 고향에 돌아가게 되었을 때, 한 부유한 중국인 여성은 이렇게 말한다. “요즘엔 다들 중국으로 돌아가려고 난리지. 돈 벌 기회는 그곳에 다 있으니까.” 또 다른 영화 <2046>은 홍콩 반환 50년 후가 배경이다. 쓰라린 상처를 입은 홍콩인들은 ‘2046’이라는 고속열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는데, 이 기차 안에서 지난 기억들을 모두 망각하고 다시는 홍콩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우산 운동 이후 홍콩 민주주의가 위기를 맞았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홍콩에는 되찾을 민주주의가 없다. 홍콩은 민주주의를 경험해본 적이 없는 도시다. 영국식민지 시절에도, 일본 점령 기간에도 시민들에게는 제대로 된 투표권이 없었다. 그래서 최근의 자치 요구에서는 “중국의 통치만큼은 거부한다”는 특수한 의미가 읽힌다. 이 운동의 기저에는 근본적으로 체제의 위기를 넘어선 멸종의 공포가 깔려 있는 것이다. 어느 나라 사람이냐는 질문에 한결같이 “홍콩인”이라고 대답하는 시민들의 자존감은 물리적인 토대를 잃었다. 도시는 중국에서 유입된 대자본과 값싼 노동력에 점령당한 지 오래다. 그래서 ‘민주주의’라는 구호는 우파의 민족 분리주의와 좌파의 반자본주의 사이의 타협안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80년대 후반 한국의 시민운동과 비슷한 상황이다. 실제로 전선이 통제를 벗어나 확대되려는 조짐이 보일 때마다 홍콩의 시위대는 “민주주의만을 위해 싸우자”는 구호를 외쳐왔다.
자본과 외세를 하나의 적으로 뭉뚱그린 홍콩의 운동은 언젠가 간단한 질문들에 대답해야만 하는 갈림길에 도달할 것이다. 도시의 부와 부동산을 과점한 광둥인 자본가들은 그들의 아군인가, 적인가? 도시의 생활여건을 악화시키는 가난한 외국인 노동자들은? 중국의 통치가 안정화되어 더 큰 번영을 가져다주고, 투표를 통해 다수 시민이 안락한 중국 체제에 편입하기를 원하는 날이 온다면, 그들이 쟁취하려는 민주주의는 무엇을 뜻하는가? 이 대목에서 우리가 선배로서 홍콩과 대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미 지난 대선에서 민주적 투표를 통해 민주주의 이전으로의 회귀를 선택한 경험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