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예사롭지 않던 소년은 어느새 남자의 모습으로 성큼 다가와 있었다. 데뷔작 <화이트 크리스마스>(2011)와 <신사의 품격>(2012), <학교 2013>(2012), <상속자들>(2013) 등 일련의 TV드라마에서 김우빈은 방황하는 소년이었다. 상처를 어떻게 보듬어야 할지 몰라 과격하게 부딪치기만 하는 어린 짐승 같았다. 김우빈의 영화 데뷔작은 곽경택 감독의 <친구2>(2013)다. 10여년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은 김우빈은 순식간에 스물여덟의 어른 남자가 되어 나타났고, <친구2>를 딛고서야 비로소 성인 배우로 안착했다. 포마드왁스로 깔끔하게 올린 헤어, 매끈한 몸에 딱 맞는 슬림슈트, 그리고 여유만만한 미소로 완성되는 “까리함”이 이젠 김우빈의 트레이드마크로 새겨졌다. 광고주들은 그의 매력을 앞다퉈 찍고 싶어 했다. “당신 남자친구는 나보다 멋있어질 수 있어. 데리고 와.” 모 뷰티브랜드 광고에서 그가 건네는 멘트는 많은 남녀를 좌절하게 했다. 이미 김우빈처럼은 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12월24일 크리스마스이브, 마침내 김우빈의 “까리함”을 정점에서 보여줄 영화가 온다. 제목마저 능수능란한 <기술자들>이다. 혹여나 그의 빈틈을 발견할 수 있을까, 조금 기대하며 그 ‘남자의 얼굴’을 가까이 들여다봤다.
“신은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자에게만 시련을 준다.” 한때 김우빈의 자기소개서 첫 문장을 장식했던 말이다.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김우빈 역시 ‘이겨낸 자’다. “누구도 확신하지 않았던 모델에 대한 꿈을 키운 중학교 시절부터, 그는 매일 규칙적으로 계란 30개와 닭가슴살을 먹고, 친구들이 공부할 시간에 운동을 하며 무섭게 자신을 단련해온 사람”(<씨네21> 900호)이다. 처음엔 연기도 모델 일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시작했지만 지금은 진지하게 배우의 길을 걷고 있다. 불과 한두해 만에 김우빈은 “욕심도 책임감도” 남다르게 느끼게 됐다. “처음엔 안 그랬는데 지금은 자꾸 뭔가 더 하려고 한다. 아쉬움을 최소화해야 모두에게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의견도 점점 적극적으로 내려고 한다. 현장 스탭들은 당연히 피곤할 테니까 다시 (테이크를) 가고 싶다고 얘기하기가 어려울 때도 있다. 여러 상황을 고려해 감독님이 오케이해도 나로선 모니터링할 때 속상한 순간이 생기더라. 나중에 편집하게 되더라도 일단은 쏟아내고 싶은 것 같다.”
드라마 <상속자들>과 영화 <친구2>에서 선 굵은 캐릭터로 한방씩 날리고, 현재 김우빈은 잠시 휴식 중이다. 아니, 겉으로 보기엔 휴식이지만 사실 휴식이 아니다. “작품에서 보이지 않으니 다들 쉬고 있는 줄 안다. (웃음) 그런데 정작 난 거의 쉰 적이 없다.” 작품을 하지 않을 때에도 대중은 십수편의 광고를 통해 끊임없이 김우빈을 지켜봐왔고, 김우빈으로서도 신작 <스물> 촬영을 끝낸 지 아직 한달이 채 되지 않았다. “일주일만 딱 쉬고” 바로 크리스마스 전야 개봉을 앞둔 <기술자들> 홍보 일정에 뛰어들었다. “작품으로 하는 정식 인터뷰가 오랜만이라” 긴장이 덜 풀렸는지 김우빈은 “생각하고 있는 걸 말로 꺼내기가 오늘따라 유난히 어렵다”고 다섯번이나 연거푸 말했다.
김우빈 본래의 스타일리시함을 담다
김홍선 감독의 <기술자들>은 인천 세관에 숨겨진 1500억원을 40분 안에 빼돌리려는 도둑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김우빈은 금고털이 전문 설계자 지혁을 연기한다. 아마도 김우빈의 근사한 모습을 최고치로 보여줄 영화일 거다. 시나리오에도 지혁은 ‘주눅 들지 않고’, ‘자신만만한 미소로’ 등의 수식어가 자주 따라붙는 “스타일리시한” 캐릭터다. 감독은 “지금까지 우빈이의 출연작에서 우빈이가 캐릭터에 자신을 맞춰갔다면, 나는 그걸 뒤집어 본래의 김우빈이 가장 잘 살아날 캐릭터를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김우빈이 패션모델 출신의 배우임을 고려한다면, 캐릭터의 성격뿐만 아니라 외양에 있어서도 나름의 바이오그래피를 만들어보려 했을 것 같다는 기대를 가질 수도 있다. “나는 <기술자들> 전까지 내가 카메라 앞에서 멋있어 보여야 한다는 생각을 단 한번도 한 적이 없다. 어떤 표정을 지으면 어떤 얼굴이 나오겠다는 마음은 광고 촬영을 할 때뿐이었고 연기할 땐 완전히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번엔 달라야 했다. 현장에서 감독은 김우빈에게 “<기술자들>은 스타일리시한 영화”라고 수시로 강조했다. “어쩌면 우빈이가 현장에서 내가 배우들을 많이 괴롭혔다고 했을지 모르겠다. (웃음)” 감독의 말대로 김우빈의 개인 스타일리스트까지 합류해 캐릭터를 만들어나간 현장이었다. “스타일리시한 영화에선 내가 어떻게 나와야 할까 한참 생각했다. 촬영 중에 머리카락 한올이라도 내려올라치면 바로 감독님의 ‘컷’이 날아왔다. 연기할 때 내 얼굴의 각도에 대해 처음으로 신경 써보고, 시선을 어디에 둬야 가장 멋스럽게 나올지 고민한 영화다.”
묘한 위압감을 주는 외모만 보고는 쉽게 떠올릴 수 없지만 의외로 김우빈은 정직한 방식으로 캐릭터를 만드는 우직한 배우다. “현장에 올 때 항상 엄청나게 준비를 해온다”는 감독의 말대로다. “그래도 혼자 집에서 분석할 때랑 현장에 가서 실제로 부딪칠 때는 많이 다르기 때문에 마음을 좀 열어둬야 한다. 너무 확실한 걸 만들어두면 가서 잘 못 움직이겠더라.” 이번에도 김우빈은 성실하게 지혁의 “캐릭터 일대기”와 “지혁에 관한 백문백답”을 적어나갔다. 연기 스승인 배우 문원주로부터 배운 캐릭터 접근법이다. 몇 차례의 작품을 거치는 동안 김우빈은 “캐릭터 일대기”의 덕을 톡톡히 봤다. 이미 “작품에 임할 때의 자신과의 약속”이란다. “처음 문원주 선생님께 배울 땐 굳이 이걸 다 해야 하나 싶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도움이 많이 된다는 걸 알아간다. 큰 그림은 직접 적어놓지만 디테일은 상상으로 만들어간다.”
김우빈은 평소 “집에 가만히 있는 시간이 많아서” 캐릭터에 관한 상상을 꼼꼼하게 한다. 하나부터 열까지 완벽하고 치밀하게 작전을 짜는 지혁의 일상은 “아마도 종종 헷갈리고, 가끔 허술했을” 거라고 김우빈은 말했다. “‘지혁이 구인이 형(고창석)을 처음 만난 날은 몇시였고, 어디였고, 형이 나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했을 거다.’ 내가 이렇게 대답하면 형은 날 보고 웃는다. 이런 식으로 지혁의 하루하루를 만들며 시간을 보냈다. 관객의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연기하는 입장에선 그렇게 만든 캐릭터가 조금 더 진실 같다. 상상하는 만큼 내 것이 된다.” <친구2>의 ‘성훈’을 준비할 때는 “시비에도 많이 얽히며 거칠게 지냈을” 정도로 역에 몰입했다. 평소에 그 캐릭터처럼 지내지 않으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단다.
다시 ‘소년’을 꺼내놓을 영화 <스물>
촬영용 조명이 꺼지고, 카메라를 치운 뒤에 보는 김우빈의 얼굴은 예상외로 부드럽다. 손도 작았다. 슬그머니 손을 뒤로 빼며 “손 작은 게 쑥스러워서 일부러 잘 안 보여주려고 한다”고 말하는 표정에선 ‘소녀감성’까지 느껴진다. 함께 연기한 배우 고창석에게 “수시로 사랑한다는 문자를 보낼” 정도로 다정한 면모도 있다. “난 좀 사람을 좋아한다. 좋아한다는 표현을 굳이 감춰야 하는지 모르겠다. 창석 형님은 워낙 팬이었기 때문에 이번에 함께하게 돼 무척 기뻤다.” 할 말은 하면서 기죽지 않는, ‘당하는 역할’은 상상할 수 없는 김우빈의 카메라 밖 모습이 의외다. 한동안 치호가 되었기 때문일까.
후반작업 중인 차기작 <스물>의 스무살 청년 치호는 다시 김우빈의 ‘소년’을 꺼내놓을 캐릭터다. 하지만 전작들에서 만난 뾰족한 소년이기보다 열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미숙한 소년에 가깝다. “원래는 계획에 없던 작품이었다. 우연한 기회로 시나리오를 휴대폰에 받아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한번 읽자마자 꼭 하겠다고 했다. 재미있겠더라.” 첫째로, 재밌어야 할 것. 둘째로 내 삶에 가까워질 수 있는 포인트가 있을 것. 김우빈이 시나리오를 볼 때의 원칙이다. 치호는 두 가지 원칙에 꼭 맞는 캐릭터였다. ‘멋진 김우빈’을 드러내는 <기술자들>과는 정반대 지점에서 “기분 좋으면 까불기도 하는” 김우빈의 다른 일상이 담겼다. “한 작품, 한 작품씩 하면서 조금씩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일단 관객에게 배우 김우빈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드리고 싶다. 일단 그것부터 생각하려 한다.” 근사한 어른 남자에서 다시 스무살 청년으로 돌아갈 김우빈의 얼굴은 또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기술자들>로 ‘남자 친구보다도 까리한’ 김우빈을 한번 더 만난 뒤에 상상해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