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의 순간>은 박찬욱, 봉준호, 류승완, 변영주, 임순례 등 한국 영화감독 17인의 데뷔기를 인터뷰해 묶은 책이다. 읽다보면, 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한국영화계가 하나의 흐름으로 꿰인다. 자기 영화가 아니라 주어진 시나리오로 데뷔를 한 것이 지금도 썩 내키지 않는다는 말(<동갑내기 과외하기> 김경형), 영화와 확실히 닮아 있는 거칠었던 학창 시절에 대한 입담(<똥파리> 양익준), 임권택 연출부-조감독 시절에 대한 회고담(<번지점프를 하다> 김대승), 김기덕 연출부-조감독 시절에 대한 증언(<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 장철수), 지금 보면 믿기지는 않지만 온통 공모전에서 떨어진 사연(<범죄의 재구성> 최동훈 감독) 등이 그득하다. 그러니까 이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했다는 무용담이다. 자기 재능을 믿고 자신만만한 사연은 없다. 대체로 우연히 영화 언저리 혹은 관련자와 친분이 생겼고, 하다보니 관심이 깊어졌고, 안 되는 와중에 좌절하지 않고 멈추지 않았을 뿐이라는 식이다. 스스로 말하고 있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재능의 차이(끈기를 포함하는),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회적으로나 영화계로나 좋은 시대를 만난 행운이야말로 이들의 인터뷰를 오늘 우리가 읽게 된 이유일 것이다. 봉준호 감독의 <플란다스의 개> 연출부 중에는 15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입봉을 못하고도 버티는 분도 있다고 하니까.
<데뷔의 순간>을 읽으며 지금은 없는 방식의 영화 현장기에 놀라기도 했고 어쨌든 기득권을 얻은 이들의 낭만적 회고담 같다는 인상에 한숨짓기도 했지만, 이 사람들이 최선을 다해 달렸던 시간에 대해 듣고 있기란 무척 행복한 일이다. 시스템의 혜택이 없던 시절에 맨몸으로 돌파한 경험, 어쩌면 이제는 다시 보기 어려울 한국영화의 아름다웠던 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