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대 출신이면 뭐하나. 하는 일마다 족족 실패다. 심지어 지금은 하는 일도 없는 백수 아빠에 무능 남편이다. <아빠를 빌려드립니다>에서 김상경은 집안의 근심 덩어리인 가장 채태만이 되었다. 고집스레 현장을 누비던 형사(<살인의 추억> <몽타주>)나 의사, 검사, 재벌 2세 같은 번듯한 캐릭터를 익숙하게 소화해온 김상경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김상경은 태만이라는 낯선 인물로 어떤 변화를 시도한 걸까.
-전작인 <몽타주>와 비교해도 전혀 다른 장르와 캐릭터다. 어떤 면에 끌려 출연을 결심했나. =일단 시나리오가 재밌었다. ‘아빠를 빌려준다’는 설정도 충분히 개연성 있어 보였다. 심부름센터나 흥신소도 많잖나. 무엇보다 내가 안 해본 캐릭터였다는 게 컸다. 어떻게 보면 <몽타주>까지는 내가 해온 틀 안에 있는 편이었다. 근데 이건 전혀 해본 적 없는 거라 흥미로웠다.
-그간 해보지 않았다는 건 구체적으로 어떤 건가. =코믹. 요즘 촬영 중인 드라마 <가족끼리 왜 이래>에도 코믹 요소가 있지만 순서상 <아빠를 빌려드립니다>를 먼저 찍었다. 그동안은 역할상 표정을 지어도 울거나 분노하거나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게 많았는데 이번에는 바보스러운 표정도 자유롭게 지어봤다. 내가 이렇게까지 유연하게 다양한 표정을 지은 적이 있었나 싶었다. 나조차 내가 궁금해지더라. 내가 안 해온 작품 안에서 내가 어디까지 표현할 수 있을지, (그런 내 모습을) 관객은 어디까지 받아들일지.
-지질한 아빠이자 10년째 백수인 남편 채태만을 표현하기 위해 특별히 신경 쓴 부분이 있다면. =능력 있던 친구가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몇번의 사업 실패를 경험하면서 능력이 없어졌다. 당연히 코너에 몰리지 않았겠나. 그렇다면 어떻게든 생활의 태도에 변화가 생겼을 거다. 아내 눈치 보는 것도 점점 심해졌을 테고. 10년간 태만이 변해왔을 모습을 생각했봤다. 인물의 변화된 디테일을 잡아내는 게 배우에게는 중요하니까.
-극중에서 딸 아영(최다인)과는 허물없는 친구처럼 보였다. 몇몇 장면에서는 딸보다도 철이 없더라. 실생활에서 아빠 김상경은 어떤가. =실제로도 다섯살 난 아들과 그렇게 장난치며 지낸다. 영화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서로 표현도 많이 한다. 혼자서 놀던 아들이 한참 뒤 대뜸 “아빠!” 하고 부르더니 “사랑해”라고 말하더라. 우리 부부가 말로 표현을 많이 해서 그런지 아이도 그렇다.
-지난해 11월11일에 크랭크업하고 올해 개봉(11월20일)하기까지 1년이 조금 넘게 시간이 흘렀다. 혹시 그사이에 완성된 영화를 봤나. =안 봤다. 과거에 편집실에 자주 가는 선배들이 있었다. 편집 과정에 배우의 터치가 들어가는 거지. 그게 싫어 나는 시사 때 영화를 처음 본다. 현장에서도 모니터를 거의 보지 않는다. 연기할 때마다 모니터 확인하며 “한번 다시 갈게요” 하게 되는 순간, 배우는 (관객에게) 사랑받을 거라고 생각하는 자신의 표정을 찾아가게 된다. 반면 그런 거 신경 안 쓰고 찍고 나서 편집된 걸 보면 내 육체, 내 음성을 썼는데도 전혀 다른 나를 보게 된다. 그게 정말 멋지다. 내가 모르는 나의 모습을 보는 쾌감이랄까.
-그런 면에서 코믹적 요소가 짙은 가족물 <아빠를 빌려드립니다>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려고 한 건 나름 의미가 있겠다. 드라마, 범죄 스릴러물에 비해 정통 멜로, 액션, 코믹 같은 장르적 시도는 드물지 않았나. =내게 온 시나리오 중 진지한 쪽이 80%라면 10~20%가 코믹한 쪽이었다. 코믹물을 받고도 하지 않은 것은 시나리오가 마음에 안 들어서였다. 물론 장르는 안 가린다. 요즘 영화계에 40대 멜로가 부족해 보이는데 이젠 그 나이대에 ‘싱글’이나 ‘돌싱’이 많으니 꼭 불륜으로 가지 않더라도 보여줄 수 있는 게 더 있지 않을까. 그런 거 하라면 잘할 것 같다. 나 멜로 잘하는데…. (하하하하)
-내년 1월 중에 <살인의뢰>가 개봉하고 2월까지는 <가족끼리 왜 이래> 촬영을 계속하는 걸로 안다. 그 뒤에는 또 어떤 시도를 이어가고 싶나. =일단은 조금 쉬고. 하지만 한두달 놀고 나면 일이 굉장히 하고 싶어질 거라 오래 쉬진 않을 거다. 주인공 할 날도 얼마 안 남았고. (웃음) 언젠가 홍상수 감독이 “너 왜 이렇게 작품을 많이 해?”라고 해서 되물었다. “감독님은 왜 그렇게 빨리 찍어요? (웃음)” 홍 감독님이나 나나 이젠 작품에서 빠져나오는 데 걸리는 시간이 많이 줄었다. 나이든 배우의 특징 아니겠나. 경험이 주는 힘이기도 하고 굉장히 유연해졌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좋은 영화가 오길, 무언가 (새로운 게) 있길 바라고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