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근(설경구)은 단역만 전전하는 만년 무명배우지만 아들에게는 자랑스러운 아버지다. 어느 날 그는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회담 리허설을 위해 김일성의 대역으로 뽑힌다. 결국 회담은 무산되지만 성근은 동작 하나까지 완벽하게 몰입해 들어간 탓에 자신이 김일성이라는 착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20년 후 아들 태식(박해일)은 집을 팔아 빚을 청산하기 위해 그동안 원망해왔던 아버지를 요양원에서 재개발 예정인 옛집으로 모셔온다.
“이 세상은 하나의 무대다. 모든 인간은 맡은 역할을 위해 들락날락하는 배우에 지나지 않는다.” 셰익스피어가 희극 <뜻대로 하세요>에서 우울한 주변인 제이퀴즈의 입을 빌려 삶과 연기의 본질을 짚었다면, 이해준 감독은 배우 설경구의 육체를 빌려 인생이란 이름의 연극이 완성되는 순간을 그린다. 각자가 인생의 주연인 이상 다양한 배역이 있을지언정 하찮은 역할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연극의 성패는 어떤 역할을 맡을 것인가가 아니라 오직 ‘누가 관객이 되어줄 것인가’에 달렸다.
<나의 독재자>는 배역에 잡아먹힌 한 배우가 아버지라는 이름의 배역으로 다시 태어나는 이야기를 담았다. 전작 <천하장사 마돈나> <김씨 표류기>와 마찬가지로 감독은 기발한 설정을 활용해 바깥으로 밀려난 인물들로부터 보편적인 드라마를 이끌어낸다. 이야기꾼으로서 이해준 감독의 최대 장기는 사건, 소품의 사소한 부분에까지 의미를 부여해 씨줄, 날줄을 촘촘히 엮어가는 논리적 구성에 있다. ‘말이 되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폭력적인 시대의 자화상에서부터 부자지간의 정, 예술이 무엇인지에 대한 나름의 답까지 다양한 메시지를 담아낸다. 반면 지나치게 의식화된 의미부여와 수학공식처럼 한치 흐트러짐 없는 도식적인 전개는 영화의 생기를 떨어뜨린다.
“남북정상회담 전에 실제 같은 리허설이 있었다”는 한줄 기사에서 뽑아낸 상상력을 현실에 뿌리내리게 하는 건 이야기를 꽉 채우고 있는 디테일이다. 1970년대와 90년대, 두 시대를 완벽히 재현해낸 소품과 거리 풍경은 비현실적인 이야기에 생생한 숨결을 부여하고 배우들의 호연이 영화에 피와 살을 돌게 한다. 여러모로 뚜렷한 장단점이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는 영화다. 가령 다소 연극적인 상황과 구성은 영화의 자연스런 흐름에 걸림돌인 한편 배우 설경구가 자신의 장기를 발휘할 좋은 무대가 된다. 잘 짜여진 이야기만큼 아쉬움도 크지만 끝내 자신을 보아줄 단 한명의 관객을 위한 마지막 무대만큼은 가슴을 울리는 한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