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를 보러 갔다. 보트를 타고 먼 바다를 향해 두 시간을 달린 다음 10분 동안 고래 한 마리의 등판과 아주 멀리서 점프하는 고래 두 마리를 보고, 다시 한 시간을 달려 항구로 돌아왔다. 고래란 원래 그렇게 허무한 법이지, 그런 거야, 집에 앉아 <고래사냥>을 봐도 고래는 나오지 않아. 그런데 갈 때는 두 시간이었던 거리가 올 때는 어떻게 한 시간이 되었을까. 보트가 폭주하면 그렇게 된다. 그리고 폭주하는 보트는 파도를 가르며 앞으로 달리는 동시에 파도를 타며 위로 솟았다가 아래로 떨어지고… 나는 허리가 나갔다…. 그해 내 나이 서른하나, 고래가 보고 싶다면 한살이라도 어릴 때 보도록 하자.
<캡틴 필립스>를 보면서 왠지 짠하다 싶었더니 고래 관광의 추억이 생각나서였다. 신체에 뼈와 가죽만 존재하는 해적 네명이(그중 한명은 별명이 ‘갈비씨’인데, 넷이 모여 있으면 누가 갈비씨라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모터 단 조각배를 타고 달리는데, 내가 다 허리가 아팠다. 나는 방석(…과 허리를 감싼 든든한 지방층…)이라도 있었지 쟤들은 저 충격을 몽땅 척추로 받겠구나. 납치돼서 두들겨 맞는 건 캡틴 필립스인데 난 왜 쟤들이 안된 걸까, 이럼 안 되는데.
소말리아 해적들은 물주가 따로 있어 AK-47과 기관총, 로켓포로 무장하고 배에는 GPS와 레이더 등을 설치한다고 한다. 근데 <캡틴 필립스>에 나온 애들은 도대체 누구를 물주로 잡은 건지 가진 거라곤 총 몇 자루에다 모터가 전부. 신참은 신발도 없다. 한번 나가면 드는 돈이 초기 비용 제하고 하루에 5천달러라는데 캡틴 필립스는 남의 속도 모르고 자꾸만 3만달러 줄 테니까 집에 가래. 처음엔 여덟명이 출동했지만 배 한대가 고장 나서 달랑 네명이 선박을 납치하려다 실패, 구명정 타고 통, 통, 통 캡틴 필립스 데리고 도망가는데, 군함 네척에다가 헬기 타고 온 네이비실까지 떠서 다구리를 당하지. 거기다 캡틴 필립스는 거짓말하지 말라고 짜증내지만 얘네 원래 어부였다고.
눈물이 앞을 가렸다. 아덴만의 여명 작전을 생각하면 소말리아 해적들에게 이런 동정은 가당치도 않을 테지만, 미 해군 vs 소말리아 갈비씨 넷, 이건 좀 그렇잖아. 게다가 이 영화는 실화입니다. 그래서 나쁜 녀석들을 향한 동정을 거두고자 불굴의 해적, 천하에 운 좋은 철면피가 나오는 영화를, 시리즈 전편이 무료 VOD로 풀린 김에 다시 봤다. <캐리비안의 해적>이다.
캡틴 잭 스패로우로 말하자면 굶어 죽으라고 버려진 무인도가 밀주업자들의 물류 창고였던 관계로 사흘간 공짜 술을 마시다가(술은 몸과 마음의 완전식품♡) 그 사람들 배를 타고 편안하게 탈출한 희대의 행운아다. 배가 가라앉아도 항구 바로 앞까지 버티다가 가라앉고, 저주를 받아도 꼭 필요한 걸로 골라 받는다. 지금은 아니지만 옛날엔 착한 놈이었다니 세상만사 사필귀정이려나. 하지만 막상 영화가 끝나고 보면 그의 손에 남는 건 참새 눈물만큼도 없다. 애지중지하던 블랙펄호도, 세상이 끝날 때까지 영원한 선장으로 항해할 수 있는 기회도, 불로불사의 샘물도, 전부 남의 차지다. 배도 없는 캡틴, 직원은 없는데 사장, 그래도 너에겐 5편이 있다.
잭 스패로우 선장이 활약했던 18세기 초반 카리브해에서 해적들은 황금시대를 누렸다. 그만큼 아량도 컸다. 해적기의 해골 아래 그려진 뼈다귀 두개는 ‘죽거나 항복하라’는 뜻인데 다시 말하면 항복하면 죽이지는 않는다는 뜻이었다. 대신 무인도에 버리고 갈 수는 있어도. 그렇다고 후크 선장이 웬디에게 시켰던 것처럼 눈을 가리고 널빤지 끝까지 걸어가 바다로 뛰어들게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후크 선장, 못되고 무능한 해적의 대명사, 모든 꼬마의 적. 생각해보면 후크 선장도 참 안됐다. 명문가에서 태어나 이튼 스쿨을 다녔지만 좋은 학교 나와봤자 아무 쓸데없다는 세상의 밝은 면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낙오자로서, 그만한 손자도 볼 나이에 피터팬과 꼬맹이들에게 반말 얻어먹으며 구박받는 초라한 중년의 정수를 구현하고 있다. 슬프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이제 남 일 같지가 않다.
초라한 중년, 이라고 하니 <스타더스트>의 캡틴 셰익스피어가 떠오른다. 퇴직한 한국의 가장처럼 서글픈 후크와 다르게 셰익스피어는 하늘을 나는 해적선을 타고 부하도 제법 거느린 번듯한 선장이지만 숨겨야 할 치명적인 약점이 있으니, 여자 옷을 좋아한다, 그것도 주로 분홍색으로. 드레스를 입어볼 때면 행복해 보이긴 하는데, 들키면 얘기가 다르지. 마음껏 꾸밀 수 있는 여자 선장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해적: 바다로 간 산적>(이하 <해적>)의 여월(손예진)처럼 아이라인도 그리고.
그래, 혼돈의 여름이었다. 바다가 나오거나 도적이 나오거나 둘 다 나오는 <해적> <군도: 민란의 시대> <명량> 사이에서 길을 잃은 나를 붙잡아준 건 극장 가고 싶다고 징징거리는 초등학생 조카였다. 걔가 볼 수 있는 영화가 <해적>밖에 없었다. 그리고 해적보러 들어간 그곳에서 나는 웬일인지 고래를 만났다.
<해적>은 참으로 복잡다단하며 변화무쌍한 영화였다. 처음엔 제목 때문에 산적이 바다에 가서 해적 되는 영화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해적’과 ‘바다로 간 산적’이었구나 하려는 찰나, 고래를 잡으러 간다기에, 어머 저 고래 모비딕하고 눈이 닮았어, 설마 이경영이 에이허브로 둔갑하고 나오는 건 아니겠지, 두려움에 휩싸이려다가 말고, 고래가 점프만 안 했지 거의 사반세기 만에 <프리 윌리>를 다시 보는 착각에 빠졌는데, 가장 놀라운 건 아직도 영화가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래, 진정 혼돈의 여름이었다. 그래도 조카는 좋아했다. 이모, 저 영화 되게 웃겨. 웃기냐, 나도 웃기다.
해적이기 이전에 마도로스
해적이 침몰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두세 가지 행운
상대를 잘 골라야 인도네시아영화 <해적: 말라카 해안의 위협>은 부제를 눈여겨봐야 한다. ‘말라카 해’가 아니라 ‘말라카 해안’이다, 바다는 잠깐 나오다 말고 해안만 나온다. 뱃삯보단 버스비가 싸기 때문이랄까. 이 육지 영화에 나오는 해적 두목은 어릴 적부터 조숙한 깡패로서 온갖 흉악 범죄를 저질렀기에 동정의 여지가 없으나, 골라잡은 납치 대상을 보면 눈물나게 지지리 운도 없다. 그냥 재벌 2세 데려오면 되는 줄 알았는데, 재벌 2세 무술 실력이 <옹박>의 토니 자 저리 가라, 거기에 의형제가 인터폴, 최후의 일격으로 인터폴이 옛날 원수. 캡틴 스패로우도 울고 가겠다.
애인을 잘 둬야 <캐리비안의 해적: 망자의 함>과 <캐리비안의 해적: 세상의 끝에서>에 나오는 데비 존스는 애인을 잘못 만나 해적 선장에서 낙지가 되었고, <해적: 바다로 간 산적>의 여월은 애인(이 되고 싶은 남자)을 잘 만나 <프리 윌리>를 찍었다. 해적은 바다 아래로 가라앉는데 산적이 그걸 구하는 것이 이 영화 최대의 미스터리. 어찌되었든 해적도 사람의 일일진대 함께하는 파트너를 잘 만나야 만사형통을 이루는 법. 안 되면 친구의 애인이라도 잘 만나야 권력자의 딸과 인연을 맺은 잭 스패로우처럼 구사일생의 묘수를 찾을 수 있다.
물주를 잘 만나야 일선에서 뛰는 소말리아 해적 뒤에는 현지 군벌과 암거래상, 지역 유지 등을 포함하는 거대한 투자 커넥션이 있다. 인질을 데려다 두는 장소의 임대료와 그걸 눈감아 달라는 뇌물을 비롯한 거액의 가욋돈을 제외하고도, 한달 동안 인질극을 벌이는 데 필요한 비용은 대락 15만달러. 여기에다 습격에 사용하는 트롤선이 최고 5만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그런데 <캡틴 필립스>를 보면 얘네는 중소기업도 아니고 그냥 가내공장 정도 되는 것 같다. 막내가 신발만 신고 다녔어도 그토록 허무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을, 도중에 만나기로 한 중간 보스도 장비가 고장났다며 도망가버리고. 캡틴 스패로우 시절 이전부터 그랬듯이, 해적질도 자본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