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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권] 내가 넘어지더라도 현장은 넘어지면 안 된다

독립영화 제작 배급사 시네마달 김일권 대표

<야간비행>은 작품에 대한 평가 면에서 단연 고공비행 중이다. “만든 사람 입장에서야 아쉬운 것이 많지만 보는 분들이 하나같이 좋아해주셔서 부담을 느낄 정도로 감사한 마음이다.” <야간비행>을 제작한 독립영화 제작 배급사 시네마달의 김일권 대표는 그렇게 인터뷰의 운을 뗐다. 초반부 흥행은 아직 저공비행 중이지만 “작품에 대한 입소문이 퍼지고 있으니 더 좋아질 것 같다”고도 힘주어 말했다. <야간비행>은 교육 현실의 그릇됨과 성소수자 문제의 차별성에 대해 생각해볼 것을 청춘영화라는 분위기 안에서 호소하고 있다. 우리는 감독을 인터뷰한 데 이어(<씨네21> 969호), <야간비행>의 또 한명의 조종사인 제작자 김일권 역시 만나고 싶어졌다.

-영화에 대한 평들이 좋다. 반면에 극장 상황은 어떤가. =블록버스터 시즌이 끝나가는 시점에 개봉한 거라 그 시기를 피했던 작은 영화들이 많이 몰려 있다. 그런데 그 영화들이 상영될 수 있는 극장은 한정되어 있지 않나. 예상은 했지만 아주 좋은 상황은 아니다. 우리처럼 작은 영화들이 다 똑같이 처한 현실이다. 여전히 시스템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다. 작은 영화들이 상생해가면서 다양하고 폭넓게 살아남아야 하는데 오히려 더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제 살 깎아먹는 수준이 된 것 같아 안타깝다.

-해결은커녕 편차가 더 심해졌다. =그렇다, 심해졌다. 지난해에 한 외국영화가 1200개관 넘게 차지하자 난리가 나지 않았나. 그런데 올해는 한국 블록버스터영화들이 1500개관 넘게 걸렸다. 너무 편차가 심해졌다. 이 정도 되면 관객에게 영화를 선택할 기회를 주는 게 아니라 영화가 관객을 몰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블록버스터가 아닌 충무로의 영화들, 그리고 독립영화들은 고사 직전인 거다. 정책 차원에서 획기적인 발상 전환이 필요하다. 이렇게 산업적으로 극단화되는 것은 영화산업 측면에서도 위험하다. 관객의 향유권, 문화적 취향을 폭넓게 만들어주지 못한다면 갑자기 폭삭 망할 수도 있는 일이다. 시스템 내부의 자생기능이 필요한 거다. <야간비행>에 대해 관객이 많이 하는 질문이 이런 거다. “보고 싶어도 우리 동네에서는 상영을 안 하는데요, 어디 가서 봐야 하나요?”

-그런 상황 속에서도 <야간비행>을 알리려는 전략들이 있었을 텐데. =<후회하지 않아>로 형성된 이송희일 감독의 기존 팬들이 있다. 그분들은 능동적으로 잘 챙겨봐주실 거라고 생각했다. 요즘 분위기에서 학원물이라고 강조하는 건 십대들에 대한 죄스러움도 있고 해서 좀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전반적으로는 십대의 우정이라는 마케팅 차원에서 브로맨스를 강조했다. 지금은 영화와 배우 중심으로 알리고 있는 편이지만, 추석 지나고 나면 본격적으로 교육감, 학부모, 청소년 성소수자 등과 만나 대화의 자리도 마련할 생각이다.

-이송희일 감독의 장편 데뷔작 <후회하지 않아>를 좋아했던 팬들은 확실히 움직이겠다. =<후회하지 않아>는 당시로서 획기적이었다. 단기간 내에 5만명 정도 들었으니까. 팬층이 굉장히 두터웠던 거다. 하지만 그 영화 뒤로 퀴어영화 시장이 확대되고 드라마에서도 소재가 되면서 뭔가 그 관객층에게 충족되지 않는 것들이 생겨난 것 같다. 그러다가 <야간비행>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아> 때와 비슷한 감흥을 느끼거나 비슷하게 궁금해하고 있는 것 같다. 이송희일 감독이 오랜만에 긴 호흡의 영화를 만들어낸 거니까 충분히 그럴 만도 하다.

-<야간비행>을 원래는 드라마로 만들 계획이었다고. =(이송)희일이하고 나하고 8부작 드라마로 생각하고 시작한 게 2009년쯤이다. 일단 드라마 트리트먼트를 썼고 그걸 들고 돌아다녔는데 잘 안 된 거지. 그 드라마 트리트먼트, 매우 좋다. 희일이가 갖고 있는 것들이 모두 모여 있다고 해도 될 정도로. 언젠가 기회가 되면 만들고 싶다. 하여튼 그러면서 시간이 지나갔고 ‘백지남’(<백야> <지난여름 갑자기> <남쪽으로 간다>)을 찍은 거다. <백야>로 베를린국제영화제 갔을 때 둘이 이야기했다. “빨리 만들어서 다시 오자.” 그때부터 박차를 가해서 시나리오도 고치고 투자도 알아봤다. 그렇게 해서 올해 베를린에서 상영했다. 시나리오는 그동안 많이 바뀌었는데 원래는 주인공 둘 다 게이였다. 수위를 좀 낮춘 거다. 극중 기웅 아버지 이야기도 좀 들어갔고.

-제목을 두고 서로 논의를 많이 했다던데, 논의 대상은 그것만이 아니었을 것 같다. 어떤 것들을 두고 의견을 많이 나눴나. =처음에는 청소년 퀴어라는 설정이 강했다. 지금은 사회 축소판으로서의 학교라는 설정이 강하다. 영화 속 기웅은 그런 학교 시스템을 잠시 정지시키는 인물인 거다. 기웅이라는 인물이 처음과 좀 달라지면서 영화의 방향도 함께 달라졌다. 역시 제일 고민했던 건 자살하기 직전 한 학생이 엘리베이터 CCTV에 찍혔던 실제 내용이다. 그걸 영화에서 재현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해야 도덕적으로 정당하게 이런 것들을 말할 수 있을까, 재현하는 게 맞기는 한 건가 고민한 끝에 쓰게 된 거다. 희일이나 나나 이런 부분에 워낙 민감하다 보니 고민이 더 많았다. 결과적으로는 관객이 그 장면을 잘 봐주고 있는 것 같다. 아쉬운 건 폭주 장면이다. 조금 더 찍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 장면을 둘러싼 담론이나 해석이 중요했다. 그런데 돈이 늦게 들어오는 바람에….

-촬영 당시에는 힘든 일이었겠다. =팔자다, 팔자. 쉬운 조건으로 영화 만들어본 적 없으니까. 그래도 최대한 현장을 스톱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일한다. 내가 넘어지더라도 현장은 넘어지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한다. 스탭들이 정말 많이 도와준다.

-스타일상 현장에는 잘 안 나가는 편이라고. 자율적이어서 좋다고 받아들이는 쪽도 있는 것 같고, 반면에 너무 안 온다고 농담 섞어 불평하는 쪽도 있는 것 같고. (웃음) =배급 일을 함께하면서 현장에 가는 게 줄어들긴 했다. 사실 나는 전권을 맡기는 편이다. 희일이하고 할 때도 많이 안 나간 편이고. 믿는 것도 있고 워낙 알아서 잘하는 것도 있고 해서. 어쨌든 이런 소리 다시는 안 나오게 다음 영화들부터는 아예 매일 나가버릴까 생각 중이다. (웃음)

-극영화 제작자로 참여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중에서도 이송희일 감독 영화에는 좀더 특별해 보인다. 둘은 어떻게 알게 된 사이인가. =희일이하고는 오래됐고 서로 잘 알기도 해서 소통하는 방식이 따로 필요 없을 정도다. 서로 툭툭 말하고 또 금방 알아듣고 하는 식이다. 98년 즈음인가, 한국독립영화협회에서 일할 때 계간지 <독립영화>를 만들면서 처음 안면을 텄다. 그러고 나서 2000년 즈음에 희일이는 <슈가힐> 찍고, 나는 프로듀서로 데뷔했다. 김성숙 감독이 우리 둘을 서로 연결해줬다. 같이 일하면 잘 맞을 것 같다면서. 그래서 일주일에 세번씩 만났고 새벽까지 술 마시면서 속에 있는 얘기들을 했었다. 집에는 가야 하는데 취하진 않으니까 막판에 폭탄주 말아 마셔가면서. 그때는 젊었으니까. <굿로맨스>도 같이 했고 당시에 충무로 상업영화 제안이 들어와서 함께 시나리오도 쓰고 그랬다.

-다큐를 제작하는 것과 극영화를 제작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지 않겠나. 두 가지 일을 함께하고 있는데 어떤 차이를 느끼나. =둘 다 힘들지만 다큐에 어떤 여지가 좀더 많다. 제작기간이 길고 돈이 집중적으로 투여되거나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극영화는 돈이 준비되지 않으면 일단 못 들어가니까. 다큐는 찍는 중에도 아이디어나 상황이 바뀌는 등 변수들이 생긴다. 반면에 극영화는 일어날 변수들을 미리 예측하고 구현하는 것이 일이다. 극영화는 시나리오 과정상에서 고민을 많이 하지만, 다큐는 현장에서의 관계의 문제에 고민을 많이 하고 사회적인 분위기에 영향받는 것도 있다. 독립영화 안에서라면 요즘 극영화의 추세는 예전과 약간 다른 것 같다. 어떤 측면에서는 재기발랄한 영화도 많고. 하지만 영화적 기능이나 도덕성의 문제라거나 하는 부분에서는 동의가 선뜻 안 되는 경우들이 있다. 그리고 어떤 영화들의 경우는 제작 방식으로 볼 때 이게 과연 맞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고.

-어떤 걸 말하는 건가. =독립영화의 틀 안에서 충무로식 기획 제작 방식으로 극영화를 만드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는 거다. 왜 보통 상업영화의 방식을 규모만 줄여서 하는 것 말이다. 지금 개봉하는 독립영화 중 모 영화는 그저 저예산으로 만든 영화일 뿐이다. 물론 그러한 것도 필요하지만 그게 독립영화의 돌파구가 될 수는 없다는 거다.

-어떤 쪽이 좋은 방식이라고 생각하나. =우선 좋은 감독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 그리고 그들을 발굴하는 것이 중요하다. 독립영화제인 인디포럼이나 서울독립영화제가 그런 면에서 중요하다. 영화의 완성도를 추구하면서도 독립영화적인 다른 것들을 중시하고 확장할 필요가 있다. 거기에서 재미를 찾고 작가를 발굴하고 그들과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어떤 순도의 문제가 중요하지 않은가 하는 거다.

-주변 분위기에 흔들리지 않고 하고 싶은 것, 해야 할 것을 꾸준히 하는 신뢰할 만한 독립영화 제작자, 배급업자라는 평을 얻고 있다. =무슨 그런…. 우리도 내부 갈등이 많다. 나도 고민이 많고. 욕도 많이 먹고. 그게 현실이다. 다만 나름대로의 원칙이 있다. 자존심 같은 게 있다. 나와 시네마달의 자존심 같은 건데, 우리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 쟤네 일 못한다, 이런 거다. 요즘처럼 상황이 안 좋은데도 직원 수를 늘리는 건 마지막 수를 한번 두는 거다. 속으로는 늘 생각한다. 내가 동의할 수 없는 영화는 하지 말자고. 또 하나는 지켜야 하는 것들을 생각한다. 독립영화의 함의 안에서 내가 일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함의에서 어긋나지 않도록 하자고. 이런 저런 요건 때문에 이렇게 저렇게 뒤집을 순 없다. 사람을 대하는 방식도 선택의 기준도 그렇다. 그건 독립영화를 하면서 사는 내 삶이고 태도니까. 시네마달 식구들한테도 그 얘기는 많이 하는 편이다. 사실 독립영화 하는 많은 사람들이 다 그러고 있다고 본다.

-시네마달의 제작, 배급 계획은 어떻게 되나. =물론 이송희일 차기작을 같이 얘기 중이다. 다큐로는 황윤 감독과 공동제작하는 <잡식 가족의 딜레마>가 있다. 그 밖에 다큐 두세개 정도를 배급할 계획이 있고. 내년 상반기나 하반기로 봐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젊은 감독들하고 연락하면서 이야기하는 것도 있고. 지금은 시장 상황이 어려워져서 내가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아졌다. 인건비 문제도 그렇고 제작비 문제도 그렇고 일정 부분 확보되지 않으면 고생하게 되니까 신중하게 생각 중이다.

-이렇게 계획이 많은데 왜 자꾸 그만둘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다니나. (웃음) =(웃음) 내부적으로 좀더 업그레이드됐으면 좋겠는데 그게 잘 안 되니까 그런가보다. 그냥 뭐 별 어려움 없는 걸로 해두자!

김일권 대표는 말 그대로 독립영화계의 오랜 실천가로 통한다. 2000년대 초부터 프로듀서 일을 시작했고 2008년부터는 제작 배급사 시네마달을 창립하여 매년 꾸준하게 4~5편씩 개봉하고 있다. 무엇보다 해야 할 작품들을 놓치지 않고 한다는 평을 얻었고 그중에는 <두 개의 문> 같은 큰 화제작도 했었다. 그는 “그냥 영화 일을 하는 과정에서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하는 게 좋다. 딴따라로 남고 싶다”고 자기를 낮추지만, 그가 지닌 사회 모순에 대한 반성적 인식, 활동가적 기질을 높이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 그가, “나이는 더 들어가고, 미안하다는 말은 더 많이 해야 하는 상황에 조금 지친다”고 얼핏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미지 하나가 스쳐갔다. 어두운 밤의 창공, 별들 사이를 지나는 조용하고도 작은 비행기 한대, 그 안의 그. 김일권 대표는 오랫동안 두렵고도 힘겨운 야간비행을 해온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이것도 확실하다. 말처럼 그의 비행이 쉽게 멈추진 않을 것이다. 김일권의 독립영화 야간비행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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