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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그분도 착하게 보이게 만드는 마력

<변호인> <열혈남아> <권순분 여사 납치사건> 등으로 보는 국밥집 아줌마의 도(道)

<권순분 여사 납치사건>

내 고향은 전주다. 동네 백반집만 가도 12첩 반상이 깔린다는 전설의 고장 전주(옛날엔 전설이 아니라 진짜였다), 전국에 널린 프랜차이즈도 여기에 발만 들였다 하면 미묘하게 맛있어진다는 신비의 고장 전주. 하지만 그곳에도 맛없는 집은 있었으니… 우리 집이다, 우리 집. 내가 20년 가까이 먹고 살았던 우리 집.

친정은 군산이요 시댁은 광양으로서 민어회나 서대회, 김국 같은 진미가 반찬이었던 엄마는 먹던 가락이 있어 장보기는 잘했지만 음식은 못했다. 그래서 갈치조림 대신 갈치구이를, 계란말이 대신 계란찜을, 닭볶음탕 대신 백숙을 만들었다. 한마디로 복잡한 음식은 하지 않았다. 그런 엄마가 유일하게 할 줄 아는 전라도 음식은 불행하게도 콩나물국밥이었다. 우리 집은 일요일 아침마다 삼백집 스타일로 뜨겁게 끓인 콩나물국밥을 먹었다. 스타일만 삼백집. 허영만의 <식객>을 보면 삼백집 콩나물국밥은 국밥 전용으로 담가 2년 이상 숙성한 썰이김치를 넣어야 한다는데,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으니까(2년 된 김치는 있었지만 그건 그냥 맛이 없어서 남은 김치) 콩나물만 끓였다. 다시 말해 나는 한창 자랄 나이에 일요일 아침마다 밥과 콩나물과 국물만 먹었다는 이야기다. 누가 그래, 콩나물 많이 먹으면 키 큰다고.

그래서 나는 대한민국의 어른답지 않게 국밥을 무척 싫어하게 되었다, 고기가 들어간 국밥을 먹어보기 전까지는. 스무살에 경상도로 답사 갔다가 주는 대로 먹은 그 정체불명의 국밥은 나중에 알고 보니 돼지국밥이었는데, 고기가 정말 많았다. 일요일 아침마다 이걸 먹었다면 좋았겠지만, 마른 멸치를 찌개 육수가 아니라 간식으로 쓰던 우리 엄마가 돼지뼈를 우리고 있을 리가 없지.

<변호인>

그 후 10년이 훨씬 넘도록 돼지국밥을 먹을 일이 없었는데(부산영화제 가서도 복국만 먹었다. 동료들이 입이 짧아서) <변호인>을 보고 남들 다 했다는 일을 나도 했다, 돼지국밥 먹기. 부산에서 나고 자란 선배의 말에 의하면 부산대학교 가기 전의 어딘가 사거리에서 좌회전하면 어마어마하게 불친절하고 맛있는 돼지국밥집이 있다고 했다. 거기 아줌마는 정말 두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데도 홀린 듯이 줄을 서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고. 그런데 죽어도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안 그래도 줄이 길다며.

돼지국밥과 안면을 트고 나서 숱한 국밥을 만났다. 이름은 장터인데 학교에서 팔던 장터국밥, 고기 없다길래 안 먹으려고 했지만 육수가 장어라고 해서 먹은 시락국밥, 이름만 듣고 사랑에 빠졌던 소머리국밥…. 그중에 내 마음을 사로잡은 한 단어가 있었으니, 따로국밥이었다. 이게 바로 삼백집 스타일이라며 너무 오래 끓여 불어터진 밥알을 먹고 자란 나는 그냥 내가 알아서 밥 말아 먹고 싶었다. 게다가 따로국밥은 가난했던 시절 말아 먹던 국밥이 진화한 ‘고급형’이라는 것이었다. 좋아, 고급이 좋아. 그리하여 정말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던(남자만 많이 나오는) 영화 <열혈남아>를 보면서 나는 빨리 나가고만 싶었다. 따로국밥 먹으러 가려고.

2006년 당시 3500원의 찬란한 가격을 자랑하던 이 국밥집의 이름은 점심국밥, 점심에만 장사한다고 점심국밥인 줄 알았는데 주인 이름이 김점심(나문희)이었다. 욕을 퍼부을수록 장사가 잘된다는 국밥집 아줌마답게 점심 여사는 불친절하다. 손님이 와도 야채만 다듬고, 물도 알아서 떠다 먹으라며 면박을 준다. 하지만 국물과 건더기가 리필. 공기밥을 시켰을 뿐인데 거의 한 그릇 분량의 국을 가져다주는, 저녁에도 장사하는 아름다운 국밥집 점심국밥. 물은 제가 알아서 갖다 먹을게요, 고추도 그냥 제가 씻을게요. 하지만 1년 뒤인 2007년, 점심 여사는 친절한 국밥 재벌로 다시 태어나니 바야흐로 <권순분 여사 납치사건>이다. 하루에 파는 국밥이 3천 그릇, 1일 매상이 2500만원, 그 결과 한달 수입이 7억5천만원, 그에 힘입어 국밥집 사장 몸값으로 요구하는 금액이 500억원! 안동 지역 인구가 얼마나 되길래 하루 매출이 88만원 세대의 1년치 월급의 두배가 넘는 것인지 궁금했다. 안동 가서 간고등어만 먹고 왔는데 나도 국밥 먹을걸 그랬지.

<열혈남아>

이 많은 국밥집엔 언제나 아줌마나 할머니가 있었다. 국밥집 아저씨, 국밥집 할아버지, 하면 이상하잖아. 삼백집은 욕쟁이 할머니로 명성을 날렸다지만 산천은 유구한데 인걸은 간데없고, 국밥은 유구하게 진국인데 욕설은 간데없다. 듬뿍 담은 우거지와 친절로 무장한 우리 동네 순댓국밥집 아줌마들은 내가 가면 모처럼 젊은이가 왔다고 반색을 하며 일어나… 부려 먹는다. 할아버지들만 많이 오는 집이어서 그렇지 알고 보면 그리 젊지도 않은 나한테 케이블TV가 이상해졌다, 에어컨 바람이 나한테만 안 온다, AS를 부르시라고 하면 에이스가 뭐다냐 네가 불러라, 마구 부려 먹으신다.

이상한 건 싸가지 없기로 한세상 풍미했던 내가 그 집만 가면 고분고분해진다는 사실이다. 혼란스러워, 국밥집에선 왠지 쌍욕을 얻어 먹으면서 노예처럼 일해야 할 거 같아. 도대체 국밥집 아줌마의 마력은 무엇인가, 어떤 치명적인 매력을 품고 있길래 국밥집 아줌마 곁에만 서면 이명박도 착해 보이는가. 동의할 수 없다고? 그렇다면 그의 평소 얼굴을 한번 봐라. 그 포스터로 괜히 대통령 된 게 아니다.

몇년 전에 패션 칼럼니스트 황의건은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배우 김여진이 국밥집 아줌마 같다며 욕했는데, 그는 제대로 된 국밥을 먹어본 적이 없었던 거다. <변호인>의 김영애 같은 미녀 아줌마는 아니더라도, 뜨끈한 국밥 한 뚝배기로 성냥팔이 소녀처럼 눈길 헤매다 들어온 영혼을 녹이는 그 치명적인 매력을 겪어보지 못한 거지. 한때 국밥을 기피했던 어른으로서 단언한다. 국밥 앞에 무릎 꿇어보지 않은 자, 국밥집 아줌마의 미모를 논하지 마라. 아낌없이 하사하신 살코기와 내장을 퍼먹다 보면 훈김 너머 아른거리는 아줌마의 자태, 선녀탕이 따로 없다.

우선 예쁘고 볼 일인가

성공한 국밥집 아줌마가 되기 위해 필요한 두세 가지 것들

<권순분 여사 납치사건>

300가지 비법 무릇 재벌급 국밥집이라고 하면 비법이 300가지는 되어야 하나 보다. <권순분 여사 납치사건>의 권순분 여사는 국밥을 끓이는 300가지 비법을 적은 공책을 가지고 있는데, 300가지 국밥을 끓이는 비법이 아니다. 국밥 하나 마는 데 필요한 비법이 300가지라는 이야기다. 국물 우리는 온도 조절에서 고춧가루 구분하는 법까지, 이걸 익히느니 나는 전주의 전통 음식 탁백잇국을 끓이련다. 콩나물국밥의 전신이라는 탁백잇국은 이렇게 만든다. 콩나물을 솥에 넣고 푹푹 삶아 마늘을 넣는 둥 마는 둥 소금을 쳐서 휘휘 둘러놓으면 그만이다. 우리 엄마 손맛인데?

<국경의 남쪽>

볼거리 남조선으로 내려와서 국밥집을 차렸지만 전형적으로 안 풀리던 <국경의 남쪽>의 탈북자 가족은 획기적인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인생 역전을 이룬다. 아들은 키보드 치고 딸은 노래 부르고 부모는 추임새 넣는 라이브 국밥쇼! 목소리가 높고 가는 데다 쪽 진 머리가 어울리는 바람에 과 행사 때마다 꽃을 (차마 달지는 못하고) 들고 북한 노래 <휘파람>을 불렀던 나는 마음이 동했다. 안 그래도 실업자 신세, 전주 스타일 국밥집 라이브쇼는 어떨까. 아, 근데 전주는 판소리지, 걸쭉하게. 아, 맞다, 나는 자본금도 없지.

드라마 <토지>

미모 소설 <토지>를 읽을 때는 몰랐는데 드라마를 보고야 알았다, 월선이가 국밥 팔아 부자가 된 비결이 무엇인지, 똑같이 시래깃국밥 파는 평사리 주막과 월선이네의 차이가 무엇인지. 사람이 다르잖아. 평지를 걸어서 5분 거리 학생회관을 두고 한사코 오르막길 15분 거리 음미대 식당에서 밥을 먹던 인문대 남자애들이 생각났다. 정원은 제일 적은데 식당 인구밀도는 제일 높았던 미스터리한 구역, 정원의 80%는 여자인데 식당 손님의 80%는 남자였던 부조리한 구역. 그래, 나도 총각이 통나무 패는 거 보고는 프라이드치킨 끊고 장작구이통닭만 먹으러 다녔어, 이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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