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제라드. 1998년 데뷔한 이래 지금까지 리버풀에서만 쭉 뛰고 있는 원 클럽 맨. ‘리버풀의 심장’이라 불리는 것도 그래서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차범근축구교실 1기로 축구를 시작해 중학교 3학년 때까지 학원 축구선수로 뛴 바 있는 권율은 그의 열렬한 팬이다. “제라드는 물론이고, 지난 시즌을 마치고 고향 덴마크로 돌아간 리버풀 부주장 아게르처럼 팀에 대한 충성이 높은 선수를 존경한다.”
스티븐 제라드가 ‘일편단심 리버풀’인 것처럼 <명량>에서 권율이 연기한 이회 역시 ‘일편단심 아버지 이순신’이다. 정쟁을 일삼는 조정과 임금 때문에 갖은 고초를 겪고도 위기에 빠진 나라와 백성을 구하기 위해 전장에 나가려는 아버지 이순신(최민식)을 믿고 따르는 아들. 그런 아버지에게 “왜 싸우시려는 겁니까?”라고 묻고 또 묻는 혈기왕성한 청년. 부상 때문에 전쟁터에 나가지 못하는 바람에 뭍에서 전쟁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백성.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권율은 지금이 아니면 이회 같은 캐릭터를 연기할 기회가 다시 없으리라 생각했다. “올해로 33살이다. 이 나이에 이순신을, 그렇다고 왜장을 연기할 수는 당연히 없다. 나이가 더 들기 전에 이회를 맡고 싶었다. 무엇보다 최민식 선배님이 이순신 장군이라면 뒤돌아볼 것도 없지 않은가.”
거리낌없이 이회라는 옷을 입기로 결정했지만 캐릭터의 다양한 면모 중 무엇을 돋보이게 할지 처음에는 감을 잡기 어려웠다. “어떨 땐 아버지 말을 한없이 잘 듣는 아들, 또 어떨 때는 나라와 임금을 원망하는 혈기왕성한 젊은 장수. 해전이 벌어졌을 땐 관객을 안내하는 관찰자. 그러면서 이순신 장군의 마음을 수시로 물어야 하고. 이야기 안에서 역할이 많아 혼란스러웠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김한민 감독에게 자신을 캐스팅한 이유를 물어보기도 했다. “처음 만났을 때 착한 마음이 느껴졌고, 그 마음이라면 이순신 장군의 마음을 온전히 다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는 게 김한민 감독의 대답이었다.
그 말이 힌트가 되었을까. 촬영을 하면서 권율은 한 가지만 보여주면 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순신 장군, 그러니까 최민식에 집중하는 것. “아버지 이순신이 가지고 있는 마음을 끝까지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이순신 장군의 마음에 집중할수록 이회라는 캐릭터가 완성된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영화 속 이회의 시선은 늘 이순신 장군에 향해 있다. 매사 진지하고 성실한 비서(드라마 <내게 거짓말을 해봐>(2012))라든가, 부유한 잉여 희준(<잉투기>(2013)) 등 전작이 기존의 권율이 가지고 있는 큰 돌을 조각해 형태를 만들어갔던 조소라면, 이번에는 이회라는 뼈대에 살을 붙여갔던 소조였다.
뼈대에 살 하나하나가 붙어 비로소 이회가 완성됐을 때 권율은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그게 배를 타고 출정하는 아버지를 향해 큰절을 올리는 영화의 중반부 시퀀스. “한번도 만족스러웠던 적은 없었지만, 그 시퀀스를 찍을 때 이런 마음이 들었다. 멀리서 바라본 최민식 선배가 정말 이순신 같다. 그러면서 아버지를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울컥했다.” 그런 마음이었다면 역으로 최민식 역시 뭍에서 자신을 향해 큰절을 올리는 권율을 보고 ‘내 아들 이회’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명량>의 이회는 훈남 대학생, 옆집 오빠, 실장님 등 본명 권세인으로 활동했던 데뷔 초 이미지와 확실히 다르다. 부모님이 물려준 이름 대신 ‘율’을 쓰기로 한 것도 “특정 이미지에 갇히지 않고, 타협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내린 결정이었다. “법 율자다. 세상을 원하는 대로 이룰 것이다. 그러려면 노력과 책임감이 따라야 한다는 결코 가볍지 않은 이름이다. 그 무게감으로 불러줄 때마다 각오를 잊지 않게 된다.” 요즘은 숨을 고르고 있다. 이회를 빚었던 정성이라면 그의 다음도 믿고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