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을 인정하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높이 내걸고 열이틀 동안의 숨찬 일정을 몰아붙였던 제52회 베를린영화제가 2월17일 붉은 막을 내렸다. 주요하게 정치적 올바름, 그리고 가족의 붕괴와 재건 가능성이라는 두 가지 주제가 돋보였던 이번 영화제의 수상결과와 주요 작품들을 돌아본다. 또 문제작은 드물었지만 여느 해 못지않게 시끌벅적했던 베를린영화제를 총정리한다. 편집자
● 수 상 결 과 ●
금곰상
<블러디 선데이> (영국·아일랜드, 폴 그린그래스 감독)
올 베를린영화제가 9·11 테러에 대한 입장으로 ‘다양성에 대한 인정’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북아일랜드가 잉글랜드에 수십년간 가해온 테러의 근원을 보여주는 이 영화가 금곰상을 받은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큐멘터리를 연상케 하는 생생한 영상이 돋보이는 이 작품은 당시 사건 현장에 있었던 북아일랜드 주민뿐 아니라, 가해자인 영국군의 증언도 수용해 ‘화해’의 새 세기에 걸맞은 모양새까지 갖췄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일본,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애초 이 작품이 ‘기습적’으로 경쟁부문에 들었을 때부터 이같은 결과를 예측했어야 했다. 하지만 영화제가 종반으로 치달을 때까지도 이 일본 최고의 흥행작이 금곰상을 받으리라곤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이 영화는 메이저 영화제 사상 최초로 대상을 받은 애니메이션이자 <무사도> 이후 39년 만에 금곰상을 거머쥔 일본영화라는 기록을 함께 세우기도 했다.
은곰상
▶ 심사위원 대상 <계단의 한가운데>(독일, 안드레아스 드레센 감독)
올해 베를린이 경쟁에 독일영화 4편을 올려놓은 것을 보고, 전문가들은 “금곰상은 민망해서 못 줄 것이고 은곰상은 확실히 받겠군” 하고 일갈했다. 과연 출품된 독일영화 중 작품성이 가장 나았다는 평을 들은 <계단의 한가운데>는 은곰상을 안았다. 인생이라는 계단 중턱에서 헐떡이는 30대 부부 두쌍의 이야기를 보여준 이 영화는 특히 독일 관객으로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 최우수 감독상 <월요일 아침>(프랑스, 오타르 요셀리아니 감독)
대중성이 강조된 이번 영화제의 경쟁작 중 가장 비대중적이며 독특한 문법을 보여준 이 영화는, 그럼에도 ‘요셀리아니의 영화 중 가장 대중적 작품 중 하나’라는 평을 들었다. 그루지아 출신으로 소련이 붕괴한 뒤에는 주로 프랑스에서 활동해온 그에게 최우수감독상을 선사한 것은, 이제 세계에 얼마 남지 않은 ‘숨겨진 거장’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로 평가된다.
▶ 최우수 남자연기상 <통행증>의 자크 강블랭
만약 자크 강블랭이 나오지 않았다면, 나치 치하 파리 영화인들의 생활을 엿보게 하는 <통행증>은 너무 밋밋하거나 지나치게 힘이 들어간 영화가 됐을지도 모른다. 그가 연기한 장 드베브르는 독일이 만든 콘티넨탈 영화사에 들어갔으면서도, 나치의 비밀문서를 빼내 연합군에 넘겨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는 인물. 비밀문서를 전달하기 위해 영국까지 다녀오는 인상적인 시퀀스에서 그는 급박한 상황에도 여유를 잃지 않는, 마음 굳은 캐릭터를 연기해 강한 음각을 남겼다.
▶ 최우수 여자연기상 <몬스터스 볼>의 할 베리
여성 캐릭터가 강조된 작품이 많았던 이번 베를린영화제에서 할 베리는 <아이리스>의 주디 덴치와 함께 일찌감치 여자연기상 후보에 올랐던 인물. <몬스터스 볼>에서 그녀가 드러낸 것은 적나라한 알몸만이 아니었다. 베리는 스타라는 이미지에 갇혀 있던 자신의 내면세계를 폭발적으로 분출시켰다. 남편을 사형대에 보낸 직후 외아들마저 사고로 잃은, 너무나 가난한 여성이라고 하기에 그녀의 외모는 너무 화려해 보였지만, 질박한 속내마저 느끼게 하는 그녀의 연기는 돋보였다.
▶ 개인 예술 공헌상 여배우들의 앙상블
크리스마스를 축하하기 위해 모였다가 가장의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한 여덟 여인들의 난리법석 소동극은 영화제 최고의 화젯거리 중 하나였다. 한때 만인의 연인으로 군림했던 카트린 드뇌브, 프랑스 최고의 여배우 이사벨 위페르, 고혹스런 에마뉘엘 베아르 등 한데 모이기도 힘든 최고 스타들은, 심지어 심하게 ‘망가지는’ 연기까지 보여준다. 때문에 이 프랑스판 여인천하의 여배우들에게 상이 돌아간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
▶ 은곰상
최우수 영화음악상 <통행증>의 앙트완 뒤하멜
블루엔젤상(최우수 유럽영화상) <사소한 사고>(덴마크, 아네트 K. 올센 감독)
알프레드 바우어상 <바아더>(독일, 크리스토퍼 로트 감독)
파이퍼 하이드식 뉴탤런트상 여자연기상 <구름 아래서>의 다니엘 홀
파이퍼 하이드식 뉴탤런트상 남자연기상 <아이리스>의 휴 보너빌
▶ 단편영화
금곰상 <새벽에>(영국, 마틴 존스 감독)
은곰상(심사위원상) <나의 형제>(스웨덴, 옌스 욘슨)
▶ 프리미어 신인감독상
<구름 아래서>의 이반 센 감독
▶ 테디베어상
장편영화 <물 위를 걷기>(호주, 토니 에이어스 감독)
다큐멘터리 <내 아버지의 모든 것>(노르웨이·덴마크, 에벤 베네스타드 감독)
단편영화 <셀레브레이션>(미국, 대니얼 스테드먼 감독)▶ 제52회 베를린영화제 수상결과
▶ 제52회 베를린영화제 결산
▶ 베를린에서도 재연된 <나쁜 남자> 논쟁
▶ <블러디 선데이>의 폴 그린그래스 감독
▶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 베를린에서 발견한 보석 5편
▶ 영화평론가 김소희의 베를린의 상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