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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렘 데포] <안녕, 헤이즐> <모스트 원티드 맨> <오드 토머스>
주성철 2014-08-19

윌렘 데포

<더 헌터>

<안녕, 헤이즐>에서 산소통을 캐리어처럼 끌고 호흡기를 생명줄처럼 차고 있는 헤이즐(셰일린 우들리)과 그가 암환자 모임에서 만난 오른쪽 다리를 잃은 골육종 환자 어거스터스(안셀 엘고트), 그렇게 둘이 합쳐 1.5개의 폐, 3개의 다리를 가진 풋풋한 청춘 커플은 소설책 <An Imperial Affliction>을 나눠 읽으며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어거스터스는 헤이즐이 그토록 좋아하는 네덜란드 작가를 만나게 해주기 위해 암스테르담 여행을 제안하고, 둘은 가족과 주변의 걱정과 만류에도 불구하고 생애 처음으로 여행길에 오른다. 그런데 문제는 작가를 만나고서 부터다. 책의 결말에 대한 궁금증으로 작가를 만나기 위해 무려 암스테르담까지 갔지만, 헤이즐의 우상과도 같은 작가 피터 반 호텐(윌렘 데포)은 질문에 명쾌한 답을 주기는커녕 이들을 거의 문전박대하다시피한다. 하루 종일 술잔을 놓지 못하는 술고래에다 그들이 들어도 알지 못할 힙합 음악을 틀어놓고는 혼자 흥얼거린다.

<안녕, 헤이즐>의 원제 <The Fault in Our Stars>는 셰익스피어의 연극 <줄리어스 시저>에서 시저가 브루투스에게 했던 대사, “인간을 무너뜨리는 것은 운명이 아니라(not in our stars) 자기 자신의 실수(the fault in ourselves)”라는 말을 거꾸로 패러디하여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라고 한 것이다. 말하자면 주인공들이 암에 걸린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지만 절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것도 함께 얘기하고 있다. 피터 반 호텐은 그런 그들을 향해 다시 한번 그 말을 빗대 ‘star-crossed lovers’(별자리가 사나운, 불행한 연인)라고까지 말한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드는 것이, 윌렘 데포 특유의 고약한 주름과 수척한 얼굴이 한데 어우러져 괴팍하고 못돼먹은 ‘진상’ 작가를 탄생시켰다. 물론 마지막에 이르러 묘한 반전을 숨겨놓기는 했지만, 헤이즐과 어거스터스는 참다못해 그 악마 같은 작가의 집을 박차고 나온다.

그리스도와 악마, 윌렘 데포는 그 극단의 세계를 경험한 흔치 않은 배우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원작을 영화화한 마틴 스코시즈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1988)에서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를 짊어진 그의 모습은 다소 이단적인 내용으로 당시 논란의 중심에 섰다. 1955년 미국 출생, 마이클 치미노의 <천국의 문>(1980)으로 데뷔한 이래 월터 힐의 <스트리트 오브 파이어>(1984)에서 가죽 재킷을 걸친 오토바이 갱이자 도시를 폭력으로 물들이던 악당으로 등장해 선명한 인상을 남긴 그였기에 예수를 연기한다는 것 자체가 논란의 불씨를 안고 있었다. 깊은 주름에 서늘하고 날카로운 인상에서부터 그는 묘하게 ‘악마성’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거꾸로 잘 활용한 경우가 바로 올리버 스톤의 <플래툰>(1986)이다. 잔인한 반즈 중사(톰 베린저)의 반대편에 서 있는 선하고 정의로운 일라이어스 분대장(윌렘 데포)의 모습은 이후 예수로 출연하게 될 미래를 암시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트남에서 양민 학살이 벌어지고 내부적으로 심각한 갈등을 빚던 와중에 전장의 한복판에서 적이 아닌 동료의 총에 맞아 (그 유명한!) 허공으로 두팔을 벌린 채 천천히 쓰러지는 그의 모습은 마찬가지로 동족에게 배신당한 예수의 그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밀워키에 있는 아방가르드 극단에서 활동하던 그는 4년 동안 미국과 유럽을 순회하며 공연했고, 1977년 뉴욕에서 실험극 집단 ‘우스터 그룹’의 창단 멤버가 됐다. 그 특유의 카리스마와 개성 넘치는 연기 스타일은 이곳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모태는 바로 실험극인 것이다. 그래서 주로 악역 혹은 뒤틀린 캐릭터를 맡아온 그의 모습에서는 어딘가 남다른 면모가 묻어난다. 세월이 흘러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2002)에서 스파이더맨 피터 파커(토비 맥과이어)의 친구 해리(제임스 프랭코)의 아버지 노먼 오스본 박사이자, 실험 도중 사고가 일어나 괴력의 악당 그린 고블린으로 변신하여 스파이더맨과 싸우는 악마적인 모습은 어떤가. 데이비드 린치의 <광란의 사랑>(1990), 울리히 에델의 <육체의 증거>(1993), 앤서니 밍겔라의 <잉글리쉬 페이션트>(1997), 아벨 페라라의 <뉴 로즈 호텔>(1998) 등을 통해 수많은 감독과 다양한 캐릭터로 만나온 그가 슈퍼히어로 블록버스터의 세계에도 녹아들어 무게감을 부여한 경우였다. 이후 <존 카터: 바숨전쟁의 서막>(2012)에서는 화성에 사는 외계 원시종족의 왕 타스 타르카스를 맡아 모션 캡처 연기를 소화하기도 했다.

그리스도와 악마를 넘어 뱀파이어로 변신한 경우도 있었다. 역시나 잘 어울렸다. E. 엘리아스 메리지의 <뱀파이어의 그림자>(2000)에서 영화제작자 무르나우(존 말코비치)는 이제껏 한번도 만들어지지 않은 공포영화를 만들려는 생각에, 진짜 뱀파이어인 맥스(윌렘 데포)를 캐스팅한다. 어딘가 이상해 보이는 그를 두고 갸우뚱하는 배우와 스탭에게 무르나우는 맥스가 단지 까다로운 배우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크랭크업할 때까지 참지 못하고 배우와 스탭의 피를 맛보고 싶어 하는 맥스로 인해 촬영은 꼬이게 된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그에게 남우조연상을 안겨준 <뱀파이어의 그림자>는 윌렘 데포 특유의 개성을 무한대로 분출하는 영화였다.

2010년 부인 지아다 콜라그란데 감독이 연출한 이탈리아영화 <우먼>(2010)의 주연배우로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아 핸드프린팅 행사를 갖기도 했던 윌렘 데포는, 올해 칸영화제 심사위원 등을 맡으며 새로운 전성기를 구가하는 듯 보인다. 주목할만한 것은 역시나 ‘괴팍하고 악마적인’ 감독으로 분류되는 라스 폰 트리에, 아벨 페라라와의 지속적인 만남이다. 먼저 <도그빌>(2003)의 끔찍한 기억을 뒤로하고 길을 떠난 <만덜레이>(2005)의 그레이스(브라이스 댈러스 하워드)의 아버지로 출연하며 라스 폰 트리에와 인연을 맺은 그는, <안티크라이스트>(2009)를 지나 사채업자로 출연한 <님포매니악>(2013)에 이르기까지 그의 최근 영화를 이루는 정서의 중요한 한축을 담당하고 있다. 아벨 페라라와는 <뉴 로즈 호텔> 이후 거의 감독과 페르소나의 관계라 해도 틀리지 않다. <고 고 테일스>(2007)는 물론 <4:44 지구 최후의 날>(2011)에서는 조용히 자신의 집에 틀어박혀 명상 강의와 실시간 뉴스를 들으며 애인과 함께 지구 종말을 기다리는 남자로 나왔고, 오는 9월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될 예정인 <파솔리니>에서는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로 등장한다. 권력과 싸우는 예술의 상징이자, 수많은 오해와 논란 속에서 작업하다 결국 변두리 해변에서 시체로 발견된 파솔리니와 윌렘 데포의 이미지를 연결해보는 것은 무척 흥미롭다.

라스 폰 트리에와 아벨 페라라만 언급하면 섭섭해할 감독이 바로 웨스 앤더슨이다.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생활>(2004)에서 무척 예민하고 질투심 많은 남자로 등장하여 웃음을 안겨준(그린 고블린을 떠올리며 본다면 더욱 놀라운) 그는 <판타스틱 Mr. 폭스>(2009)에서는 급기야 쥐 목소리로 출연했으며,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2014)에서는 무자비하고 말 없는 킬러 조플링으로 출연해 진지한 추격 신을 펼치며 역시나 예상치 못한 웃음을 안겨줬다. 물론 최근에는 여러 감독들과 수많은 캐릭터를 더욱 열정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존 르 카레의 스파이 소설을 영화화한 안톤 코르빈의 <모스트 원티드 맨>(2013)에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러시아 마피아의 비자금을 관리하게 된 은행장 토마스 브루를 맡았고, 스티븐 소머즈의 <오드 토머스>(2013)에서는 끔찍한 피바람이 닥쳐올 한 마을의 정의로운 경찰서장으로 등장했다. 환갑이 다 된 나이, 매번 놀라운 변신을 거듭하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 느끼는 건 결국 하나다.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오직 개성, 또 개성뿐이다!

magic hour

인간 본성의 극단을 향해

최근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를 규정짓는 우울증과 심리적 공포는 <안티크라이스트>에서 보다 ‘격화’됐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이전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악마적 본성에 관한 고찰과 종교적 요소가 결합한 것이라면,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에서 어딘가 이단적인 예수로 출연했던 윌렘 데포를 <안티크라이스트>라는 특별한 제목에 출연시킨 것은 그야말로 상징적이다. 앞서 <만덜레이>를 함께했던 윌렘 데포는 감독에게 직접 자신을 위한 작품이 있는지 먼저 제안했고, 라스 폰 트리에는 곧장 <안티크라이스트> 시나리오를 발송했다. 초반부터 격정적인 사랑을 나누다가 아이가 창밖으로 떨어져 죽는 것을 손쓰지 못했던 그(윌렘 데포)와 그녀(샬롯 갱스부르)는 깊은 우울과 죄책감으로 병들어간다. 비록 샬롯 갱스부르만이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지만, 윌렘 데포 또한 결코 잊히지 않는 순간을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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