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계절과 무관하게 추리소설이 꾸준히 출간된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독자된 입장에서 여름에 유독 미스터리에 끌리는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다만 너무 책이 많아서 뭘 읽어야 할지 고민이라면 이 가이드를 참고하면 어떨까. 게으른, 혹은 결정장애를 지닌 독자님들을 대신해 읽고 추려서 권하는 2014년 상반기 미스터리 베스트11(공포소설도 두권 포함되어 있다). 하루에 한권씩 섭렵하면 열대야도 끝나 있을거다.
첫 번째 밤 온다 리쿠의 <몽위>
꿈을 찍어낼 수 있다면 보고 싶은가?
<몽위>는 꿈을 기계를 통해 뽑아내는 몽찰이라는 기술이 만들어졌다면, 하는 가정을 바탕으로 한다. 대중화, 상업화를 목표로 했으나 호기심이 시들해지면서 이제는 상담 목적으로만 쓰이는 몽찰을, 그러니까 꿈을 해석하는 일을 직업으로 갖고 있는 주인공이 히로아키다. 어느 날 한 초등학교에서 학급 학생 전체가 집단으로 악몽을 꾸는 일이 벌어지는데, 아이들의 몽찰을 보던 히로아키는 그 자신도 꿈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벚꽃이 만발한 나라 지역의 요시노 산과 내내 느껴지는 어떤 여자의 기척. 아이들의 악몽은 전국으로 번지고, 급기야 한 학급의 선생님과 학생들이 실종되기에 이른다. 히로아키는 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경찰청 관계자와 길을 떠나는데, 곳곳에서 형의 옛 약혼녀 요이코의 흔적을 발견한다. 히로아키는 꿈멀미라고 불리는, 꿈과 현실의 경계가 흐려지는 현상을 경험하면서 꿈에서 본 장소, 나라 지역으로 향한다. 명승지만큼이나 사슴이 많은 것으로 알려진 일본 나라 지역 최고의 여행서는 언제나 온다 리쿠의 손끝에서 나온다. <한낮의 달을 쫓다> 때처럼, 이번에도 이야기는 나라의 구석구석을 돌며 신비로움을 더한다. 벚꽃 만발한 산속 작은 절에서 일어나는 오싹하지만 신비로운 기적 같은 일. <몽위>는 꿈과 현실의 경계가 어쩌면 죽음과 삶의 경계에 다름아닌 것은 아닐까 질문한다.
Warning 명백한 ‘사건 풀이’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몽위>의 마지막 장면에서 화를 낼 수도 있다.
두 번째 밤 히가시노 게이고의 <몽환화>
미스터리 팬이 아니어도 책 좀 읽는 사람이라면 한권쯤 읽어보았을 법한 추리소설이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이 아닐까. 연재에서 단행본 발간까지 십년이 걸렸다는 <몽환화>의 속사정은 소설 속 과학 정보가 출간을 미루는 새 낡은 것이 되어버려 ‘노란 나팔꽃’이라는 소재만 남기고 전면수정해야 했다는 거였지만 일본 동북부 대지진 이후의 일본을 생각하게 만드는 결말이 인상적인 이야기로 완성되었다. 아키야마 리노는 올림픽 유망주였으나 정신적인 이유로 수영을 더이상 하지 못하게 된 뒤 사람들과의 교류를 피한다. 할아버지의 꽃 가꾸기 취미를 블로그화하는 일을 돕는데, 할아버지가 어느 날 노란 꽃이 핀 것을 찍더니 절대 이 꽃은 블로그에 올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살해되고 문제의 꽃화분이 없어진 데다 그 꽃에 대해 탐문하는 남자가 등장하자 아키야마 리노는 꽃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나선다. <몽환화>는 에도시대 이후 사라졌다는 노란 나팔꽃에 얽힌 수수께끼와 오랜만에 재회했으나 이름을 바꾼 데다 자신을 모른 척하는 첫사랑을 찾고 싶어 하는 남자, 할아버지의 죽음을 밝히려는 여자와 집안의 비밀이 얽혀 있다. 그리고 일본의 현실에 대한 히가시노 게이고의 생각도 엿보인다. 노래방의 낡은 인테리어를 묘사하다가 “지금의 일본은 어느 업계나 영업을 이어나가는 것만도 벅차다”라고 덤덤하게 말을 맺는 것이 그렇고, “세상에는 빚이라는 유산도 있어”라는 깨달음이 특히 그렇다. 소설 첫 장면은 미스터리 소설 특유의 잔혹한 학살극으로 시작하지만 종래는 포스트 3•11에 대한 히가시노 게이고의 대답으로 마무리된다.
Warning 우연이 너무 겹쳐!
세 번째 밤 루이즈 페니 <가장 잔인한 달>
현실세계의 영웅은 가마슈 경감 같을 것이다. 일반 시민에게는 환호를 받지만 그 자신은 적대적인 세력으로부터 끊임없는 견제를 받고 그의 가족 역시 음해성 공작의 피해자가 되어버리는. 너무 음모론처럼 시작했을지도 모르지만 루이즈 페니의 <가장 잔인한 달>은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한 사건과 더불어 경찰 조직 내부의 정치적인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가마슈 경감의 외로운 싸움을 중계하고 있다. 캐나다 퀘벡의 작은 마을 스리 파인스에 봄이 찾아왔다. 마을 사람들은 마침 마을을 찾은 영매를 핑계로 교령회를 여는데, 첫 번째 교령회가 다소 시시하게 끝나자 두 번째는 폐가가 된 옛 해들리 저택에서 갖기로 한다. 그리고 이 교령회 도중 매들린이라는 여자가 심장마비로 죽는다. 매들린은 마을의 모든 주민이 사랑하던, 언제나 태양처럼 주변을 밝히고 온기를 전하던, 적이라고는 없는 여자. 무엇이 혹은 누가 그녀를 죽게 했을까. 가마슈 경감은 이 사건을 수사하기 시작하는데 그를 괴롭히는 것은 이 사건만이 아니다. 가마슈 경감은 선량하고 믿음직하며 정의심 강한 주인공이다.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에게 달려가서 하소연하고 싶은 인물. 하지만 그의 약점 또한 그런 정의심이고 자존심이라, 그는 조직내부의 문제에 얽혀 있다. 경찰청 내부의 문제를 고발해서 위신을 실추시켰다는 이유로 가마슈에게는 정적들이 생겨났고, 그의 부하 중에도 스파이가 있다. 그게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루이즈 페니의 인간적인 따뜻함(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한 미스터리 소설을 쓰는 작가에게는 가장 중요한 재능이다)과 소소한 유머감각은 초콜릿 무스 케이크를 하나 남겨놓고 누가 먹어야 하는가를 “음식계의 <소피의 선택>”이라고 생각하며 갈등하는 경찰 보부아르를 그려낼 때 절정에 달한다. 남자 둘이 케이크 하나 놓고 뭐가 그리 복잡한가 코웃음친다면 루이즈 페니의 ‘가마슈 경감’ 시리즈는 별것 아닌 것이 되겠지만 여기서 파생하는 감정의 고리를 섬세하게 따라갈 줄 아는 이에게 이 시리즈는 초콜릿 무스 케이크보다 더한 중독성을 갖게 된다.
Warning 자극적인 사건이 줄을 잇는 게 아닌 이상 500페이지 넘는 소설을 읽기 버겁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을 것이다.
네 번째 밤 송시우의 <라일락 붉게 피던 집>
자고로 과거란 윤색되기 마련이다. 나쁘게든 좋게든. ‘가난했지만 행복했지’ 같은 추억담은 현실이라면 그저 고단하기만 한 고민 토로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라일락 붉게 피던 집>은 글쓰는 일을 업으로 한 주인공 수빈이 어린 시절을 주제로 칼럼을 쓰면서 벌어지는 일이다. 라일락 하우스라고 불리던 다세대 주택에서 살았던 당시의 일을 떠올리며 연재를 이어가던 그녀는 당시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한 옆집 오빠가 살해됐을 가능성에 대해 듣게 된다. 라일락 하우스의 이웃이었으며 지금은 애인이 된 소꿉친구와 함께 수빈은 옛 라일락 하우스의 입주자들을 수소문하기 시작한다. 어린아이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어른들간의 치정극이 이제야 모습을 드러낸다. 1980년대 다세대 주택에서의 삶을 안다면 <라일락 붉게 피던 집>을 보며 공감할 요소가 많을 수밖에 없다. 어디까지나 한국적인 삶의 단면을 미스터리의 무대로 잘 옮겨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지금처럼 이웃에 무심한 시대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이웃 사정에 정통한 아줌마들이 CCTV 못지않은 눈으로 서로를 지켜보던 시절. 아무리 사이가 좋아 보여도 결국 돈과 성에 얽힌 문제들로 얼굴 붉히는 사람들. 현재와 과거를 얽어 자연스럽게 드라마를 연출하는 솜씨가 좋다.
Warning 인간미 넘치는 등장인물이 많은데 그 인간미가 가장 떨어지는 게 주인공 수빈이다.
다섯 번째 밤 도진기의 <유다의 별>
사교집단의 교주가 시체로 발견된다. 교주의 엄청난 재산은 시체와 함께 어딘가에 묻혀 있다는 소문이 떠돈다. 7천억원 정도의 가치를 지녔을 것으로 보이는 그 재산을 찾기 위해 변호사 고진이 나선다. 책을 다 읽고 이틀이 지나 구원파 교주 유병언의 사체 발견 소식이 보도되었다. <유다의 별>을 다 읽고 나면 그 유병언이 진짜 유병언일까 하는 의구심이 생길 수도 있다.
<유다의 별>은 실제 사건, 그러니까 1930년대 경성을 뒤흔들었던 최대의 스캔들 중 하나인 백백교 사건을 모티브로 한다. 백백교라는 종교 집단이 잔혹한 범죄를 일삼으며 교인들의 금품을 갈취하고 목숨까지 앗아가며 세를 키우다가 결국 교주 전용해의 자살로 마무리된 사건이다. 이때 전용해의 머리가 일제시대부터 포르말린에 담겨 전해졌는데,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오랫동안 보관되었던 이 두 표본은 2011년 화장되었다. <유다의 별>은 암호가 새겨진 띠를 찾아다니는 한 남자와 그를 추종하는 무리가 일으킨 살인사건에서 시작한다. 추종자들에게서 절대적인 믿음을 얻어낸 남자가 ‘대원’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 변호사 고진은 이 사건이 백백교와 연관 있음을 알아차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진은 막대한 자금력을 지닌 노인 김성노로부터 백백교가 숨겨놓은 7천억원 가치의 일본 국채를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유다의 별>은 사이비 종교와 얽힌 미스터리물이 갖춰야 할 모든 것은 다 갖추고 있다. 사람을 홀려서 죽음도 불사하게 만드는 카리스마 교주, 밀실살인과 연쇄살인, 범인이 눈앞에 있는데 잡지 못하는 알리바이 공작, 오랜 시간 묵은 보물, 그리고 반전에 반전이 이어지는 결말까지. 전용해가 실제 어떤 인물이었고 그의 머리가 남아 있었던 것을 미스터리의 소재로 어떻게 활용할까를 치밀하게 고민한 흔적도 곳곳에서 엿보인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Warning 주인공 고진의 유머감각이 소설 속에서는 썰렁하다고 묘사되는데, 정말 썰렁하고 가끔은 너무 낡은 유머라 짜증이 난다.
여섯 번째 밤 미쓰다 신조의 <붉은 눈>
상상력이 뛰어난 이들에게 미쓰다 신조의 <붉은 눈>은 근사한 호러 단편집이다. 책 중간중간에는 작가가 알게 된 실제 기담, 괴담을 넣었는데 소설만큼 무섭지는 않지만 실제 이야기라는 점에서 씁쓸한 뒷맛이 오래 남는다. 자, 이제 뭐가 그렇게 무서운지 말할 차례다. 첫 번째 단편 <빨간 눈>. 전학온 한 소녀가 있다.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듯한 소녀가 결석을 하자 주인공은 친구와 둘이 소녀에게 급식으로 나온 빵과 숙제를 가져다주는 일을 맡게 된다. 소녀의 집에 찾아갔을 때 두 소년은 집 안에서 ‘그것’을 본다. 그날부터 밤마다 둘은 소녀가 찾아오는 꿈을 꾸는데, 주인공의 친구는 어느 날 소녀를 이제 집에 들이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그 다음날…. 이 단편의 등장인물은 마지막 <죽음이 으뜸이다: 사상학 탐정>에도 나오는데, 그러다보니 이 안의 세계가 정말 어딘가에서 존재하는 듯한 완결성을 갖춘다. <괴기 사진 작가>는 미쓰다 신조와 유사한 경력을 지닌 남자주인공이 낯선 여자의 소개로 괴기 사진을 찍는 작가의 집을 방문하면서 벌어진다. 때로는 시각적으로 때로는 청각적으로 상상하게 만드는 바람에 꿈에 나타날 듯한 장면들이 여럿 된다. 잔인한 장면이 있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여름밤에는 딱 어울리는 스산함을 맛볼 수 있다. 읽고 나면 표지 그림이 읽기 전의 배는 더 기분 나쁘게 느껴진다.
Warning 밤에 혼자 있을 때 읽지 말 것.
일곱 번째 밤 스티븐 킹의 <닥터 슬립>
스탠리 큐브릭의 공포영화 <샤이닝>으로도 유명한 스티븐 킹의 원작 <샤이닝>의 속편이 36년 만에 출간되었다. 극한의 고통과 어려움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이들의 이후 삶은 어떻게 될까. 생환은 해피엔딩을 뜻하는 것이었을까. 스티븐 킹은 무엇엔가 씌어 가족을 죽이기 위해 날선 무기를 들고 뒤를 쫓았던 아버지를 피해 달아나던 소년과 그의 어머니가 이후 어떻게 살았을까를 상상했다. 영화 장면으로 떠올려보면, 그렇다, 아버지(잭 니콜슨)가 악귀의 얼굴을 하고 도끼를 들고 자신들을 도륙하려고 쫓아다녔던 광경을 아내와 아들은 잊을 수 있을까. 샤이닝은 영적 능력을 뜻한다. 타인의 생각을 읽거나 죽음을 예견하거나 죽은 존재를 볼 수 있다. <샤이닝>의 소년 대니는 바로 그런 능력의 소유자로, 눈으로 고립된 텅 빈 오버룩 호텔이 실은 이승을 떠나지 않는 유령들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읽어냈다. 그리고 이제 성인이 된 댄은 더이상 대니라고 불리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술이 없으면 잠들지 못하는 상태에 이른다(이쯤에서 전작의 독자/관객은 댄이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음을 눈치챌 것이다). 맨정신으로는 자꾸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기 때문에 그 목소리들을 지우려고 술을 선택한 것이다. 호스피스 일을 하는 댄은 한 작은 마을에 정착하는데, 그곳에서 술 끊는 모임에 나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죽은 자의 소리가 아니라, 댄보다 강한 샤이닝을 가진 한 소녀가 태어나 성장하는 것. 샤이닝을 가진 어린아이를 고통에 빠트려 그 기운을 먹고 생을 이어가는 집단 ‘트루 낫’ 역시 소녀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댄은 소녀를 구하기 위해 나선다. 그렇게 <닥터 슬립>은 공포소설이자 성장소설이 된다. 댄이 알코올중독과 기나긴 사투를 벌이는 과정은, 그 자신이 알코올중독으로 고통받았던 스티븐 킹이 특히 강점을 보이는 강렬한 묘사로 이루어져 있다. 소설의 마지막이 주는 뭉클한 감동은 그 모든 고통에서 살아남은 모든 이를 위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스티븐 킹은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샤이닝>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생각은 여전한 것 같다.
Warning 무슨 사건이 어떻게 일어날지 모르는 상태로 댄의 현재 상황을 우울하게 지켜보는 초반부를 견뎌야 한다.
여덟 번째 밤 마쓰모토 세이초의 <구형의 황야>
언제나 기본은 한다. <구형의 황야>는 마쓰모토 세이초 최고의 걸작은 아니지만 이 기사를 위한 11권의 책을 고르는 과정에서 몇몇 책들은 쉽게 탈락시킬 정도의 기본기를 갖춘 사회파 미스터리다. 1962년에 출간된 뒤 일본에서 8번이나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기이한 시작에서부터 감동적인 마무리까지의 흐름이 안정적이다. 세쓰코는 패전 직전 스위스에서 돌아가신 외교관이었던 외삼촌이 좋아했던 나라의 절에 갔다가 외삼촌 특유의 필체로 쓰인 방명록의 글씨를 발견한다. 기억을 더듬어 외삼촌이 좋아했던 또 다른 절을 몇곳 찾았는데 또 한곳에서 마찬가지의 글씨체로 쓰인 글씨를 찾아내자, 외숙모와 그 딸 구미코에게 사실을 전한다. 구미코와 교제 중인 신문기자 소에다는 사망했다고 알려진 노가미 겐이치로에 대해 조사할수록 관련자들이 입을 다무는 모습을 보고 뭔가 있다고 느낀다. <구형의 황야>는 집전화가 아니면 연락이 닿지 않던 시절(1978년작이다)의 이야기다. 사람들은 수없이 엇갈리고, 일일이 찾아다니는 일은 퍽 고되다. 그 덕에 엇갈림의 묘미가 살아 있다. 더불어, 전쟁 막바지에 해외에서 근무 중이던 외교관들에 대한 상상은 아슬아슬한 과정을 통해 결말로 이어지면서 감동을 낳는다. 마지막 장면을 보면 왜 이 소설이 몇번씩이나 드라마와 영화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다.
Warning 마쓰모토 세이초 작품을 처음 접한다면 이 책 말고 권할 만한 좋은 책이 많다.
아홉 번째 밤 오사카 고의 <모즈가 울부짖는 밤>
테스토스테론이 폭발하는 느낌. <본 아이덴티티>처럼 기억을 잃은 킬러가 등장한다. 한 남자가 기억을 잃은 채 죽을 위기에서 살아난다. 그를 안다는 남녀가 등장해 신가이 가즈히코라는 이름을 알려주고 집으로 데려가던 중 갑자기 죽이려고 한다. 신가이라고 불린 남자는 이 살해 시도가 처음이 아님을 알아차리고 그들을 죽인 뒤 도망쳐 나온다. 한편 신가이는 (기억이 없지만) 신주쿠에서 일어난 무차별 폭탄테러의 용의자인데 공안형사 구라키 나오타케는 그 사건으로 아내를 잃는다. 누가 왜 자신을 죽이려는지 알아내려는 신가이와 그를 뒤쫓는 구라키, <모즈가 울부짖는 밤>은 화자를 바꾸어가며 독자를 속이며 마지막 반전으로 끌어들인다. 자고로 이런 장르의 소설에서 ‘신원 파악이 불가능한 사체’와 ‘기억을 잃어버린 주인공’만큼 수상쩍은 것은 없는 법이다. 마지막 반전을 향한 이런 장치들과 더불어 육탄전을 마다하는 법이 없는 남자들이 등장하는 <모즈가 울부짖는 밤>은 여러모로 꽤 ‘센’ 소설이다. 마지막에 관련자들이 둘러앉아 말로 전말을 풀어버리는 대목이 약간 김새기도 하지만 결국은 그마저도 육탄전으로 해결하는 특유의 박력이 있다.
Warning 여기 소개된 책 중에는 가장 폭력적이고 잔인한 편이다.
열 번째 밤 에드먼드 벤틀리의 <트렌트 최후의 사건>
엘릭시르에서 올해 나온 책 중 한권을 추리다가 결국 이 책으로 결정한 이유는 역시 ‘고전적인 깔끔함’ 때문이다. 애거사 크리스티가 가장 뛰어난 추리소설 중 하나라고 꼽기도 한 1913년작 <트렌트 최후의 사건>은 트렌트가 주인공인 첫 번째 책이며, 추리소설의 황금시대에 쓰인 걸작들이 흔히 그렇듯 대체로 취향을 타지 않으면서도 읽는 재미가 있으며 지나치게 길지 않다는 장점을 갖는다.
화가 트렌트는 특유의 통찰력 덕에 범죄사건에 대한 기사만으로 범인에 대한 추리를 성공시킨 이력이 있다. 그는 이번엔 재계의 거물이 사망한 사건에 끼어들게 되는데, 집안 사람들이 다 조금씩 수상하다. 문제는 사망한 거부의 젊은 미망인에게 트렌트가 완전히 홀려 있다는 사실. 트렌트 자신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사춘기 사내아이처럼 어쩔 줄을 모른다. 미망인이 “당신 같은 남자한테서 이렇게 감상적인 말이 나오다니. 자제심은 다 어디로 갔나요?”라며 흐느끼듯 호소하는 말에 “멀리 사라졌어요. 조금 있다가 저도 따라 사라지겠습니다”라는 대꾸를 하는 이 못 미더운 화가-탐정이 사건을 완전히 풀어내는 과정 또한 마지막까지 몇번의 뒤척임을 거듭하게 된다. 여자에 홀린 탐정역이 저지르는 실수, 그래서 결국 진실에 접근하는 방식에 미치는 역할은 앞서 소개한 <유다의 별>의 후반부와도 닮아 있다. 범인을 잡지 못한 탐정의 과실 인정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끈기 있게 매달려 독자에게 만큼은 진실을 알려주는 엔딩의 뒷맛이 좋다.
Warning 애거사 크리스티나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의 작품을 지루하다고 느낀다면 이 책이라고 크게 다를 게 없다.
열한 번째 밤 토머스 H. 쿡의 <줄리언 웰즈의 죄>
토머스 H. 쿡의 <줄리언 웰즈의 죄>는 유려한 문장과 잊기 힘들 정도로 강렬한 인물 설정, 그리고 학살의 역사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추고 있다. 코스타 가브라스의 1982년작 <의문의 실종>에 빠져들었다면 이 책에 홀리지 않을 수 없다. 얼마나 생생하게 극중 작가인 줄리언 웰즈를 묘사하는지, 그가 썼다는 책 속의 책들을 몹시 읽고 싶어진다.
줄리언 웰즈는 자살했다. 어느 날 호숫가로 혼자 배를 타고 나가 팔목을 그었다. 유서도 없는 그의 죽음에 줄리언의 오랜 친구였던 ‘나’는 줄리언의 여동생 로레타와 줄리언의 죽음에 대해 알고자 노력한다. 작가였던 줄리언은 한평생 실재했던 살인들에 대한 글을 썼는데,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젊은 여자들을 살인한 여자부터 한 동네에서 유대인이 학살된 사건에 이르기까지 쉬지 않고 써왔다. 살인자들을 도덕적으로 단죄하는 방식이 아니라, 죽어간 사람들 하나하나의 목소리를 살려내고 그들을 잊지 않고자 노력하는 것이 줄리언 웰즈식 글쓰기의 특징이었는데, 그 시작이 된 것은 줄리언과 나의 아르헨티나 여행이었다. 당시 미국 대사관에서 소개해준 마리솔이라는 그들 또래의 젊은 여자 가이드가 있었는데, 어느 날 그녀가 실종된 일이 있었다. 줄리언과 그녀가 아무 사이도 아니었음을 장담할 수 있는 나는 줄리언이 마리솔을 오랫동안 찾았고 심지어 그녀의 실종과 관련 있다는 증거들을 발견하고 놀란다. 정국이 혼란스럽던 그 시절 아르헨티나, 곳곳에 고문실이 있고 대낮 시내 한복판에서 누군가가 트럭에 실려가도 이상하지 않던 시절. <줄리언 웰즈의 죄>는 우정에 대한 회고로 시작해 <의문의 실종>을 닮은 남미의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다가 급기야 <어둠의 심연>(나중에 <어둠의 묵시록>으로 각색되어 영화화된)으로 흘러간다.
소설 속에서 줄리언의 말을 인용하는 대목이 있다. “줄리언은 소련 강제노동수용소의 죄수들이 감방 벽에 다른 어떤 단어보다 더 많이 써놓은 단어가 있다고 했네. 우리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단어, 어머니나 아버지, 하느님 같은 단어가 아니라고 했지. ‘자쳄’이라는 단어였네.” 자쳄은, ‘왜’라는 뜻이다. 남미와 별반 다르지 않았던 역사를 지녔고 그 그늘로부터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한국에서 이 책은 읽고 싶다는 마음과 읽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부대끼는 소설이다. 올해 읽은 (장르 불문하고) 소설을 통틀어 최고.
Warning 성미가 급하다면 “대체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거야!”라며 갑갑해할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