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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성] 20년 내공이 담긴 승부
윤혜지 사진 오계옥 2014-06-30

<신의 한 수> 정우성

“바둑은 만들어진 이후에 한번도 같은 수의 대국이 이루어진 적이 없다.” 정우성의 이 말은 “단 한번도 <비트>의 민과 이어지는 캐릭터를 하려고 했던 적이 없었다”는 말과 같은 의미로 들린다. 또한 그 말은 정우성의 손이 왜 <신의 한 수>로 향하게 됐는지도 잘 알려준다. 착수부터 계가까지. 다음의 인터뷰는 <신의 한 수>와 그의 다른 여러 ‘수’들을 놓고 정우성과 벌인 한판의 대국이다.

착수(着手)와 행마(行馬)

착수 바둑판에 한 수씩 바둑돌을 두는 일. 행마 세력을 펴서 돌을 놓기 시작하는 단계.

“이제야 뭔가 준비가 됐다는 생각이 든다. 무언가를 해보고 싶다기보다 무엇이든 해보고 싶다.” 데뷔한 지 올해로 꼭 20년을 채우는 정우성에겐 지나온 시간의 감회보다 앞으로 나아갈 20년의 시간에 대한 설렘이 더 크다. “지금까진 ‘정우성’이라는 이미지를 드러낸 작품이 많았다. 앞으로 20년간은 내 안의 표정을 제대로 보여주는 시간이 될 거다.”

조범구 감독의 <신의 한 수>는 내기바둑을 소재로 한 액션영화로 프로기사 태석이 내기바둑꾼이었던 형의 죽음을 계기로 각성해 형을 죽음으로 내몬 자들과 맞대결하는 과정을 그린다. “<신의 한 수>는 태석이라는 또 다른 히어로의 탄생기다.” 여러명의 캐릭터들을 말로 놓고 바둑의 규칙과 전술을 활용해 캐릭터 싸움을 펼치는 이 영화에서 정우성은 “신체적 능력은 제로에 가깝지만 정신력이 뛰어난” 태석을 연기한다.

회돌이로 몰다

회돌이 옥집(상대편이 차지하고 있어 내 집처럼 보이면서도 완전한 내 집이 아닌 연결점)이 되는 끊는 점에 사석을 두어 상대편의 돌을 뭉치게 하여 돌려치는 공격 기법.

<신의 한 수>가 품은 비장의 한 수는 태석이 선수(최진혁)와 본격적으로 맞붙는 냉동창고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태석과 선수의 아슬아슬한 속기에 이어지는 맨몸의 액션이 압권이다. “어릴 땐 액션 연기를 할 때는 더 세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 빨리 지치곤 했다. 지금은 경험치가 많다보니 어떻게 하면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더 파워풀하게 보일까 하는 고민만 한다. 연륜이 쌓였다고 할까. (웃음)” 20년 내공이 만만치 않겠으나 질소가스와 냉기로 가득 찬 장소에서 촬영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실제로 숨이 가빠져 대사를 치다 말고 멍해지기도 했다. (웃음) 하필 옷까지 벗어 더 어려웠다. 옷을 입고 있으면 기본적인 안전장치는 할 수 있다. 옷을 입은 채로 액션을 하면 몸이 안 닿더라도 닿은 느낌을 주기 쉽다. 그런데 우린 둘 다 맨몸이니 치는 것도 진짜로 했고 보호구도 착용하지 못했다. 또 내가 막상 촬영을 시작하면 더 강도를 높이는 편이라 최진혁씨가 고생이 많았던 것 같다. 촬영 끝나고 몸살을 앓았다고 하더라.” 그래도 부상은 피하기 어려웠다. 냉동창고 장면을 찍다가 다쳐 팔꿈치뼈가 깨진 것이다. 하나 20년 액션 내공은 부상에도 덤덤하다. 정우성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때를 떠올리며 “아직도 살 속에서 돌아다니는” 팔꿈치뼈를 슬쩍 문질렀다.

사활(死活)을 걸다

사활 자리 잡은 말들이 죽고 사는 시점. 대국의 승부를 좌우하는 절체절명의 순간.

태석이 살수(이범수)와 일대일로 붙으며 영화의 긴장도 최고조에 오른다. 태석은 마치 최후의 악과 담판을 짓기 위해 지옥에 강림한 신의 사자와 같은 모습으로 살수의 아지트에 입성한다. 온통 검정색뿐인 살수의 아지트에서 태석이 홀로 돋보일 수 있는 건 정우성이 직접 고른 올 화이트 슈트 덕이 크다. “화이트 슈트는 내 아이디어였다. 한국영화는 의상 설정에 과감하지 못한 것 같다. 주인공이 너무 멋스러워 보이는 걸 걱정한다. <신의 한 수>는 굉장히 영화적인 영화, 오락적인 영화니까 스테레오 타입의 의상은 심심할 것 같았다. 간단히 생각하면 바둑이 흑돌과 백돌의 싸움이지 않나. 대미를 장식하기에 살수의 블랙 슈트에 맞서 내 화이트 슈트도 괜찮을 것 같았다.”

계가(計家), 그 이후

계가 바둑을 다 둔 뒤에 이기고 진 것을 가리기 위하여 집 수를 헤아리는 과정.

영화가 엔딩을 맞는 순간 관객과 두었던 한판의 대국도 장렬하게 끝난다. 하지만 관객은 이것이 다가 아님을 충분히 짐작할 터. 시나리오상 <신의 한 수>는 ‘사활편’에 속한다. 만일 다음 시리즈가 나오게 된다면 이 이후의 이야기는 교도소에서 태석에게 바둑을 가르쳐준 의문의 존재, ‘귀수’를 찾는 여정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귀수를 찾아나서기 전까지 정우성은 멜로드라마의 숲을 먼저 지나야 한다. 어느 남자배우가 정우성만큼 멜로와 어울릴 수 있을까. 여전히 정우성이 관객을 가장 설레게 만들 수 있는 배우라는 건 그가 언제나 ‘사랑’을 잊지 않기 때문일 거다. “사랑은 마치 파도와 같고 장마와 같은, 인간의 가장 아름답고 격렬한 감정이다. 배우가 가장 아름다워질 수 있는 장르이기도 하다.” 멜로를 향한 한결같은 애정을 입증하듯 그의 차기작도, 앞으로 연출할 작품도 멜로다. 멜로는 멜로인데 저마다 개성이 다른 “독특한 멜로”들이다.

임필성 감독이 연출하는 <마담 뺑덕>은 고전 <심청전>을 현대로 옮겨와 각색한 치정극이다. 치정극도 멜로의 한 부분이랄 수 있지만 ‘치정’보단 ‘로맨스’가 어울리는 정우성과 바로 연결지점이 생기는 장르는 아니다. 정우성이 연기하는 심학규는 “겉모습만 번드르르한 대학교수”로 인기도 많고 바람기도 많다. 정우성의 지금까지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파격적인 도전이 될 캐릭터”다. “임필성 감독님은 나 아니면 안 한다고 하셨다. (웃음) 캐릭터가 참 복잡하다고 생각했다. 멋지다가도 한순간에 ‘찌질’해진다. 한국영화 역사상 가장 파격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사 신이 나올 수도 있다. 감독님은 왜 나를 시험에 들게 하시는지….”

정우성이 제작과 주연을 겸한 이윤정 감독의 <나를 잊지 말아요>도 멜로다. <나를 잊지 말아요>는 사고로 기억을 잃은 남자 W가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리게 되면서 W와 W가 사랑하는 여인이 겪는 일들을 다룬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스크립터였던 이윤정 감독이 2010년에 발표한 동명의 단편으로부터 출발한 영화다. 처음엔 “좋은 제작사나 찾아줄 생각이었던” 정우성이 직접 두팔 걷어붙이고 나서게 된 건 역시 “드라마의 새로움과 독특함에 끌린 것”이 가장 큰 이유다. 또 하나, “정우성의 열렬한 팬”인 이윤정 감독의 ‘순정’ 때문이기도 했다. “남자주인공 이름이 왜 W냐고 물었더니 ‘우성이라고 쓸 순 없잖아요’ 이러는 거다. (웃음)”

정우성의 오랜 꿈, 연출도 멜로를 통해 이루어질 것 같다. 뮤직비디오 여러 편과 단편영화 <킬러 앞에 노인>을 연출한 바 있지만 본격적인 장편 연출 데뷔는 아직 준비 단계다. “요즘은 우리 사회에 결여된 감정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특이한 러브스토리가 될 거다. 잘되려면 보편타당한 이야기를 다뤄야 할 텐데 꼭 꼬아놓은 얘기에만 끌려서. (웃음) 조영욱 PD와 박은교 작가가 나와 함께 원안을 작업 중이다.”

“영화라는 ‘신기루’를 잡겠다고 뛰어다니던 철부지 소년”(<씨네21> 318호)은 어느새 중년의 문턱에서 서성이고 있다. 하나 정우성은 여전히 소년의 마음을 가진 청년인 것만 같다. <신의 한 수>로 또 한 차례 도약할 정우성의 20년이 새로이 궁금해진다.

‘신의 한 수’를 놓기 전 깔아둔 포석(布石)

‘7’은 정우성과 유독 궁합이 좋은 ‘수’다. 정우성의 영화 데뷔작인 <구미호>는 1994년 7월에 개봉했다. 정우성을 청춘의 표상으로 만들어준 <비트>는 1997년 작품이다. 한국영화의 SF사를 새로 쓴 <유령>은 1999년 7월에 개봉해 34만7965명의 서울관객을 모아 그해 한국영화 흥행순위 7위에 올랐다. <무사>는 2001년 9월7일에 공개됐고, 2003년 7월에 발표된 <똥개>는 (제작까지 포함하면) 곽경택 감독의 7번째 영화다. 2008년 7월17일에 개봉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은 668만5988명의 스코어를 세워 그해의 흥행 왕관을 거머쥐었다. 2009년 <호우시절>에서 눈부신 케미스트리를 보여줬던 상대역 고원원과는 크랭크인 일주일 전에 만난 사이다. 정우성이 4년 만에 한국 영화계로 돌아와 참여한 <감시자들>은 2013년 7월에 개봉했다. 태석, 살수, 주님, 꽁수, 선수, 왕사범, 배꼽까지 7명의 캐릭터들이 묘수를 펼쳐 보이는 <신의 한 수>의 개봉 역시 <감시자들>과 똑같은 날인 7월3일이다. 이만하면 ‘7’과 연이 없다고만은 못할 터. 포석을 이 정도로 해두었으니 <신의 한 수>가 정우성의 필모그래피에 결정적 한 수를 꽂아넣기만을 기다리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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