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여곡절 끝에 들어가는 영화라 설렜을까.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감독 김성호)의 스탭과 배우가 한자리에 모인 서울 시내의 한 고깃집에서 삼거리픽쳐스 엄용훈 대표는 한시도 가만있질 않았다. 투자자들을 자리에 안내하랴, 배우들과 스탭들을 챙기랴, 행사를 진행하랴, 몸이 열개라도 부족해 보였지만 얼굴만큼은 무척 환했다. <도가니>(2011), <러브픽션>(2012) 이후 그가 2년 만에 내놓는 신작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은 미국의 유명 작가 바버라 오코너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 경제 불황으로 아버지가 가정을 내팽개치면서 주인공 소녀 지소(이레)는 엄마 정현(강혜정)과 길거리에 나앉게 생겼는데, 새집을 얻는 데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이웃집 할머니(김혜자)가 애지중지하는 개를 훔치면서 벌어지는 성장담이다. 따뜻한 이야기가 꼭 엄용훈 대표의 착한 심성을 닮았다.
-배우와 스탭이 상견례하는 ‘500만 출정식’으로 고사를 대신했다. =고사가 종교적인 색채를 지닌 의식은 아니지만 천주교나 기독교 신자가 많은 배우진을 고려해 배우와 스탭들이 상견례하는 자리로 마련했다.
-500만이라는 숫자를 부담스러워한 사람은 없었나. =모두 단순하지만 목표가 정해져 있어 좋아하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500만 관객을 넘어보지 못했다. <도가니>도 466만여명(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집계)을 동원했을 뿐이다.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은 동명의 아동성장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각색하기로 한 이유가 뭔가. =전세계적으로 경기 불황을 겪으면서 가장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소설가 바버라 오코너가 이 책을 쓴 이유는 가장이 부재한 시대를 풍자하기 위해서다. 우리나라처럼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가장이 자신의 책임을 포기한 채 가정을 떠나면 얼마나 큰 혼란이 발생할까. 나 역시 경제적으로 가족을 고생시켰던 가장이었기에 이 질문이 실감나게 다가왔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조폭마누라3>(2006) 이후 8년 만에 영화에 복귀한 최민수다. =‘판타지’스러운 노숙자 ‘대포’ 역할이다. 원작에도 등장한다. 지소에게 때로는 아빠 같기도 하고, 때로는 키다리 아저씨 같은 조력자다.
-노숙자 역할에 최민수를 떠올린 이유가 궁금하다. =누군가가 최민수 선배를 조심스레 추천했다. 그 얘기를 들은 사람 모두 ‘최민수 선배가 하겠냐’고 해서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 얘기를 들은 뒤 <SNL 코리아>에 출연한 최민수 선배를 보니 천진난만하시더라. 많이 망설였지만 짝사랑만 하지 말고 고백이나 해보고 차이자는 마음으로 시나리오를 드렸다. 좋게 보셨는지 자신의 작업실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최민수를 캐스팅하기 위한 작전은 없었나. =작전보다는 우리가 작품을 처음 대했던 마음가짐처럼 진심으로 호소해보자는 마음을 가지고 나갔다.
-실제로 만나본 최민수는 어떤 사람이던가. =어린이, 어른 할 것 없이 약한 사람 앞에서는 자애롭고, 예의 바르고, 자유로운 사람. 그날 선배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최민수라는 사람에 대한 궁금증이 많이 풀렸고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선배님께서 “최근 이렇게 좋은 시나리오를 못 읽은 것 같다. 이야기 속 어린이들을 위해서라도 어른들이 도와줘야 할 것 같다”고 흔쾌히 출연을 결정해주셨다. 출연을 결정한 뒤 분장, 의상을 고민하고 김성호 감독에게 의견을 구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 순수하고 열정적인 분이라는 것을 느꼈다.
-주인공 지소 역에 이레를 캐스팅한 건 <소원>에서 그가 보여준 연기 때문인가. =그렇다. 굉장히 어려운 역할을 담담하게 보여준 이레의 당찬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실제로는 재기 발랄한 소녀다. 그 모습에 흠뻑 빠졌다.
-이 밖에도 김혜자, 강혜정, 이천희 모두 오랜만의 영화 출연이다. 조합이 신선하다. =김혜자 선생님은 지소가 훔치려는 개의 주인인 노부인 역을, 강혜정씨는 남편이 가족을 둔 채 떠나면서 지소와 땅바닥에 나앉게 된 엄마 정현을 맡았다. 강혜정씨나 모든 배우들의 캐스팅 비하인드 스토리가 많은데 아직은 아껴둬야 하니 얘기하기 어렵다. (웃음) 이천희씨는 소설에 등장하지 않는 수영이라는 남자를 연기한다. 모두 오랜만에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들이라 운명적인 조합이 아닌가 싶다.
-각색하는 데 오래 걸렸다. 복잡하지 않은 사건임에도 시간이 걸린 이유가 뭔가. =일단 미국이라는 다른 사회의 이야기를 한국식으로 바꿔야 했다. 두 작가가 이야기를 다양한 버전으로 각색했는데 결국 원작의 정서에 가깝게 접근하는 게 맞다는 판단을 했다. 그렇게 결정한 뒤 구조를 튼튼하게 쌓고, 속도를 리드미컬하게 전개하는 데 꽤 긴 시간이 걸렸다.
-투자자들은 어떤 이유로 이 이야기에 난색을 보였나. =이야기에 난색을 보인 적은 한번도 없었다. 아무래도 영화의 규모가 작다는 것. 요즘에는 많은 예산이 투입되어야 실패 확률이 낮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또 필요 이상의 폭력이 오가고, 피가 낭자하는 작품이 많이 나오는 최근의 트렌드에서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따뜻한 가족 이야기가 투자받기는 쉽지 않았다. 이 영화를 세일즈할 때 누구를 대상으로 어떻게 팔아야 할지 감이 안 선다고도 했다. 그 말에 공감을 하지만 그 논리를 모르는 것도 아니기에 다양한 전략을 세우며 준비해왔다.
-리틀빅픽쳐스의 대표이기도 하다. 리틀빅픽쳐스가 배급해도 되지 않나. =(담배를 꺼내며) 협의 중이다.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은 아직은 리틀빅픽쳐스가 자금을 조달하기 쉬운 작품이 아니다. 여러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스스로 자금을 조달하다보니 더 힘들게 왔다. 무엇보다 리틀빅픽쳐스의 대표로서 공정하고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자세 때문에 하나만 생각하면 될 문제를 여러 방향으로 고려해야 하니까 힘들고 복잡하다. 인터뷰가 나갈 때쯤이면 아마도 어디든 잘 정리될 거다.
-얼마 전 담배를 끊었다고 하지 않았나. =딸 때문에 오래 끊었는데, 미안하게도 최근 다시 피우기도 한다. 투자 때문에 힘들 때는 피우다가 투자되고 난 뒤 다시 끊었는데. 이번 영화는 사람을 너무 힘들게 하는 것 같아 완전히 끊는 게 힘들다. 시간이 지나면 영화가 쉬울 줄 알았는데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 같다.
-삼거리픽쳐스만 운영하는 것도 힘든 일인데 어쩌다가 리틀빅픽쳐스까지 맡게 됐나. =사실 부담스러웠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말이다.
-명필름 이은 대표, 청어람 최용배 대표, 리얼라이즈픽쳐스 원동연 대표 등 한국영화제작가협회(이하 제협)의 선배 제작자들이 떠민 건 아닌가. =어떻게 보면 가장 막내고. 음… 그래서 일단 1년만 맡는 걸로 하고 있는데… 훌륭한 전문 경영인이 맡아야겠지.
-리틀빅픽쳐스 얘기를 더 해보자. 협동조합 방식으로 시작했으나 지금은 주식회사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공공적 목적을 가지고 출발한 만큼 초반에는 협동조합 운영방식이 검토됐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협동조합은 자금 조달부터 수익 분배, 배급 규모까지 여러 한계가 있는 까닭에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주식회사 방식의 운영이 필요했다. 물론 공정한 거래와 합리적인 수익 배분이라는 창립 목적은 변함이 없다.
-영화계 일각에서는 리틀빅픽쳐스의 취지에는 공감하나 자금 확보의 어려움을 예로 들며 안정적인 운영이 쉽지 않을 거라는 우려도 있다. =기존의 방식을 A, 리틀빅픽쳐스와 같은 시도를 B라고 치자. 우리는 A만 있는 게 아니라 B라는 대안도 하나 더 있다는 얘기다. A는 A대로 기존의 역할을 수행하면 된다. B라는 새로운 시도와 움직임은 거래를 합리적으로 하고, 수익을 공정하게 배분함으로써 산업의 질서를 모범적으로 이끌 수 있으니 그렇게 부정적으로 바라볼 문제는 아니다. 자금 조달이 투자배급사로서 가장 중요한 관건인 만큼 다양한 방법을 시도 중이다. 10개 회원사의 출자금을 비롯해 기술보증기금이 운영하는 문화산업완성보증제도, 부산영화투자조합, 제1금융권의 대출 상품 등 다양한 자금 조달 방법을 마련하고 있다.
-영화를 시작하기 전 대기업 재무팀에서 10년 동안 일했다. 그 뒤 IT 투자와 기업인수 합병 일도 했는데 그 경험이 삼거리픽쳐스와 리틀빅픽쳐스를 운영하는 데 어떤 영향을 끼치는 것 같나.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시나리오, 예산 집행, 마케팅 전략 등 여러 가지를 추상적으로 계획하지 않고 일일이 수치화해서 투자자를 설득하는 게 버릇이 됐다. 어떤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더욱 효율적이고 예측 가능한 대처를 할 수 있다.
-누구보다 대기업을 잘 알고 있는 만큼 대기업과의 관계에 공을 들여도 될 텐데 자꾸 대안적인 비즈니스 방식을 모색하는 이유가 뭔가. =난들 왜 안 그러고 싶겠나. 남들이 하지 않는 이야기만 골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비즈니스적으로 쉽게 진행되지 않는 이야기만 골라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통해 사회의 다양한 이야기를 보여주고 싶다. 상업적으로 잘 포장해서 말이다. 대충대충하는 성격이 못 돼서 스스로 무덤을 파는 건지도 모르겠다.
-가족들은 투자받기 어려운 영화만 한다고 걱정하진 않나. =‘다른 사람들처럼 액션, 스릴러 같은 오락영화도 좀 하지. 안 하는 거야, 못하는 거야 아빠?’ 그러고. (웃음) 나도 그런 작품 하고 싶다.
-안철수 의원이 신당을 창당할 때 새정치추진위원 8인으로 합류하기도 했다. 정치에도 뜻이 있나. =에이 무슨. 직업 정치인으로서 활동하는 건 아니다. 더구나 최근에는 알다시피 안철수 의원의 새정치연합이 민주당과 합당한 뒤 유능한 국회의원들이 많아져서 지금은 날라리 같은 존재다. (웃음) 선거가 끝난 지금은 추진위원 8명끼리 온라인을 통해 자주 대화도 나누고, 같이 모여서 식사하거나 차도 마시면서 돌아가는 상황을 공유한다. 나는 문화산업 정책에 관련한 의견을 들려주고.
-요즘에도 <도가니>의 피해자였던 인화학교 출신 친구들을 만나러 광주를 찾나. =그럼. 광주에 가면 아이들의 자립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홀더’라는 카페가 있다. 자주는 못 가지만 일이 있을 때마다 광주에 내려가면 들른다. 바쁜데 귀찮지 않냐고? 전혀. 내려갈 때마다 아이들이 성장해 있다. 이젠 어엿한 바리스타가 된 아이들도 있어서 자신의 일을 전문가처럼 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뿌듯하고 좋다. <도가니> 상영 전부터 몇년간 아이들을 후원하기 위해 도가니대책위원회에서 <행복의 도가니>라는 콘서트를 열었는데 지난해는 여러 사정으로 못했다. 나라도 여유를 찾아서 대책위원회, 주변 사람들과 함께 논의해 사회적인 관심이 소홀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 같다.
-주변 일에도 관심을 쏟고 참여를 하는 성격은 <도가니> 때 생겨난 건가. =어릴 때부터 그런 성격이었던 것 같다. 직업 정치인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도 사회의 이런저런 일에 참여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왔다. 광주 인화학교 성폭력 사건의 경우, 공지영 작가가 소설을 쓰고, 기자들이 기사를 써도 관심을 쏟지 않는 이 사회가 무서웠다. 영화가 아니면 피해자의 진실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을 것 같더라. 당시 감독, 배우, 스탭, 투자자, 배급사, 마케팅사 모두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참여했기에 <도가니>라는 작품이 나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오랜만에 현장에 나간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어떤가. =그동안 몸이 근질근질했다. 똑같은 밥차 밥을 먹어도 제작자로서 먹는 것과 손님으로서 먹는 것은 밥맛이 천지 차이다. 투자받으러 돌아다닌 일 생각하면 힘들었지만 굉장히 설렌다. 정말 잘 만들어서 많은 관객과 소통하고 싶은 간절함이 있다.
엄용훈 대표는 삼거리픽쳐스 대표, 리틀빅픽쳐스 대표 말고도 제협 부회장, 서울영상위원회 부위원장 같은 감투도 여럿 맡고 있다. 제작만 집중하기도 쉽지 않은데 일을 벌이는 이유가 궁금했다. “처음 영화계에 발을 들였을 때 안타까운 일들이 많았다. 당시 선배들이 그런 일들을 챙겨주길 원했는데…. 남들보다 늦게 영화 산업에 들어온 사람으로서 봉사를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여러 일을 맡긴 했는데 내 깜냥으로는 모두 감당하기 힘든 것 같다. 다 내려놓고 영화만 열심히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