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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가와 교코] 마음이 몸을 이끄니
정지혜 사진 최성열 2014-06-18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가가와 교코 회고전’으로 한국 찾은 가가와 교코

구로사와 아키라, 나루세 미키오, 미조구치 겐조, 오즈 야스지로. 일본 영화계의 거인들을 열거하는 건 배우 가가와 교코를 설명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 같다. 가가와 교코는 일본영화의 황금기라 불리는 1950, 60년대를 이들 감독들의 작품에 출연하면서 보냈다. 자신의 연기 인생의 중요한 한 시절을 거장들과 함께했다는 것만으로도 가가와 교쿄는 주목받곤 한다. 더욱 놀라운 건, 1932년생인 그녀가 여전히 배우로서 자신의 원칙을 지키며 활동 중이라는 사실이다. 일본 영화사의 산증인인 이 노배우가 제16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가가와 교코 회고전’을 기념해 한국을 방문했다. 그녀는 일본인 최초로 국제영상자료원연맹(FIAF)의 ‘필름 보존상’을 수상할 만큼 영화 자료의 보존에도 적극적이다. 이번 회고전에서도 그녀는 이런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며 과거의 영화들과 그 시절의 촬영현장에 대한 생생한 증언자로 나섰다. 지금부터 전하는 인터뷰는 가가와 교코가 회상하는 자신의 연기 인생사이자 동시에 일본 영화사에 대한 짧은 기록이다.

-지난해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특별전’으로 첫 내한한 데 이어 올해는 본인의 회고전으로 한국 관객과 만났다. =한국의 여성영화제에서 내 회고전이 열려 뜻깊다. 관객과의 대화 자리에도 참석했다. 건강과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을 묻는 일본 관객과 달리 한국 관객은 영화에 대한 구체적인 질문을 많이 하더라. 어떻게 대답할지 고민을 해가며 진행했다.

-일본 영화사에 짙은 인장을 새긴 감독들과 두루 작업했기 때문이 아닐까. 마침 어제 <동경 이야기>(1953) 상영이 있었다. 오즈 야스지로 감독과의 작업은 어땠나. =오즈 감독님은 본인의 영화 그대로다. 사람이 달리거나 손을 요란하게 움직이는 신도 없다. 낮게 카메라를 세팅하고 배우의 앉는 자리도 지정해주신다. ‘쓸데없는 연기는 하면 안 되겠구나’ 싶더라. 감독님의 <동경 이야기>에 출연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뻤지만 또 좋았던 건 동경해오던 배우 하라 세쓰코와 함께 연기했다는 거다. 내가 연기한 막내딸 교코가 실제 내 나이와도 비슷해 연기하는 데 무리는 없었다. 다만 오노미치 지역의 사투리 연기가 어려워 감독님이 주신 테이프를 계속 들어야 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과는 <밑바닥>(1957)을 시작으로 <나쁜 놈일수록 잘 잔다>(1960), <천국과 지옥>(1963), <붉은 수염>(1965)을 비롯해 그의 유작인 <마다다요>(1993)까지 꽤 많은 작품을 함께했다. =감독님은 원신 원컷 진행이 많다. 한번 등장했다가 빠지고 또 등장했다 빠지고. 마치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것 같다. 기본적으로 감독님 영화에는 여배우가 적고 남자배우가 많다. 또 대사는 없지만 내가 모든 장면에 걸쳐 두루 나오다보니 언제나 출연하고 있는 것처럼 연기를 준비해야 했다.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을 읽고 다른 배우들의 연기에 리액션을 하는 거다.

-미조구치 겐지 감독은 리액션 대신 ‘반사’라는 말을 썼다. 배우 연기를 극한으로 밀어붙이는 걸로도 유명한데. =지금까지도 “반사”라는 감독님의 말이 뇌리에 박혀있을 정도다. 감독님은 화를 내진 않지만 원하는 연기가 안 나오면 여러 번을 찍더라도 꼭 만들어내신다. 필요하다면 현장에서 배우의 입에 붙게 대본 수정도 하시고. 감독님 작품에 출연한 배우들이 구로사와 감독님 작품에 합류할 때면, “미조구치 감독님 밑에서 배운 배우들은 알아서 잘하니까 구로사와 감독님이 편하게 촬영하시겠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본인의 최고의 작품으로 미조구치 감독의 <차카마츠 이야기>(1954)를 꼽은 바 있다. =촬영할 땐 정말 힘들었다. 감독님은 연기란 머리로 생각해서 되는 게 아니라고, 그날 찍을 신에 임하는 마음을 생각하다보면 몸이 자연스럽게 움직일 거라고 하셨다. 나도 그게 연기의 기본이라고는 생각했지만 막상 그렇게 연기를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연기한 오산이라는 여자가 도망가 있는 모헤이를 쫓아가는 신을 연습할 때였다. 오산은 어딜 다녀본 경험이 거의 없는 여자다 보니 누굴 쫓는 게 힘이 들어서 다리를 절게 된다. 그런데 하도 여러 번 그 장면을 찍다보니 내가 진짜 힘들어서 다리를 절게 되더라. 그러다가 내가 무방비 상태로 넘어졌고 가슴을 땅에 세게 부딪혔는데, 슬픔이 확 북받쳤다. 그때 자연스럽게 연기가 됐다. 그걸 보신 감독님이 이제 본 촬영에 들어가도 되겠다 하시더라. 지금도 60년 전 그 때 그 감각이 몸에 남아 있다. 머리가 아닌 몸이 기억하는 것, 그게 연기자에게는 중요했던 거다.

-<엄마>(1952), <안즈코>(1958)를 함께한 나루세 미키오 감독은 친근하게도 당신을 “교짱”이라고 불렀다는데. =“교짱, 할머니가 돼서도 연기할 거야?”라고 감독님이 물으시더라. 어린 나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할 거예요”라고 대답했다. 감독님은 촬영장에서도 별 말씀이 없는 담담한 분이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정시 촬영이 그의 원칙이다. 촬영이 늦게 끝나는 일이 없었다는 건 감독님의 머릿속에 모든 계획이 딱 짜여 있다는 얘기다.

-이 많은 감독들 가운데 당신에게 연기의 맛을 알게 해준 감독을 꼽아달라고 한다면. =연기를 많이 가르쳐주신 미조구치 감독이 아닐까. 거장 감독님들과의 작업도 좋았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품은 또 다르다. (웃음) 데뷔 초에는 시마 고지 감독이 친절히 연기 지도를 해주셨다. 오소네 다쓰오 감독의 <옥문장>(1955), <유전>(1956)도 내가 아낀다. 특히 <유전>은 일주일 만에 춤과 일본 전통 악기인 샤미센을 연습해 투입된 터라 색다른 경험을 했던 작품이다. 스승이 소중히 여기는 악기를 지키는 적극적인 여성 역이라 더욱 애착이 간다.

-거장들을 만나기 전, 그러니까 데뷔와 연기 활동 초창기에 대해서는 많이 회자되지 않았다. 배우는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건가. =고교 졸업반 시절,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 대학 진학은 어려웠고 취직을 해야 했다. ‘이게 나의 일이다’ 하고 남들 앞에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었다. 1949년 1월에 <도쿄신문>에 ‘뉴페이스 노미네이션’이라는 배우 모집 공고가 났다. 남 앞에서 이야기도 잘 못하고 ‘배우가 되겠다’는 생각도 안 해본 내가 대뜸 지원을 한 거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잘한 건지, 잘못한 건지 모르겠지만. (웃음) 그리고 얼마 뒤 연락이 왔고 최종 면접까지 통과했다. 당시 나를 포함해 총 9명이 뽑혔고 나는 신도호(1950년에 거대 프로덕션이었던 ‘도호’로부터 완전히 독립해 독자의 영화 배급망은 갖게 된 독립 프로덕션.-편집자)로 갔다. 다른 프로덕션인 도호, 쇼치쿠로도 각각 3명씩 입사했다.

-신도호에서의 연기 생활은 어땠나. =연기라는 게 책상머리에 앉아서 공부한다고 될 일이 아니잖나. 간혹 선배들이 연기 지도를 해주긴 했지만 다들 바쁘다보니 기본적인 연기 공부는 제대로 못했다. 촬영장 구석에 서서 선배들의 연기나 감독님들의 연출법을 보고 기억해가며 공부했다. 17살에 고교 졸업하자마자 바로 신도호에 들어갔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나는 도저히 여배우의 얼굴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학생이 그냥 진학한 느낌이랄까. 화장도 안 하고, 머리도 학생 때 그대로 양 갈래로 땋아서 묶고, 옷도 마땅하지 않아서 기모노를 수선해 원피스라고 만들어 입고 다녔으니. 하지만 촬영장의 자유로운 분위기만큼은 나와 잘 맞았다. 매일매일이 즐거웠다.

-그러다 3년 뒤, 프리 선언을 하며 신도호를 떠난다. 신생 독립 프로덕션들이 줄줄이 생겨나고, 프로덕션이 소속 배우들을 적극적으로 ‘키우던’ 당시 일본 영화계 상황을 고려해보면 상당히 파격적인 선택이다. 게다가 전속 배우에게는 월급제로 고정 수입도 보장됐을 텐데 그걸 뒤로했다. =내 스케줄을 남이 정해준다는 게 싫었다. ‘제멋대로’라고 볼 수도 있는데 내 일은 내가 결정하고 싶었다. 신도호도 나름 내 의견을 존중했고 ‘뉴페이스’ 출신의 배우들에게 신경을 많이 써줬지만 나와는 맞지 않았다. 상황이 그렇게 되니 연기가 점점 하기 싫어지더라. 물론 입사했다는 이유만으로 아무것도 안 했는데 당시 돈으로 월급 3천엔을 받은 건 상당한 수입이었다. 일본 영화계가 활황이던 시절이기도 했고. 근데 프리 선언을 할 때는 일이 없으면 수입도 없다는 생각을 안 한 거다.

-연기 경력 3년차면 아직 배우로서의 입지가 완전히 다져지기도 전이었을 텐데. 어떻게 보면 상당한 자신감의 표현이고 달리 보면 무모한 선택 같다. 혹시 다른 여배우들 중에도 프리 선언을 한 사례가 있나. 아니면 남자배우들에게만 흔한 일이었나. =듣고 보니 내가 무모했던 것 같다. (웃음) 여자든 남자든 프리 생활을 하는 배우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내가 그런 선택을 했기에 이후에 <히메유리의 탑>(1953), <동경 이야기> 등에 출연할 기회를 얻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선택하지 않으면 성에 안 찬다. 작품 출연도 마찬가지다. ‘감독님들의 부름을 받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같은 두려움은 전혀 없었다.

-프리가 되고 출연한 <히메유리의 탑>을 통해 배우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고 털어놨다. 이번 영화제에서 관객과 함께 대화하고 싶은 작품으로 가장 먼저 꼽기도 했는데. =전 일본인이 오키나와의 비극(태평양전쟁 기간 중 오키나와에서 어린 여학생들을 간호부대, 탄약운반부대에 동원해 전쟁의 참상을 경험하게 한 일을 말한다.-편집자)을 알아야 한다는 이마이 다다시 감독님의 말씀을 듣고 나니 나도 사명감이 생기더라. 1945년 8월15일 나는 공습을 피해 도쿄에서 시골로 피난을 갔다. 다행히 내게는 별일이 없었지만, 같은 시기 나와 비슷한 또래 여학생들이 비극을 겪었다고 하니 충격이었다. 전쟁이 시작되면 반드시 비극은 일어난다. 한국 관객도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거다. 관객이 일본에서도 이런 비극이 있었다는 걸 알아주길 바라며 선정했다.

-이번 영화제를 통해 국내 첫 개봉하는 괴수영화 <모스라>(1962)도 인상적이다. 출연 분량은 적지만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여성 카메라맨으로 등장한다. =<고지라>(1954)의 혼다 이시로 감독을 그리워하며 골라봤다. 또 내가 활동적인 역을 좋아한다. 나의 출연작 중에 이처럼 유쾌한 영화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당시의 특수효과도 볼 수 있고 조그만 요정 피너츠도 귀엽다. 삽입곡도 대유행했다. 어른, 아이 모두 볼 수 있는 즐거운 영화다.

-<붉은 수염>을 끝내고 결혼과 동시에 미국으로 건너가 3년간 머물렀다. 결혼한 여자배우로서 공백기를 갖는다는 데 두려움은 없었나. 돌아왔을 땐, 일본에 TV 시대가 열리는 등 매체 환경에도 변화가 생겼다. =미국에 가기 전 도쿄에서는 정말 일만 했다. 밥솥도 만질 줄 몰랐다. 그런 내게 집안일이며 아이들을 돌보면서 지낸 미국 생활은 또 다른 수양의 시간이었다. 돌아와 다시 연기하던 초반에는 TV가 영화와는 다르구나 싶었지만 이내 괜찮았다. 카메라를 보고 연기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거니까.

-더이상 주인공 역만 할 수 없게 됐을 때, 심리적 갈등도 겪었을 것 같다. =고민이 없지 않았다. 40대 때는 제안이 들어와도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어서 못했고 그렇게 50대 초반까지도 연기를 하지 않았다. 그러다 사람은 누구나 다 변하기 마련이라고 생각했다. 처음 엄마 역할을 하게 됐을 때, 내 어깨에 들어가있던 힘이 쫙 빠지면서 굉장히 편안했다. 지금은 한결 여유로워졌다.

-과거와 비교했을 때 요즘 영화 현장은 어떤 것 같나. =감독이 절대적인 존재였던 과거와는 많이 다르다. 그땐 오즈팀, 구로사와팀 이런 식으로 감독 중심으로 여러 명이 움직였는데 이젠 개개인이 독립적으로 작업한다. 촬영장을 소유해 영화를 자체 제작하던 영화사가 많이 없어진 것도 그렇다. 지금이 영화를 만들기 어려운 시대인 것은 맞는 것 같다.

-올해로 배우 인생 65년째다. 배우로서의 바람이 있다면. =예나 지금이나 출연 작품을 스스로 판단해 결정한다는 건 변치 않을 거다. 물론 지금은 제안이 많이 들어오진 않지만. 또 하나는 과거 일본영화를 알리는 데 내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적극적으로 나서고 싶다. 그 시절의 이야기가 궁금하다고 하면 내가 할 수 있는 한 말하려고 한다. 앞으로도 일본영화를 많이 보고 즐겨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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