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는 남자>의 최모경(김민희)은 울고 또 운다. 한없이 ‘우는 여자’ 최모경의 사연은 딱하고 또 딱하다. 모경은 아이를 잃은 충격에서 벗어나지도 못한 채 치매에 걸린 엄마의 병수발을 들어야 한다. 죽은 남편이 연루된 사건으로 툭하면 경찰에 소환된다. 심지어는 그 자신이 킬러 곤(장동건)의 타깃이 되어 쫓긴다. 서로를 죽이려고 에너지를 뿜어대는 거친 남자들 사이에서 가냘픈 모경은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다. 탈진할 정도로 우는 가련한 모습을 보고 있자면 저러다 도망치기도 전에 쓰러지는 게 아닐까 걱정이 앞선다. 그런데 이상하다. 보통 여자 캐릭터가 지나치게 울면 답답하기 마련인데 모경이 울면 울수록 어쩐지 영화에 눌어붙은 피와 땀이 지워지는 듯한 착각이 든다. 핏물로 범벅된 곤의 지저분한 얼굴을 모경이 눈물로 대신 씻겨주는 것 같기도 하다. 피와 액션으로 점철된 <우는 남자>에서 관객의 숨통을 틔우는 건 전적으로 모경의 맑은 얼굴이다. 김민희의 얼굴도 시간의 결을 따라 천천히 ‘이미지’에서 ‘실체’가 되어간다. 청춘스타 김민희가 어느덧 ‘생활의 공기’를 입고 주변의 많은 것들과 교감하며 점점 ‘사람’에 가까워지고 있다.
-이정범 감독의 영화에서 여자 캐릭터의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 <우는 남자>에 출연하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모경이 두드러지는 캐릭터가 아닌 건 맞다. 그런데도 <우는 남자>는 내 필모그래피에 꼭 남기고 싶은 영화였다. 겉으로 보이는 액션만큼이나 내면의 감정을 중시하는 영화다. 킬러의 마음을 움직이는 여자라는 데에 명확한 내 역할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정범 감독님과 얘길 나눠보니 생각과 감정이 참 잘 맞았다. 이분과의 작업이라면 모경이란 인물이 빛을 낼 수 있겠다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완성된 영화는 시나리오보다도 모경에게 훨씬 불친절하다. 모경이 속내를 드러내는 신들이 최종 편집 단계에서 많이 삭제됐다. =모경이 홀로 시네마테크를 찾아 맥주를 홀짝이는 장면, “사실은 아이가 귀찮았던 것”이라고 엄마에게 속을 털어놓는 장면 등 모경을 설명해주는 장면들이 많이 없어져서 처음엔 속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모경의 여성성이 많이 지워진 대신 아이를 잃어 아파하는 모습은 더 잘 전달된 것 같다.
-이정범 감독은 “캐릭터의 감정을 충분히 갖고 있는 김민희의 얼굴을 믿었기 때문에” 모경의 개인적인 장면을 많이 들어냈다고 했다. =곤이 액션을 하는 만큼 모경은 감정을 표현해야 했는데 생각만큼 만족스럽지 않을 때도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그 찜찜함을 떨칠 수가 없어서 감독님께 문자를 보냈다. ‘연기가 너무 어렵다. 내가 하고 싶은 건 100인데, 그게 뭔지 아는데 밖으로 표현하는 게 너무 힘들다, 부족한 것 같다’고. 감독님은 내가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다고 하셨다. 늘 아쉽고 불만족스러운 건 배우로서 당연히 하는 고민일 테고, 연출자로서 충분히 선택권을 가질 수 있게 의지를 보여줘서 고맙다고 말이다.
-시나리오에선 모경이 좀더 당돌하고 사회적인 캐릭터였는데 막상 영화를 보니 참 가냘프더라. =누가 연기하느냐에 따라 인물의 성격이 많이 바뀐다고 생각한다. 모경이란 사람이 품고 있는 지친 모습을 조금씩 보여주고 싶었다. 초반 파티 장면에서 내가 너무 많이 웃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나중에야 들었다. 또 내가 마른 편이다보니 외적으로 그런 분위기가 생긴 것 같다. 일부러 조금 아파 보이길 원한 것도 있다.
-특유의 불편해 보이는 표정도 좋았다. =모경은 살아 있는 것 자체를 불편하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초반에 특히 그런 표정을 많이 짓는다. 외부 사람들이 나에게 궁금해하는 것들을 원천 차단하려 한다고 할까. 조금 더 계산해서 연기한 건 있었다.
-감정적인 스트레스가 상당했겠다. 뒤로 갈수록 육체적으로도 힘들었을 텐데. =내내 혼자 감정 신을 연기했기 때문에 얻어맞는 장면도 기뻤다. 그것도 일종의 교감이잖나. 상대 배우와 합을 맞추면서 적극적으로 말을 할 수 있었던 게 나름 즐거웠다. (김)희원 선배님이 워낙 여리시다. (웃음) 번갈아가면서 얼굴을 클로즈업하는데 내 얼굴 찍는 부분에서 선배님이 내 목을 조를 때 힘을 못 쓰시는 거다. 좀더 세게 해주셔도 좋았을 텐데, 생각했다. 반대로 희원 선배님 얼굴 찍을 땐 선배님도 연기에 집중하니까 힘 조절이 안 되시더라. 내 목을 정말 꽉 쥐시고…. (웃음)
-모경은 죽은 딸의 기억을 견디며 살고 직장에선 일을 하고 퇴근 뒤엔 치매에 걸린 어머니의 오줌을 닦는다. 이제 김민희의 얼굴에도 ‘생활’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이는 가져본 적 없지만 모경으로서 감정을 가질 순 있으니까.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얼굴에 시간의 깊이가 생기는 것도 있는 것 같다. 여배우로서 나이 들어가는 게 두렵지 않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그런 건 정말 전혀 없다. 오히려 나이 들면서 만들어내지 않아도 표현이 가능해지는 것들을 얻는다. 내 얼굴, 잘 나이 먹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아이도 잘 본다. (웃음)
-스타로서 김민희의 삶은 그다지 궁금하지 않으나 생활인으로서의 김민희는 궁금할 수밖에 없다. 보통의 하루 일과는 어떤가. =나는 부지런한 사람인 것 같다. 일을 하지 않아도 하루가 너무 바쁘다. (웃음) 오늘 내가 해야 할 것, 이번주에 해야 할 것, 이런 식으로 스케줄을 짜서 움직인다. 짬짬이 생기는 시간 활용도 잘한다. 보통 9시쯤 일어나서 집에서 오전을 보내고 점심 먹고 밖에 나간다. 은행 갈 일 생기면 직접 가고, 장도 직접 본다. 일기? 일기는 이제 안 쓴다. 감정이 좀… 메말랐다. (웃음) 그렇지만 날씨, 그때그때의 감정, 책이나 영화, 주변의 작은 일들과 관계들까지 모든 게 다 나에게 좋은 영감을 준다. 둘러보면 주변에 배울 것들이 참 많다는 걸 이제 점점 알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