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한국필림보관소”란 이름으로 시작한 한국영상자료원이 창립 4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다. 그리고 매년 이맘때쯤 항상 관객을 설레게 했던 고전과 복원을 테마로 한 정기 기획전이 어느 때보다 특별한 상영작들과 함께 찾아온다. 총 8개 섹션, 50편이 넘는 영화들로 알차게 꾸린 이번 프로그램 중 가장 눈길을 끄는 섹션은 ‘극장전(劇場傳), 어둠 속에 빛이 비출 때’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섹션에서는 ‘극장’과 ‘영화’를 소재로 삼은 영화들을 상영한다. 극장을 배경으로 한 총 17편의 영화에 대한 영화들을 만나볼 수 있다.
이 작품들 중에서도 비교적 낯선 작품들에 먼저 관심이 간다. 이를테면 아르헨티나의 주목할 만한 감독 리산드로 알론소의 <판타스마>(2006)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작은 극장을 배경으로 한 영화이다. 몇명의 사람들이 작은 극장을 찾아 영화를 보는 것이 이야기의 전부이고 대사보다는 일상적인 소음이 더 도드라지는 이 60분짜리 영화는 극장이란 공간을 채우고 있는 유령(판타스마)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극장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바탕으로 영화의 환상성을 이야기하는 영화는 유머와 오싹함 사이를 미묘하게 오가며 물질인 동시에 물질이 아닌 영화의 이상한 성격에 대해 고민한다.
우루과이에서 만들어진 페데리코 베이로 감독의 <쓸모 있는 삶>(2010)은 실재하는 극장을 배경으로 한 또 다른 영화다. 25년째 작은 시네마테크에서 일한 주인공은 어느 날 정부의 지원이 끊긴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는다.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은 물론 극장 직원이라면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이 영화는 망한 극장을 배경으로 자조의 분위기를 자아내며 우울함을 풍기다가 어느 순간 낙관 섞인 유머를 내세우며 다시 미소를 짓게 한다. 한편, 극장이 있는 곳에는 항상 열혈 관객이 있다. ‘시네필’에 대한 다큐멘터리 <시네매니아>(2002)는 수많은 시네필에게 복잡한 심경을 안겨줄 문제적 작품이다. 뉴욕에 거주하는 열혈 시네필의 삶을 기록한 이 영화에는 지인의 장례식에도 가지 않은 채 매일 3~5편의 영화를 보는 시네필과 티켓을 찢은 극장 직원의 목을 조르는 시네필, 그리고 “영화는 삶의 대체물이고 삶의 형식입니다”라고 당당히 말하는 시네필이 떼로 출연한다.
물론 심각한 작품만 있는 것은 아니다. 람베르토 바바의 <데몬스>(1985)는 극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상상들을 모아놓은 끔찍하고 신나는 호러영화다. 공포영화를 보러갔다가 머리가죽이 뜯겨나가는 관객의 비명도 기억에 남지만 이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스크린이 찢어지며 영화와 현실이 하나로 뒤섞일 때 만들어지는 이미지다. 이 장면은 물론 공포스럽지만 동시에 그만큼 매혹적이다.
그리고 영화에 대한 영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인 차이밍량의 <안녕, 용문객잔>도 만나볼 수 있다. 특별히 <안녕, 용문객잔> 속 영화인 호금전의 <용문객잔>(1967)도 함께 상영하니 낡은 극장에 앉아 외로워하던 관객의 기분을 함께 느끼고 싶다면 두 영화를 같이 볼 것을 추천한다. 영화제는 7월3일(목)까지 계속 이어진다. 영화를 사랑한다면, 그리고 극장이란 특별한 공간을 사랑한다면 놓칠 수 없는 축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