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자!’는 캐치프레이즈의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16회를 맞았다. 이번 영화제에서는 역사와 동시대의 첨예한 이슈를 다루고 차이와 감성의 영역을 개척하는 총 30개국 99편의 초청작이 상영된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신촌 메가박스에서 5월29일부터 6월5일까지 진행된다.
개막작 <그녀들을 위하여>(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보스니아 내전에서 자행된 폭력의 역사를 고발한 <그르바비차>(2006)로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받았던 야즈밀라 즈바니치의 성찰적 로드무비다. 보스니아 내전 당시 학살이 자행되던 곳은 이제 이국적인 풍경을 전시하는 관광지가 되어 외국인들을 불러들인다. 호주의 연극배우 킴은 동유럽의 유적과 풍광을 관조하며 주민들의 선량한 환대 속에서 보스니아를 여행하지만 이상한 불면증에 시달린다. 그녀는 자신이 관광객의 시선으로 경유하던 곳이 보스니아 내전 당시 강간이 자행됐던 호텔과 학살이 자행됐던 유적지였음을 이후 알게 되고 깊은 정서적 고통과 죄책감을 느낀다. 관광객의 시선을 거두고 성찰자의 시선으로 보스니아를 다시 찾아 카메라를 든 그녀에게 주민들은 공격적이고 풍경은 잔혹하다. 주연을 맡은 실제 연극배우 킴 버르코의 경험을 소재로 하여 폭력의 기억을 불러내며 시선의 윤리를 모색한다.
여성주의적 시선에서 연대와 공감, 성찰과 액티비즘을 제시하는 ‘새로운 물결’ 섹션에는 현재 가장 역동적으로 활약하는 여성감독들의 영화가 포진해 있다. 폴란드 최초로 시집을 낸 집시 여성 브로니스와바 바이스의 실화를 엮어낸 <파푸샤>(폴란드, 요안나코스 크라우제/크지슈토프 크라우제)는 1, 2 세계대전에서의 집시 박해와 사회주의 폴란드에서의 집시의 헐벗은 삶을 매혹적인 흑백 영상에 담아냈다. 파푸샤로 불린 바이스는 후설이 “유럽의 영성”이라고 일컬었던 보헤미안의 영혼을 여성적 언어로 노래한 시인이었으나, 집시 공동체의 관습에 반했기 때문에 불행한 삶을 살았다. <어메이징 캣피쉬>(멕시코, 클라우디아 세인트-루스)와 <호텔>(스웨덴, 리자 랑세트)은 상처를 지닌 사람들이 타인의 삶을 공감하고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가는 과정을 따라간다. 사회주의식 프로파간다 연출법을 배우기 위해 북한으로 간 감독의 엉뚱하고 색다른 체험을 다룬 <프로파간다가 영화를 덮쳤을 때>(호주, 안나 브로이노스키)는 논쟁적인 영화다. 석유 개발에 반대하는 선동적 단편영화를 찍고 싶던 감독은 김정일의 북조선식 영화연출론을 전수받기로 한다. 단편영화를 기획하는 과정에 대한 세미다큐멘터리와 북한식 프로파간다 단편영화가 혼합된 영화적 형식도 흥미롭다. 북한의 영화 자료화면, 영화 제작 실태, 인민들의 실생활 등 박물학적 정보들도 가득한, 맹렬하다기보다 유머러스하고 키치적인 작품이다.
‘쟁점: 사랑과 경제’ 섹션에서는 경제적 가치가 사랑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드는 동시대의 문제를 다룬다. 중국의 신예 류운문의 데뷔작 <과계>(홍콩, 플로라 라우)는 절제된 정서로 정갈하고도 애잔한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다. 홍콩과 중국의 갈등과 차별을 배경으로 하여 가난한 대륙 출신 젊은 가장인 운전사와 정서적/경제적 곤란을 겪고 있는 부유층 중년 여성이 겪는 파국과 공감의 과정을 따라간다. 톤과 화면 구성을 통해 고독한 무드를 창출해내는 크리스토퍼 도일의 카메라워크와 중년 여성을 맡은 유가령의 내면 연기가 인상적이다. <경유>(필리핀, 한나 에스피아)는 텔아비브에 살고 있는 필리핀 이주노동자들의 가족과 육아의 문제를 다루었다. 불법노동자 단속과 이주노동자 자녀 강제 추방령으로 인해 가족은 이산의 위기에 처한다. 불가피한 운명에 처한 이들의 막막한 처지는 엔딩 신에서 오래 관객을 잡아끌 것이다. ‘아시아 스펙트럼’에서는 주변부로 몰린 중국 하층민들의 모습을 담아낸 중국 여성감독들의 실험적인 독립영화들을 소개한다.
‘회고전: 카메라 앞의 삶’에서는 1949년 데뷔하여 1950~60년대 일본영화 황금기에 전성기를 보냈고 이후 독립영화나 텔레비전에서 활약해온 일본의 여배우 가가와 교코의 작품들을 소개한다. 미조구치 겐지, 구로사와 아키라에서부터 동시대 여성감독 이케다 지히로까지 그녀와 함께했다. <동경이야기>(오스 야스지로, 1953)나 <엄마>(나루세 미키오, 1952) 등 거장과 협업한 걸작을 비롯해 오키나와 전투를 배경으로 청춘과 반전을 내세운 좌파적 영화 <히메유리의 탑>(이마이 다다시, 1953)과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패전과 냉전의 트라우마를 반영한 ‘고질라’식 특수촬영물 <모스라>(혼다 이시로, 1962)도 숨겨진 볼거리다.
‘퀴어 레인보우: 열망과 매혹, 포비아를 넘어’ 섹션은 일상에서 성소수자가 겪는 불안을 담는 동시에 사회적 편견에 맞서는 열혈 액티비즘까지 제시한다. 퀴어영화가 지닌 대중성의 한계를 돌파해내려는 시도는 코미디 장르를 차용한 레즈비언영화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질, 이성애도전기>(미국, 미셸 엘렌)는 이성애자가 되기로 결심한 질이 전 애인이자 레즈비언 단역배우인 제이미에게 엉뚱한 시험을 하는 과정을 유러머스하게 따라간다. <마가리타>(캐나다, 도미니크 카르도나/로리 콜버트)는 멕시코 불법체류 가사도우미가 중산층 가족 및 동성애인과 겪는 우여곡절을 따뜻한 시선으로 품는다. 동성애를 향한 차별과 혐오감은 반동성애법으로 악명 높은 러시아의 호모포비아를 다룬 <영 앤 게이, 푸틴 러시아>(영국, 밀렌 라르손)와 남아공의 인종, 종교, 젠더 차별을 파고든 <레즈모포비아>(스웨덴, 미 발케스탈 외)와 같은 다큐멘터리들에서 가장 쟁점적으로 드러난다.
‘아시아 단편경쟁’ 섹션에서는 재능 있는 아시아 여성감독을 발굴하여 시상하고 있다. <청소시간>(이스라엘, 알라모크 마르샤)과 <말라리아와 모스키토>(타이, 핌파가 토위라)는 아시아 여성의 노동, 경제, 이주의 문제를 다룬다. 고아원에서 성장한 소녀가 난생처음 자신의 부모를 살해한 조부와 치매에 걸린 조모를 만나러 가는 과정을 따라간 <나이아가라>(일본, 하야카와 지에)는 단정한 프레임에 인간에 대한 절제되고 속 깊은 이해를 담아낸 인상적인 단편으로, 올해 칸국제영화제에도 소개되었다. <콩나물>(한국, 윤가은)은 할아버지의 제삿날 심부름을 간 소녀의 경이로운 모험담이다. 독립영화의 흔한 배경인 달동네를 식상하게 만들지 않는 알찬 공간 활용과 아역배우 김가은의 범상치 않은 연기가 돋보인다. 청각장애 남매의 고달픈 하룻밤을 다룬 <미드나잇썬>(한국, 강지숙)에서는 보이지만 들리지 않는 세계를 사는 사람들의 감각을 잡아내는 시네마틱 터치가 감지된다. <뮤즈가 나에게 준 건 잠수병이었다>(한국, 김세인)는 만듦새는 다소 투박하지만 감성을 구현해내는 직관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올해부터는 아시아 단편경쟁에 10대 여성영화인들을 발굴하기 위한 ‘아이틴즈상’이 신설되어 창의적이고 발랄한 10대들의 영화도 소개된다.
시민의식과 공동체의 공감대가 약해지면서 여성과 사회적 약자들이 겪는 불합리를 합리적이고 개방적인 담론 공간에서 논의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강퍅한 경제논리와 동일성의 폭력, 근본주의적 맹신에 밀려 절망하는 이들에게 단편 <탈리타 쿰>(한국, 박헌영)이 제시하는 잠언이야말로 본 영화제의 취지에 맞는 가장 정치적인 슬로건이 될 것이다. 우리가 왜 여기서 절망해야 하는가? 해방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으므로 탈리타 쿰, 소녀여 일어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