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ovie > 무비가이드 > 씨네21 리뷰
[Review] 칸다하르
2002-02-26

시사실/ 칸다하르

■ Story

아프가니스탄 출신으로 현재는 캐나다에 살고 있는 저널리스트 나파스(닐로우파 파지라)는 칸다하르에 거주하는 여동생으로부터 20세기 마지막 개기일식이 일어나는 날 자살하겠다는 편지를 받고 그녀의 죽음을 막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온다. 그녀는 고향 칸다하르로 향하는 한 가족의 네 번째 부인으로 위장하여 여행길에 오른다. 그러나 강도를 만나 그녀는 혼자 사막에 남겨지고 이번에는 코란학교 퇴학생인 칵(사두 테이모우리)의 안내를 받아 다시 칸다하르로 향한다. 우물물을 잘못 마셔 병을 얻은 나파스는 동네의 진료소를 찾아갔다가 무자헤딘 출신의 의사 사히브(하산 탄타이)를 만나 도움을 얻는다. 나파스는 한 결혼식 행렬에 몸을 감춘 채 동생을 찾아가지만 개기일식의 시간이 점점 다가온다.

■ Review 9·11 테러사건이 마흐말바프의 <칸다하르>를 그 이전과는 상이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해석의 장으로 이동시켜놓았음은 분명하다. 기억의 저편에 자리하고 있던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가 어느새 우리 의식 위로 갑작스레 돌출해버렸으니 말이다(하지만 우리는 또 빠르게 잊어가고 있는 중이다).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마흐말바프 자신이 쓴 글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미얀의) 석불은 파괴된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에 스스로 무너져내린 것”이라는 뼈아픈 표현을 기억할 것이다. 석불의 파괴에 대해서는 그토록 유감을 표시하면서도 아프가니스탄 내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겐 조금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 상황을 마흐말바프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칸다하르>가 이런 도덕적 호소만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아님은 분명하다. 우리가 이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고 기어이 아프가니스탄의 역사적 상황과 미국의 보복공격 이후의 일들에 대한 자료를 다시 한번 뒤적이게 되는 것은, 마흐말바프 영화 속에 내재한 설명하기 힘든 아니 차라리 응시하기 힘들다고 말해야 할 어떤 아이러니 때문이다. 부르카를 입고 전신을 감싸 숨긴 채 살아야 하는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가를 파악하기란 어렵지 않다.

“당신이 부르카를 입고 있는 이 여성들을 볼 때, 외적으로는 미적인 조화로움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안에서는, 즉 부르카 안에는 질식할 듯한 상황이 존재하고 있다. 그건 이상한 모순이다. 그녀들에겐 자신들의 신체적 아름다움을 보여줄 권리가 없다. 대신 의상의 아름다움을 이용하는 것이다.” 칸다하르로 향하는 도정 가운데 그녀들이 손톱에 물을 들이고 팔찌를 고르는 행위, 이것은 결국 드러내 보이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무언가를 욕망한다는 사실 자체로 인해 우리를 숙연하게 만든다.

<칸다하르>는 부르카가 지닌 화려한 색채들을 매개로 이미지의 힘과 기원을 묻는 영화이다. 이 영화는 고다르의 <사랑의 찬가>와 함께 지난해 칸영화제에 동시에 도착했다. 전쟁은 이미지화될 뿐 아니라 이미지의 속성을 바꾼다. 찍어서는 안 될 것을 찍는다는 행위는 마침내 윤리적인 긴장을 불러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어떻게든 윤리적인 긴장을 거세하고 나면 전쟁은 카메라를 위한 더할 나위 없이 매혹적인 사건으로 탈바꿈한다. 정말이지 이미지는 전쟁을 위해 태어난, 아니 전쟁이 이미지를 위해 존재해왔던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은 (그 오랜 내전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어떤 식으로든 자신들의 전쟁과 그로 인한 상처를 드러낼 이미지를 가져본 적이 없다. 그래서 윤리 대신 가혹한 율법만이 남았던 것이다. 마흐말바프는 아프가니스탄을 ‘이미지 없는 국가’라고 부르며 할리우드가 만들어낸 <람보3>의 무대로서만 존재했던 사실을 환기시킨 바 있다. 윤리적인 긴장을 드러내기 위해 고다르와 같은 주저함이 깃든 응시 대신 마흐말바프는 아이러니를 선택한다. <칸다하르>가 초래할 수 있을 가장 위험한 귀결은 이 영화가 ‘이미지 없는 국가’ 아프가니스탄을 위한 아름다운 부르카처럼 되는 것이다. 일단 마흐말바프는 이 위험을 감수한다.

언뜻 아프가니스탄 하면 떠올리기 쉬운 참혹한 정경 대신 화면을 메우는 것은 예기치 못한 아름다움이다. 낙하산에 매달려 떨어지는 적십자 구호품(의족과 의수)을 얻기 위해 목발에 의지한 채 전력을 다해 달려가는 일군의 사람들을 보여주는 고속촬영 장면의 정서적 효과는 압도적이다. 여러 사람에 의해 회자된 이 장면과 더불어 더욱 섬세한 배려가 느껴지는 것은 바로 칸다하르로 향하는 결혼식을 앞둔 신부의 행렬이다. 어둠의 심장으로 파고드는 이 행렬의 외양은 어딘지 심상치 않다. 주인공 나파스의 동생이 자살하려고 하는 그곳으로 그들은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떠난다. 그런데 그 위에 흐르는 노랫가락은 어쩐지 장송곡처럼 들린다. “나는 그토록 애절한 결혼식 축가를 들어본 적이 없다.” 이제 결혼식 행렬은 장례식을 위한 당혹스러울 만큼 화려한 죽음의 사신들의 행렬이 된다.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은 그 자체로 초현실적이다.” 개기일식은 지상에 어둠을 불러오지만 한편 그것은 어둠을 응시하는 커다란 동공처럼 보이기도 한다.

팔다리가 잘린 사람들, 코란을 암송하며 무기의 기능을 읊조리는 아이들, 사막에 버려진 시체, 기아로 허덕이는 사람들 속에서 나파스가 동생을 위한 희망의 전언을 찾기란 힘든 일이다. 그녀가 부르카 속에 감추고 있는 테이프 레코더조차 어떻게 될지 모른다. <칸다하르>는 온갖 미디어의 시선이 전세계를 뒤덮고 있다고 생각되는 지금, 그 시선의 여백을 발견한 자- 혹은 그 자신 여백에 놓여 있는 자- 가 터뜨리는 탄식과 같은 영화다. 그런데 이제 그 여백은 무너져내린 무역센터의 이미지 앞에서 다시 한번 <람보3>의 무대처럼 펼쳐진다. 유운성/ 영화평론가 akeldama@netian.com

<칸다하르>의 여백 읽기

하루 340명이 죽는 곳

촬영 도중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난민들을 보며 충격을 받기도 했다는 감독의 심정은 영화 <칸다하르>에 잘 드러나 있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영화를 찍는 행위만큼이나 영화가 그 태생부터 짊어지고 있는 죄의식을 잘 드러내 보여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마흐말바프가 아프가니스탄 난민에 관한 영화를 만든 것은 <칸다하르>가 처음은 아닌데 이미 1987년에 <싸이클리스트>(이 영화는 몇년 전에 국내 텔레비전에서도 방영되었다)를 통해 그들의 삶을 다룬 바 있다. 이 영화를 보고 찾아온 여주인공 나파스 역의 닐로우파 파지라의 이야기가 <칸다하르> 제작에 한 동기가 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흐말바프는 자신이 수집한 자료들을 토대로 이미 한편의 글을 발표한 바 있는데 라는 제목의 이 글은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www.makhmalbaf.com 혹은 www.kandaharthemovie.com). 그는 다음과 같은 서늘한 말로 글을 시작하고 있다. “당신이 이 글을 주의 깊게 읽는 데에는 한 시간 정도가 걸릴 것이다. 바로 그 한 시간 동안,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전쟁과 기아로 인해 적어도 열네명 정도가 사망할 것이다.”

이어 세계인들의 아프가니스탄 상황에 대한 무지와 오해에 대해 언급한 뒤 몇몇 통계적 수치들을 제시하며 아프가니스탄의 현 상황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고 있다. “지난 20여년 동안… 매년 12만5천명, 하루로 치면 대략 340명, 시간당으로는 14명, 5분당 1명이 살해당하거나 죽어갔던 것이다.” 그 밖에도 아프가니스탄 내부의 종족문제(크게는 탈레반 정권으로 대표되는 파슈툰, 하자레, 우즈벡, 타지크족 등), 사진과 영화 및 텔레비전 시청의 금지, 여성문제에 대한 언급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칸다하르>의 여백을 뒤지는 이들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글이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