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순 감독(가운데)과 <레드마리아>를 응원해준 6인의 여성뮤지션들.
발신인 경순 감독 수신인 한경은 사진작가 계원예술대학교 사진학과를 졸업하고 중앙대학교 대학원 사진학과에 재학 중인 신진 사진작가. 2008년 서울디자인페스티벌, 2012년 브레다국제사진페스티벌, 2013년 <로드쇼: 대한민국-백령도> 등 다양한 그룹전을 통해 활발히 활동 중이다.
경은아. 나는 참 게으른 사람이다. 그 게으른 나에게 영화를 만드는 일조차 없었다면 아마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빈둥거리는 삶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며 살았을지도 모르지. 더구나 다큐멘터리영화란 얼마나 많은 품이 필요한지 일단 제작이 시작되면 끝날 때까지 빈둥거리며 게으름을 피울 시간이 없으니 말이다. 근데 왜 또 찍고 또 찍고 그러냐고 누군가가 물어본다면 그것은 바로 미지의 사람을 만나는 즐거움 때문이 아닐까 싶다.
너는 <쇼킹 패밀리>를 준비하면서 만난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참 특별한 인연이었어. 출연자로 만나 <쇼킹 패밀리>와 <레드마리아> 두편의 영화 스탭까지 하게 됐고 장장 6년의 시간을 함께했으니 말이야. 처음 친구의 소개로 너를 만났을 때만 해도, 그리고 너의 불행한 결혼생활 이야기를 줄줄이 카메라 앞에 풀어놓을 때만 해도, 너는 상상도 못했겠지. 너의 피와 땀을 내가 아낌없이 쪽쪽 빨아먹을 줄은. 이런 갑자기 웬 뱀파이어 버전인지.
경은아, 생각나니? 네가 착한 년 콤플렉스로 위장하고 있을 때 말이야. 내가 그랬잖아, 너는 본성이 독하고 강한 년인데 왜 그렇게 약한 척하냐고 말이지. 근데 지금의 너를 보렴. 서른이 넘어 사진 공부하겠다고 대학을 다시 가더니 학기마다 수석하며 1등을 먹어치우고 다시 대학원에 들어가 쉬는 날도 없이 암실에 처박혀 수많은 사진을 뽑아내면서도 한달에 한번 아들을 만나는 날이면 빼놓지 않고 아들과 지낼 이벤트를 준비하는 너의 근성을 말이야. 아으, 독한 년. 그래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 못 따라가는 부지런함을 너는 갖고 있었잖아.
그렇게 너는 나에게 가장 힘든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어느새 내가 가장 힘든 시기에 가장 강한 모습으로 나를 지지해주는 동지이자 친구가 되어 있었어. <쇼킹 패밀리>에서는 주인공 중 한명으로, <레드마리아>에서는 멋진 사진작가로, 한국과 필리핀 그리고 일본 여성들의 배를 찍어주었지. 특히 <레드마리아>를 제작할 때 너는 보호자처럼 늘 옆에서 나를 지켜봐주었어. 어쩌다 시기도 그렇게 겹쳤는지 갑자기 동생이 위암으로 죽고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결국엔 나까지 수술을 하게 되었을 때도 너는 마치 내 보호자가 된 것마냥 옆에 있어 주었지. 누군가를 지켜봐준다는 건 얼마나 든든하고 멋진 일인지. 그 덕에 나는 영화를 무사히 끝낼 수 있었어.
경은아. 내가 이런 말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요즘 체력이 왜 이렇게 달리냐. 나 에너지가 필요해. 아무리 바빠도 정기적으로 에너지 보급 좀 해주고 가면 안 되겠냐. 뭐 네 사진 전시 준비로 정신이 없겠다마는 그래도 넌 힘 솟는 40대잖니. 뭐라고? 약한 척하지 말라고? 하하하. 그래, 영화를 만들면서 만나게 된 출연자를 비롯해 스탭들과 후원자들, 그리고 영화에 대한 자문과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이 늘 내가 또 다른 영화를 꿈꾸게 만들어준 원동력이었지. 잊지 않으마. 여러분, 저 <레드마리아2> 제작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