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화 내가 기획했잖아.”
그럼 뭘 했냐고 물어보고 싶어진다. 아이디어를 낸 사람도, 그것을 낼 때 거들어줬던 사람도, 거드는 사람 옆에서 맞장구를 쳐줬던 사람도 스스로를 기획자라 칭하곤 한다. 떠돌이 시나리오를 제작사에 연결해주었거나 투자사에 소개해줬을 때도 기획에 이름을 올려달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때론 그 공을 인정하여, 혹은 뒷말 듣기 싫어서 엔딩 크레딧에 공동기획자로 이름을 올리는 경우도 있다. 특히 처음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들은 너도나도 ‘기획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 때문에 저작권을 포기하고 꿈까지 포기하는 경험을 많이 한다. 작가들의 경험담을 모으면 정말 그럴싸한 바보들의 합창이 될 것이다. 그래서 입문하는 작가들을 만나면 정색하고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글 안에서 똑똑해지세요. 그래야 살 수 있어요.” “글 밖에서는 더 똑똑해지세요. 안 그러면 살지 못해요. 나도 바보였으니까요.” 무슨 일이냐고요?
어쩌다 보니 처음으로 시나리오를 쓰게 되었다. 지인의 소개로 이름 있는 제작사의 이사이자 자기 회사를 따로 차릴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 몇번의 회의를 거쳤고 몇번의 각색을 마쳤다. 계약금은 나중에 잘되면 주겠다며 나름 열심이었다. 어느 날에는 진행비라며 한달에 30만원씩 주겠다고도 했다. 그 자리에서 안 받는다고 했다. 자존심이기도 했고 그런 돈에 묶이기 싫었다. 투자를 받지 못한 채 1년 가까이 지났다. 그러나 현직 이사이자 예비 대표인 그 사람은 한다 안 한다, 된다 안 된다, 당최 말이 없었다. 양해를 구하고 다시 각색을 해서 직접 투자사를 찾았다. 겨우 투자 결정을 받고 계약서까지 작성했는데 그 사람이 소리치며 나타났다. ‘그 영화 내가 기획했잖아!’ 목소리는 제법 컸고, 분쟁을 우려한 투자사는 계약을 철회했다.
무슨 일은 그러니까 그런 일이었다. 돈을 받지 않는다고 자유로울 거라고 착각하지 마시라. 나도 그랬지만 따지고 보면 그 사람도 인생을 투자했다. 그럼 어찌해야 하느냐. 영화 기획이란 하나의 아이템에서 시작해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감독을 선정하고 캐스팅을 마쳐 제작에 들어가 개봉을 하기까지의 전 과정이다. 정의는 간단하나 범위는 상당하다. 중간에 말을 섞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다. 답은 두 가지라 말해준다. 첫째, 시나리오작가는 기획자가 아니라 저작권자니 저작권법을 공부하세요. 둘째, 누구나 반할 만큼 좋은 글을 쓰세요. 전자는 글 밖에서 똑똑해지는 방법이고, 후자는 글 안에서 똑똑해지는 방법이에요. 저작권법이야 배우면 된다지만 누구나 반할 시나리오를 쓰라니, 화가에게 슈퍼리얼리즘을 표방하는 추상화를 요구하는 일이며 작곡가에게 알레그로하면서도 아다지오한 노래를 부탁하는 행위다. 하지만 모든 시나리오는 이런 불가능을 안고 시작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나리오를 쓰기 전에, 쓰고 난 뒤에도 기획 회의는 끝나지 않는다.
작가에게도, 제작사한테도 기획의 첫 단계는 ‘무엇을 쓸 것인가’로 수렴된다. 오래전, 하리마오 픽쳐스 임영호 대표가 기획에 대해 했던 말이 있다. 기획을 하는 데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는 원작을 사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은 원작은 그만큼 성공 가능성이 높다. <다세포소녀>와 <아파트>를 시작으로 <이끼>와 <은밀하게 위대하게>를 거쳐 <포인트 블랭크>(표적)와 <소수의견>까지 다양한 영화들이 만들어졌고 지금도 기획 중이다. 단점은 판권 구매에 적지 않은 돈을 투자해야 한다는 것과 원작보다 재미있어야 한다는 압박감이다. 이 방법은 제작사의 것이지 개별 작가의 것이 되기는 힘들다.
다음은 시의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시의적절한 주제나 소재 혹은 배우를 중심에 두고 글을 쓰는 방법인데, 시의성이 떨어지기 전에 빨리 제작을 해야 하는 영화다. 하지만 너무나 시의적절한 영화여서 ‘기획영화’라는 평을 받는 경우가 많다. 기획이란 단어는 어디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부동산 기획’은 전문가 향기가 나지만 ‘기획 부동산’은 사기꾼 냄새가 나는 것처럼. 하지만 ‘기획영화’가 저평가되는 것은 안타깝다. 단지 내가 그 영화의 주 관객층이 아니라고 생각해주길 바랄 뿐이다.
또 다른 방법은 장르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죽이는 액션영화’나 ‘여름을 목표로 한 공포영화’ 혹은 ‘워킹타이틀풍의 달달한 로맨틱 코미디’식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기존에 나왔던 영화를 분석하고 현 재 기획되는 영화를 점검해 틈새를 노리거나 변종 장르를 만들어내는 경우가 있다. 처음 시나리오를 시작하는 작가들에게 권할 만한 방법이다. 각자가 몸에 맞는 옷이 있는 것처럼 대부분 작가에게는 결에 맞는 장르가 있다.
나머지 방법은 소재적 접근과 주제적 접근이다. 소재적 접근은 작가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그리고 편하게 취하는 방법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 스토리 공모 대전을 심사하는 동안 동일한 소재의 비슷하면서 약간 다른 이야기가 너무 많아 놀란 적이 있다. 마지막으로 주제적 접근이 있는데, 어쩌면 가장 바람직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어떤 상황에도 작가들은 그 물음에 대답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데요?” 소재가 죽이잖아요, 원래 먹히는 장르잖아요, 요즘은 이런 게 통한다니까요, 라는 대답은 안 통한다. 주제의식이란 마음의 깃발, 그것이 없으면 글이 길을 잃기 때문이다.
간략하게 정리한 <굿바이 사이공> 스토리를 들고 임 대표와 마주했다. “하고 싶은 말이 뭔데?” 그렇게 물어볼 줄 알았다. 질문을 미리 알고 있었으니 대답도 청산유수다. “몰라서 물어요?” 8년 동안 한솥밥을 먹었는데 새삼스럽게 왜 물어보나. 그러나 이런 여유는 이 자리로 끝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검증을 받아야 할 단계다. 이 스토리를 나만 좋아하는지, 다른 사람들도 좋아하는지, 무엇보다 모든 사람들이 좋아할 기획인지 의견을 모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버전의 피칭(pitching)을 준비해야 한다. 어떤 이야기인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 영화 <타짜>에 나온 경상도 아귀의 대사를 듣게 된다. “이게 어디서 약을 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