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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 덴치] <필로미나의 기적>
김보연 2014-04-29

주디 덴치

<필로미나의 기적>이 주는 감동의 팔할은 주디 덴치에게서 나온다. 어렸을 때 낳은 아들을 잃어버렸다가 긴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아들을 찾아나선 필로미나라는 이름의 실존 인물을 연기한 주디 덴치는 이 영화에서 자신이 단지 강한 인상의 연기만 잘하는 배우가 아님을 새삼스레 알려준다. 낙천적인 미소, 이상한 유머감각, 알 듯 말 듯한 웃음, 그리고 살짝 내비치는 눈물과 함께 자신의 연기 스펙트럼이 ‘007’의 M에서 훨씬 멀리 나간 지점까지 닿아 있음을 관객에게 설득력 있게 보여준 것이다(물론 <007 스카이폴>에서 보여준 그녀의 M에 대한 탁월한 해석은 예외로 하자).

그러나 주디 덴치의 이름을 들었을 때 우리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는, 어쩔 수 없지만, 강인한 여성의 그것이다. 그리고 ‘강인한’이란 형용사는 다음과 같은 말로도 무리 없이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카리스마 있는, 무뚝뚝한, 엄격한, 완강한, 다부진 같은 것들 말이다. 또는 이 기본적인 바탕에 ‘고집스러운’이나 ‘괴팍한’, ‘까다로운’ 같은 말을 더해도 무리 없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녀는 1959년 TV드라마를 통해 데뷔한 이후 100편이 넘는 영화와 드라마에 크고 작은 역으로 출연하면서 주로 강인한 성격의 연기로 이름을 알려왔다.

1934년 영국에서 태어난, 올해 81살의 ‘데임 주디스 올리비아 주디 덴치’는 영국국립극단, 왕립셰익스피어극단 등에서 195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연기 활동을 시작했다. 이때는 의외로(?) <햄릿>의 오펠리아,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 <헨리 5세>의 캐서린 등 여성성을 아낌없이 드러내는 배역을 맡았고 그 뒤 TV로 활동무대를 옮겨 수십편의 드라마에서 활동했다. 그러다 1980년대 접어들면서 점차 영화에 얼굴을 내비치기 시작했는데 그중 한편이 셰익스피어극을 영화로 옮긴 것으로 유명한 케네스 브래너 감독의 <헨리 5세>(1989)였다. 이 영화에서 얼굴에 숯검댕을 묻힌 채 인생의 슬픔을 쓸쓸한 독백으로 들려주는 하녀 넬을 연기한 주디 덴치는 비록 분량이 많지는 않았지만 귀족 남자와 땀냄새 나는 기사들이 떼로 등장하는 영화에서 묵직한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그녀는 활동 무대를 조금씩 영화로 넓혀가기 시작하는데, 그 확실한 전환을 알린 것이 바로 ‘007 시리즈’였다. 1989년의 <007 살인면허> 이후 잠깐의 재정비를 마친 007 시리즈는 1995년 <007 골든아이>와 함께 새롭게 출발했는데, 이때 제임스 본드 역의 피어스 브로스넌 다음으로 주목받은 것은 M 역의 주디 덴치였다. 과거 중후한 느낌의 나이든 남자배우들(버나드 리, 로버트 브라운)이 연기했던 M 역에 심술궂은 인상을 풍기는 중년 여성을 캐스팅한 것은 드라마 <레밍턴 스틸> 속 바람둥이 피어스 브로스넌을 불러온 것보다 어떤 면에서는 더 파격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캐스팅의 결과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그대로이다. 사람들은 곧 주디 덴치의 M에게 제임스 본드가 받은 것 이상의 애정을 보냈고, 결국 피어스 브로스넌의 007이 대니얼 크레이그의 007로 바뀔 때도 주디 덴치는 계속해서 자리를 지켰다. 그녀는 “냉전 시대의 유물”이란 짓궂은 농담을 들으면서도 “아, 정말 냉전 시대가 그립군”이란 시대착오적 대사를 세련된 뉘앙스로 전달할 수 있는 배우였고, 심지어 몇몇 장면에서는 제임스 본드(대니얼 크레이그)와 성적 긴장감까지 빚어내는 매력을 뽐냈다.

그렇게 1995년부터 2012년까지 7편의 007 영화에서 M을 연기하는 동안 주디 덴치는 계속해서 특유의 무서운 표정과 함께 자신의 강인한 연기를 대중에게 깊이 각인시켜나갔다. 그 작품들을 이 자리에서 일일이 열거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그래도 빼놓기 아쉬운 몇편만 이야기하자면 먼저 <셰익스피어 인 러브>가 떠오른다. 말 그대로 ‘여왕’을 연기한 그녀는 이상한 부분에서 시대 고증에 충실했던 감독의 노력 탓에 약간은 웃을 수밖에 없는 머리 모양과 분장을 하고 등장했지만, 극중에서 보여준 카리스마만큼은 절대 웃을 수 없는 위엄을 자랑했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위엄이 넘치면서도 넓은 이해심을 숨기고 있는 캐릭터를 압축적으로 그려냈는데, 특히 남장한 사실이 발각돼 곤란한 처지에 빠진 바이올라(기네스 팰트로)에게 “나도 남자 역할을 하고 있지”라고 뚱하게 뱉은 한마디는 그녀의 익숙한 연기 패턴 중 하나가 이미 이때부터 완성됐음을 보여준다. 즉, 겉으로는 차갑고 무서워 보이지만 시니컬한 유머 한두개쯤은 속으로 항상 준비하고 있는 무뚝뚝하고 귀여운(!) 캐릭터 말이다.

그리고 이 연기에서 웃음기를 빼고 진지한 부분을 제대로 강조하면 <J. 에드가>의 어머니 같은 캐릭터가 만들어진다. 자비로운 어머니인 동시에 무서울 정도로 엄격한 아버지였던 주디 덴치는 어떤 면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직접 연기한 것보다 에드거 후버의 캐릭터를 더 자세하게 설명해준다. 저런 어머니 밑에서 자란 인물이 어떤 성격적 결함을 갖고 있을지 저절로 그려질 정도로 뚜렷하고 설득력 있는 연기를 선보인 것이다. 그녀의 연기는 우리가 주디 덴치에 갖고 있는 대표적인 이미지(엄격하고 까다로우며 강박적이기까지 한 태도가 말과 몸에 고루 밴 모습)를 가장 확실하게 보여준다.

그렇기에 주디 덴치가 스티븐 프리어스와 함께 작업한 최신작 <필로미나의 기적>은 확실히 예외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녀는 이 작품에서 지금까지 만들어온 강인한 인상을 걷어낸 채 약간은 철없어 보이기까지 하는 마음 약한 할머니를 연기한다. 물론 이전에도 그녀의 최고 연기를 감상할 수 있는 작품 중 하나인 <아이리스>(2001)에서 치매 걸린 소설가를 연기하며 연약한 모습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필로미나의 기적>은 그때보다 더 부드러운 표정을 드러내며, 그보다 더 넓은 감정의 진폭을 연기한다. 또는 주디 덴치가 실제 인물인 필로미나를 묘사하며 쓴 표현을 빌리자면 “놀라우리만치 겸손한 용기와 불굴의 용기”를 함께 담아내는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그녀는 수십년 세월이 만들어낸 수만 가지의 감정을 눈가의 주름과 미간의 찡그림으로 다시 걸러내 보여주는데, 그때 그녀의 표정은 우리가 머릿속에 익숙하게 떠올리던 신경질적으로까지 보이던 강인한 얼굴과는 거리가 멀다. 곧 무너질 듯한 연약함을 붙잡은 채 속으로 아픔을 모두 삼키는, 그래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단단해 보이는 인물을 스크린에 새긴 것이다. 그리고 이런 주디 덴치의 연기는 수십편의 영화를 통해서도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그녀의 또 다른 모습이 남아 있음을 새삼스럽게 알려준다.

그런 맥락에서 다시 생각해보면 주디 덴치가 20대 때 연기했던 오펠리아와 줄리엣이 어떤 모습이었을지 정말 궁금해진다. 그리고 이제는 볼 수 없는 그 연기에 대한 아쉬움을 잊기 위해서라도 그녀가 더 많은 작품에서 다양한 연기를 펼쳐주기를 바란다. 그녀는 아직 우리가 보지 못한 또 다른 면모를 숨기고 있을 것이다. 물론 이는 약간의 놀라움과 함께 <필로미나의 기적>을 보며 했던 생각이다.

magic hour

모든 것을 비워낸 그녀의 맨 얼굴

영화 속 주디 덴치의 얼굴은 항상 분노, 슬픔, 근심, 후회와 같은 어떤 농축된 감정들을 가득 안고 있었다. 이는 물론 그녀가 연기한 강렬한 캐릭터 때문이기도 하지만 희미한 감정의 실마리를 붙잡아 뚜렷하게 증폭시키는 주디 덴치 특유의 연기 방식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맥락에서 주디 덴치의 또 다른 연기 방식을 볼 수 있는 작품이 바로 <아이리스>다. 치매에 걸려 언어를 잃어버린 소설가 아이리스 머독을 연기한 주디 덴치는 영화에서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을 비워낸 얼굴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작품을 보고서야 우리는 주디 덴치의 ‘맨 얼굴’을 볼 수 있다. 이때 무감정의 감정을 연기하는 그녀의 얼굴은 생각보다 순진해 보이고, 생각보다 예쁘다. 영화를 보고 나면 지금까지 주디 덴치가 연기한 인물의 얼굴들이 조금은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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