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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영] 긍정을 위한 의심
정지혜 사진 최성열 2014-04-14

정재영

갈 길을 잃고 모든 걸 포기한 인간의 모습이 바로 이런 걸까. 눈 덮인 자작나무 숲에 웅숭그리고 있는 <방황하는 칼날>의 이상현 말이다. 시간조차 얼어붙은 듯한 그곳에서 돌처럼 굳어버린 사내 이상현을 배우 정재영이 연기한다. 올해 초 <플랜맨>에서 1분 1초까지도 딱딱 맞춰 살아가는 한정석이던 때의 정재영과는 전혀 포개질 수 없는 다른 세계의 얼굴을 하고 그는 나타났다. <실미도> <내가 살인범이다> <카운트다운> 같은 묵직한 전작들과 비교해봐도 그의 눈빛은 유난히 공허하다. 눈빛뿐만이 아니다. 얼굴, 심지어 온몸이 텅텅 비어 모든 기운이 빠져나간 것 같은 그는 산 자라기보다는 살아 있으나 죽은 자에 훨씬 더 근접해 보인다. 아마도 그건 상현이 딸 수진의 죽음을 알게 된 순간부터였을 거다. 절대로 메워질 수 없는 커다란 구멍이 그의 마음에 생긴 것이다. 곧이어 그에게 도착한 한통의 문자. 수진이 또래 아이들에게 성폭행을 당해 죽음에 이르렀고 이 모든 과정을 찍은 동영상이 있다는 메시지. “답답한, 그러나 지극히 평범”했던 상현은 이때부터 넋을 잃고 걷고 또 걷는다. 딸을 죽인 자들을 찾아 나서는 아버지의 외로운 사투의 시작이다.

“상현이라는 캐릭터가 좋아서라기보다는 작품에서 뿜어져나오는 정서, 사건을 바라보는 여러 가지 시각에 더 많이 끌렸던 것 같다.” 작품의 매력에 대해 말하는 정재영의 이 말 속에는 <방황하는 칼날>이 인물들간의 액션으로 움직이는 영화가 아니라는 의미도 포함한다. 대신 영화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예측 불허의 상황 속으로 떠밀려 들어간 상현의 리액션을 지켜보는 쪽을 택한다. 배우 정재영의 고민은 여기에서부터였을 것이다. 그는 상현이 어떤 사람인가를 궁리하기보다는 주어진 상황에서 상현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야 했다. 연기하는 입장에서는 이런 식의 접근이 괴로울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명확하게 이거다 싶은 게 하나도 없었다. 막연했고 계속 의심했다. 매 순간 여러 가지 해석을 하며 연기에 임해야 했으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를 찾지 못한 채 그냥 촬영한 적도 있었다.” 매 컷, 매 신 한번도 그냥 간 적이 없다고 할 만큼 그는 촬영 내내 ‘상현이라면’이라는 물음표를 온몸에 붙이고 다녔다. 하지만 바로 이 점, 즉 작품 안에서 상현이 할 수 있는 여지가 의외로 많다는 게 “탐구하는 재미”를 찾는 배우 정재영의 도전에 심지가 돼줬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해야 관객이 공감할까를 고민하며 찍은 작품들과 달리 이번엔 내가 상현에게 공감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 그래야만 내가 전진할 수 있는 작품이었으니까.” 오직 이상현과 정재영만이 치러낸 팽팽한 대결. 상현이 되기 위한 그만의 해법이었다. 한발 한발 걸어나간 상현은 마침내 딸을 죽인 범인들을 직접 죽이는 데까지 이른다. 피해자의 아버지가 살인자가 되는 기막힌 순간이다.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상현은 여기까지 온 것일까. “분노나 슬픔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보다는 딸에 대한 미안함이 가장 크지 않았을까.” 약한 자를 끝내 지켜주지 못한 또 다른 약자가 느낄 법한 책임감 같은 것일까. 상현이 거리의 수많은 사람과 경찰들에 둘러싸여 딸을 죽인 아이와 정면으로 마주서게 되는 후반부 장면은 이 모든 상현의 심리를 응축해낸다. 마치 사람을 죽인 자로서의 최후 변론이자 죽은 딸의 마지막 변호를 하는 듯한 인상마저 들 정도다. “어차피 상현에게 남은 인생 따위는 없다. 이미 그는 자작나무 숲에서 정신적으로 죽은 거나 마찬가지니까. 다만 마지막 순간에 뭔가 한마디 더 하고 죽겠다는 의지가 크게 작동하지 않았을까. 아무도 없는 눈밭에서 그렇게 죽기에는 상현이 너무 억울한 거다. 딸의 죽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든 알리고 죽는 게 맞다고 생각한 것 같다.”

“원작에서 ‘칼날’은 ‘심판’을 의미한다. 선악의 이분법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심판의 잣대는 흔들릴 수밖에 없지 않을까.” 정재영의 말대로 ‘방황하는 칼날’은, 명확하고 확실하다고 믿어온 세계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흔들릴 만한 여러 이유와 사연이 있다는 비유의 말이다. 시종일관 파국으로 치닫는 영화에 리얼리티가 존재한다면 “뒤죽박죽”인 상현을 붙잡고 끝까지 방황하기를 멈추지 않은 배우 정재영의 우직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렇게 방황하며 또 한 걸음 전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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