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명아, 저 감독 잘할까, 의심하지 않았니?"
Q | 재명아, 내가 기억하는 한 너는 늘 아르바이트를 했던 것 같아. 1학년 여름방학 때부터 졸업하는 그날까지 쉬지 않고 했잖아. 돈도 수억 벌었을 거야. 너도 알다시피 우리집은 부자도 아닌데 나는 한번도 아르바이트한 적이 없었잖아. 쟤는 별로 못사는 집 딸 같아보이지도 않는데 왜 저러나, 늘 궁금했어. 몇시에는 아르바이트 몇시에는 영화보고…. 너의 그 빈틈없이 짱짱한 일과, 숨 안 막혔냐? 그리고 그 급한 성격. 네 성격이 얼마나 급한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늘 하는 말이지만, 대학교 때 분식집에 가면 너는 비빔밥이나 짜장면 절대로 끝까지 다 안 비벼서 먹었잖아. 한두번 휘휘 젓고 후닥닥 먹고나서 “가자 미연아” 하면 나는 그때까지 짜장면 비비고 있고…. (웃음) 초반에는 아, 내가 너무 늦게 먹는 거구나 맞췄는데 나중엔 포기했어. 극동스크린 다닐 때 했던 말도 기억나냐? 아침에 화장실에 가서 앉아 있어도, 이것도 해야 되고 저것도 해야 되고 생각하고 있으면 정작 볼일도 제대로 못 본다고 했던 말. 넌 늘 그랬던 것 같아. 정치적인 멘트가 아니라, 그런 지독한 면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같은 상황이 가능했다고 보지만, 늘 너무 궁금하긴 했어. 단순히 저 사람의 캐릭터라고만 하기에는 해소되지 않는 부분이었거든.
A | 음…. 용돈을 부모에게 ‘갈취’해서 쓰는 걸 죄악시하는 그런 마음이 있었지. 대학갈 정도까지 키워줬으면 아르바이트 하던 뭘 하던 자기밥값 정도는 벌어야겠다는 생각. 장점이라면 그렇게 지독하게 살아왔다는 거고 단점이라면 재충전, 자기점검의 시간을 가진 적이 한번도 없다는 거야. 학교 때도 니 말대로 그랬는데 취업하고도 단 하루도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오랫동안 맘편하게 쉬어본 게 너 보러 파리갔다가 같이 1달 동안 유럽여행다녔던 때야. 지금도 보면 주중에는 뭘 하고 주말에는 아이하고 뭘 해야 하고… 하는걸 쫙 계획을 잡아놔야 직성이 풀리니까. 하루라도 멍하게 쉰 적이 없었던 것 같아. 할 수 없어, 너는 그게 캐릭터라고 하긴 뭐하다고 했지만, 그게 내 캐릭터인 것 같아.
Q | 이건 근본적으로 데뷔를 하는 나에 대한 고민이기도 하지만, 제작자로서 신인감독에게 하는 의심이 들지 않았는지 하는 거야. 친구로서 잘했으면 좋겠다는 건 다른 마음이고 과연 저 감독이 잘할 수 있을까? 라는 의심이 들었던 순간은 없었니?
A | 매번 그래. 모든 신인감독에게 품는 의문이 있다고. 저 사람이 저걸 잘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을 항상 하지. 너 같은 경우엔 프로듀서나 연출부를 했지만 단편영화를 안 해봐서 실제적인 콘티 감각이라든지 영화적 메커니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자기가 직접 쓰지 않은 시나리오가 아니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지. 그래도 안심이 됐던 건 잘 아는 사람니까 서로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하진 않겠구나. 이 시나리오와 감성이 닿는 사람이다, 그리고 <조용한 가족> 프로듀서를 할 때 지켜본 결과 사고가 유연하고 균형감각이 있다는 확신을 했지.
Q | 이 질문을 영화 다 찍고 난 다음에 묻는다는 게 우습지만 <버스, 정류장> 처음 시작할 때부터 묻고 싶었어. 사실 이 시나리오가 장르영화도 아니고 어떻게 보면 애매한 부분이 많잖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명필름에서 <버스, 정류장>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데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 같아.
A | 글쎄, 계속 뇌리에 남았어. 이미도씨가 해외영화제용 영어번역을 마치고 팩스로 소감을 보내왔는데 이렇게 쓰여 있었어. “마지막 장면, 버스가 그렇게 멀리 사라져간 뒤에도 한참 여운이 남았다. 마치 어렸을 적 동화책을 다 읽고 어떤 장면이 너무 인상에 남아서 책을 덮고도 한참을 책 사이에 손가락을 끼워넣고 있는 느낌이었다”라고. 화두는 결국 그 손가락인 것 같아. 솔직히 처음 심보경 이사가 시나리오 보여줬을 때 처음부터 재미있고 좋고 그런 건 아니었거든. 그런데 가만히 손가락을 끼우고 싶은, 계속 여운이 남는 그런 시나리오였어. 어린아이앞에서 울음을 터트리며 자신의 심경을 이야기할 수 있는 남자. 어찌보면 정말 재수없고 한심하고 불쌍한 이 두 사람이 처음 만나서 서로를 알아보는 이야기가 마음에 들더라고. 쉬운 이야기는 아닌데 계속 하고 싶은 생각이 머리에 남아 있었어. 그렇게 하겠다고 마음먹고 난 이후로 이렇게 머리 쥐어뜯고 사는 거야. 순간의 판단 때문에 고통의 터널로 걸어들어간 거지.
“미연아, 왜 졸업도 안 하고 연극판으로 갔니?”
심재명이 친구 이미연에게
Q | 미연아, 너 4학년 말에 극단에 들어간다고 졸업장 없어도 된다고 학교를 떠났을 때 난 정말 궁금했어. 제일 친한 친구가 떠나고 혼자 남겨져서 섭섭한 마음 한켠에, 쟤는 졸업도 얼마 안 남았는데 뭐가 급하다고 저렇게 사회로 뛰쳐나간 걸까? 하는 의문. 그때 일기에 “나는 괜히 그런 마음에 입을 꼭 다물고 다녔다…”고 썼던 기억도 나.
A | 내 성격 그렇잖아. 너도 알다시피 스스로가 좋게 표현하자면 유유자적하면서 중용적인 거고 남들 눈에는 우유부단하단 이야기를 많이 듣긴했지. 이것도 맞을 수 있고 저것도 맞을 수 있겠다는 생각. 지나고보니 넌 늘 그런 맥락에서의 내 게으름에 대한 지적을 많이 했던 기억이나. 너 지금 싫으니까 안 하겠다는 거 아니야? 졸업도 마찬가지야. 게으름의 소치라는 거지. 모르겠어. 너에 견주어서 이야기하면 그렇겠지만, 어허 이러다 싸우겠다. (웃음) 그렇게 우리는 많이 다른 사람들인가봐. 하지만 그 다름이 우리를 친하게 만든 게 아닐까?
Q | 물론 <버스, 정류장>이란 영화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미연이 너와 맞을 거란 생각을 막연히 했고 너도 시나리오 보고 의욕을 보였지만 남이 쓴 시나리오를 들고 작업한다는 게 만만치는 않았을 거 아냐. 작가, 감독, 프로듀서가 각 시나리오를 바라보는 오차를 극복해나가는 어려움은 없었는지. 이게 정말 만만한 듯 쉽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만들기 어려운 이야기잖아.
A | 전적으로 동의해. 장점도 단점도 분명한 시나리오였으니까. 하지만 시나리오 수정부터 캐스팅하는 순간까지는 이건 어떤 이야기다라고 받아들인 건 아니지만 어떤 정서다 하는 것을 암묵적으로 공유했기 때문에 일의 진행이 편했는데 지금, 개봉을 앞두고는 솔직히 딜레마가 있어. 크게 보면 이 영화가 멜로드라마라는 장르에 정확히 들어맞지 않지만 마케팅에서 당연히 멜로드라마의 범주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아. 그래서 처음부터 위험성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막상 닥치니 혼란스럽긴 하다. 타협 아닌 타협을 한 지점이 있는 건 아닌지, 예를 들어 내가 볼 때는 이 부분 음악을 안 넣어도 될 것 같은데 생짜로 놔둬도 되는데 보는 사람들은 부담스러워 해서 음악을 넣은 부분도 조금 있잖아. 물론 명필름이란 회사가 거짓말하는 마케팅은 안 할 거라는 100% 확신이 있고, 그런 마케팅이 망하는 지름길이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는 사람이지만 그 사이의 딜레마가 아직도 있지. 어느 제작자나 감독이 가지는 평행선 같은 게 있는 거니까. 물론 그 간극을 최소화하는 게 관건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