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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전영객잔] 그는 ‘힘’이 있었다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이라는 역(力)을 기억하며

<마스터>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이 받아야 한다. 억지를 좀 피우자면 그가 <링컨>의 병사 중 하나로 나왔건 <레미제라블>의 시민 중 하나로 나왔건 상관없이 우리는 그를 택했을지도 모른다. 호프먼은 단지 영화 속 인물이 되는 게 아니라 영화 속에 있는 또 다른 한 세계가 되곤 하기 때문이다.” 2013년 오스카 시상식을 앞두고 각 부문의 수상자를 예측하고 주장하면서 놀이하는 기분으로 썼던 기사의 일부다. 지나치게 명랑한 애정 표현이라도 너그러이 용인될 만한 축제의 자리라고 여겼고, <마스터>의 호프먼이 남우조연상을 받아야 한다고 우기며 그렇게 썼다.

거의 정확히 일년 전 그때에 지금과 같은 글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글을 지금 쓰고 있다. 다시 보니 저 표현은 명랑함보다는 맹랑함쪽에 가깝지만 도로 주워담지는 않을 생각이다. 호프먼의 죽음은 근래에 개인적으로 접한 가장 얼떨떨한 영화사적 사건 중 하나다. 그의 죽음은 피터 오툴의 죽음과 다르다. 그를 할리우드 부동의 스타로 만들어준 <카포티> 이후에 배역에 대한 좀더 강화된 발언권을 얻었던 것으로 보였고 그런 그가 더 중대하고 새로운 국면으로 진전해가고 있음이 얼마간 느껴지던 찰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한 비보 이상으로 중대했던 그리고 더 중대하리라 예감되던 한 세계의 상실이 맞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나와 마찬가지 감정을 느끼는 이들이 호프먼이라는 세계를 잃고 추모를 바쳤고, 나도 뒤늦게 비슷한 걸 적으려는 참이지만, 다만 방법이 동일하지 않다. 내게는 무엇을 하지 않을지부터가 자연스럽게 먼저 정해졌다. 그의 생애 동안 있었던 사실들을 꼼꼼하게 정리하여 그의 연보를 작성해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감정적으로 그와 교감한 나의 상념에 몰입하여 막무가내의 사적 고백을 펼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의 의중이 담긴 말과 일화들을 충실히 정리하는 한편 신뢰할 만한 평자들이 쓴 평가들을 경청하며 어느 예술가의 미완의 초상을 그려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혹은 많은 매체들이 이미 한 것처럼 그가 연기한 영화 속 명장면들을 꼽아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게 일반적인 추모의 한 방식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을 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내게는 먼저 정해졌다.

대신에 다른 방식이 정해졌다. 나는 그저 나의 기억만을 매개로 하여, 그의 출연작 중 내가 본 작품들만을 대상으로, 그중에서도 내게 인상적이었던 작품들만을 대상으로, 그의 연기라는 예술 활동의 국면에 관하여 비평적으로 재감각해볼 생각이다. 그러니 애정을 바탕으로 비평적 허구를 밀고 나가는 과정에 뒤따를 오류에 대해서는 미리 사과의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 이런 방식은 처음부터 그러리라 작정했던 건 아니었고 그의 영화를 두서없이 몇편쯤 다시 보다가 우연히 세워진 방향이다. 너무나 일반적이어서 상투적으로 들리기까지 하는 영화 감상의 일련의 태도(그러니까 호프먼의 연기를 보다가 또 문득 떠올린 나의 감흥의 혼잣말)가 사실은 예술철학적 한 개념과 밀접한 상관성을 지녔다고 가정하게 된 것이다. 나는 그 상관성을 이 기울어진 추도문의 전제로 설정하고는 호프먼이라는 세계로 들어가보려고 한다. 아니 그런 방식으로 그를 떠나보내려 하는 중이다.

배우의 연기에서 ‘힘’은 뭘까

내가 호프먼이라는 배우를 각인하게 된 건 조엘 슈마허가 연출한 영화 <플로리스>에서다. 로버트 드 니로와 호프먼이 주인공인데, 드 니로는 마초적인 성향의 퇴역 군인 왈트, 호프먼은 같은 건물 옆방에 사는 게이이며 가수인 러스티를 연기했다. 처음에 둘은 서로를 경멸하지만 일련의 사건을 겪고 왈트가 장애자가 되면서 러스티에게 전적으로 기대게 된다. 연출은 범상했고 영화는 지루하지 않은 정도였다. 예상 밖이었던 건 그저 드 니로의 호연을 보는 정도거니 했는데 호프먼의 연기가 훨씬 더 강력했다는 사실이다. 잘생겼다고 말하기는 좀 어려운 이 퉁퉁한 사내가 머리 끈을 정성스럽게 매고는 손은 가슴 언저리에 대고 손목은 90도로 내리 꺾고 좌우로 몸을 리듬감 있게 조금씩 흔들며 대사를 뱉어내거나 혹은 거의 같은 몸짓이되 훨씬 더 큰 반경으로 움직이며 목이 터져라 고함 지르면서 드 니로를 상대할 때 적어도 그 순간 그가 대배우 드 니로를 압도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호프먼의 연기가 드 니로의 연기를 압도하고 있었고, 압도한다는 건 호프먼의 연기가 드 니로의 연기보다 훨씬 더 힘 있어 보였다는 뜻이다.

이후에도 호프먼의 연기를 보며 막연하게나마 유사한 느낌을 자주 받았다. <펀치 드렁크 러브>에서 애덤 샌들러를 ‘엿 먹일 때’ 힘이 있었고, <카포티>에서 사형 직전의 범죄자를 꾀어내 비밀을 털어놓게 할 때 힘이 있었고,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에서 동생을 매수하여 사건을 공모할 때 힘이 있었고, <다우트>에서 메릴 스트립에 맞설 때 힘이 있었고, <머니볼>에서 불충한 야구감독으로 단장의 말을 거스를 때 힘이 있었고, <마스터>에서 그 짐승 같은 와킨 피닉스를 다룰 때 힘이 있었다. 그의 연기는 분량을 가리지 않고, 주연인 것과 조연인 것에 무관하게, 힘이 있었다. ‘힘이 있다’는 이 표현을 나는 지금 지루할 정도로 강조해서 썼는데 그 반복이 주는 물리적 세기에 기대보고 싶어서라는 걸 부정하진 않겠다. 그러니까 힘이 있다는 이것이 앞서 말한 너무나 일반적이어서 상투적이기까지 한 일련의 감상(감탄)의 태도다.

하나의 예술품이나 예술 행위를 경험하고 나서 그것이 충만하고 강렬한 감동을 전한다고 인정될 때, 하지만 딱히 특성이나 특징을 가시적으로 일일이 선별해내기는 곤란할 때 “거기엔 힘이 있다”고 두루뭉술하게 우린 종종 말한다. 예술 감상의 반경 안에서 우리가 이 표현을 얼마나 무의식적으로 자주 쓰는가 알아채기 위해서는 정치한 분석력이 아니라 약간의 세심함이 필요할 뿐이다(며칠 전에도 나는 동료기자에게 내가 보지 못한 박찬경의 영화 <만신>은 어떠냐고 물었고 그는 그 영화에는 힘이 있다고 잘라 말했고 나는 그다지 반문 없이 건성으로 그 감상자의 마음을 알겠다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사용되는 빈번한 빈도에 비하여 그 가치에 대해서는 덜 질문받는 상황이라는 걸 감안하면, 이 표현은 감상평으로서 다소 까다로운 문제제기의 실마리가 된다. 물음인즉, 힘이 있다는 저 흔한 말은 감상자의 섬세하지 못한 습관적 표현인가 아니면 근거 있는 무엇으로부터 나온 절대적 파생인가. 구분은 쉽지 않다. 때론 둘 다일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나는, 그 표현이 비록 무성의한 습관으로 전락한 면모가 있다고는 해도 그와 같은 습관의 언어를 만든 데에는 본래 합당한 이유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는, 그리고 호프먼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라면 오히려 그것이 방점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니겠느냐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배우의 연기에서 힘은 뭘까. 우선은 영화의 경우에 그것은 영화를 이루는 다음과 같은 것들과 거의 동등한 수준에서 작동하는 어떤 것으로 분류되고 감지되어야 하는 건 아닐까 싶다.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숨결 내지는 비명 내지는 웃음, 새벽 4시와 오후 12시라는 시간,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계절, 추위 혹은 더위라는 기후, 느림 혹은 빠름이라는 속도. 이것들은 우리의 물질적 세계를 이루는 확실성의 요소이지만 비가시적으로만 현존하는, 형체는 없지만 필시 존재하는 것들이다. 그것들이 비가시적이지만 반드시 존재하는 것처럼 배우가 연기로 실어나르는 힘도 그와 같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이것들의 우선적인 공통점이라면 함부로 정의내리기 어려운 비밀이라는 데 있을 것이다.

나는 배우가 아니므로 배우들이 그 힘을 어떻게 감각적으로 조직해내어 눈에 보이게 하는지 과정상의 비밀을 말할 자격은 못되지만 이런 점에는 흥미가 간다. 어떤 배우들은 말하기를, 종종 그들의 초년 시절에 기초적인 훈련 한가지를 요구받는다고 한다. 자, 들판에 서 있는 나무가 되어보세요, 흐르는 강물이 되어보세요, 숲에서 포효하는 한 마리 곰이 되어보세요. 나는 이 요구가, 슬픔을 표현해보세요, 기쁨을 표현해보세요, 같은 인간의 정서를 표현해보라는 요구보다 훨씬 더 신기하게 들린다. 사람은 슬픔과 기쁨의 정서를 지니고 있지만 나무나 강물이나 곰이 될 수 없다. 모사를 할 수는 있지만 그걸 탁월한 연기라고 말할 순 없다. 더군다나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그 모사의 유능함을 식별할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아무리 해도 정답이 없는 결국 불가능한 미션이다. 그런데도 초년의 배우에게 연기의 기본 소양으로서 그런 훈련이 요구되는 것이라면 그건 연기의 핵심이 빼어난 모사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것으로 들린다. 사람에게 나무가 되고 강물이 되고 곰이 되어보라는 건 정말로는 그렇게 할 수 없지만 상상으로라도 그 개체의 생명과 생성과 지속을 느껴보라는 뜻으로 들린다. 저것들이 살아 있고 존재할 수 있도록 지탱하는 힘을 상상하고 느끼라는 것으로 들린다. 연기라는 일에 있어 그 힘을 느껴야 하는 것이 기본이라면 그 힘이 연기의 중요한 근본 중 하나라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예컨대 우리는 좋은 연기를 보았다고 느꼈을 때 누군가의 연기력이 좋다고 말한다. 반대로는 연기력이 떨어진다고 말한다. 즉, 힘에 방점을 두고 평가한다. 그런데 이런 궁금증이 생기는 걸 막을 수 없다. 왜 연기미나 연기태 같은 말은 쓰이지 않는 반면에 연기력이라는 말은 있는 것인가. 적어도 우리의 모국어 안에서 그 말은 왜 다른 언어들에 앞서 판단의 기준과 가치를 지니게 되었는가. 게다가 왜 상용의 언어가 되고 때로는 오용의 언어까지 되었는가. 그러니까 우리는 왜 연기의 아름다움이나 연기의 생김새를 칭송하기에 앞서 연기의 힘을 칭송하는가. 혹은 왜 그 반대인가.

힘이 미와 형태를 활동시키는 핵심적 모처일 것이라는 가정은 이때 설득력을 갖게 된다. 힘이 활동해야 미와 형태가 조직된다는 것이다. 맞다. 이 순간에 나는 지금 누군가의 예술철학 개념을 확실히 의식하고 있다. 니체의 ‘힘에의 의지(누누이 알려져 있는 것처럼 돈이나 명예나 권세를 차지하려는 권력 표상의 의지가 아니라 생의 자발적이고 긍정적 의지)’를 의식한 질 들뢰즈의 ‘힘의 포획’이라는 예술철학론을 의식하고 있다. 예술이 더도 덜도 아닌 만물의 힘의 포획이라고 생각한 건 들뢰즈였다. 그런데 저 배우들의 기초적인 연기훈련에 의거한다면, 그들에게 이것은 저 멀리 고고한 개념이 아니라 매번 눈앞에 닥치는 본능적인 실행과 이행의 차원이다. 이른바 ‘연기력’이라고 불리는 것의 기초에는 힘의 포획이라는 능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니 연기력이란 ‘힘을 포획하는 힘’이다.

그는 어떤 힘들 그 자체를 연기한다

모든 배우들에게 앞선 전제가 적용될 것이지만 그 이상을 입증하기에는 내가 모르는 변수들이 너무 많다. 애초에 호프먼의 연기력(힘을 포획하는 힘)은 과연 어떤 특정성을 지니는가 하는 것이 막연하게나마 우리가 껴안고자 한 질문이었으니 거기에만 한정하여 말하는 게 좋겠다. 다만 그 질문을 위해서라도 이런 차이를 생각해보는 건 자극이 된다. 우리는 호프먼을 대니얼 데이 루이스보다 메릴 스트립보다 훨씬 더 뛰어난 배우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의 연기력이 저들의 연기력보다 우세한가. 그의 힘의 포획이 저들의 힘의 포획보다 유능한가. 나는 솔직히 망설여진다. 호프먼이 저들과 비견될만한 뛰어난 배우라고는 생각하지만 저들을 따돌리거나 뛰어넘을 정도의 수준이라고 주장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렇다면, 다시, 호프먼 연기력의 특정성은 무엇인가. 혹은 호프먼의 연기력이 작품과 맺고 있는 특별함은 무엇인가.

호프먼을 특별한 배우로서 인정받도록 한 몇편의 주요한 영화와 배역들이 있다. <펀치 드렁크 러브>에서 그는 주인공 애덤 샌들러를 등쳐먹으려는 악덕 폰섹스 사업자로 등장한다. 주인공에게 돈을 요구하지만 그걸 거절당하자 부하들을 시켜 돈을 갈취해 온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는 돌연 등장하여 주인공과 한판 대치한다. <머니볼>에서는 게을러 보이는 야구감독이다. 팀의 승리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 같고 돈에 더 관심이 많아 보이지만 고집불통인 건 분명한 그는 젊은 구단주(브래드 피트)의 뜻을 거스른다. <다우트>에서는 어린 소년을 성추행한 것으로 의심받는, 하지만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성향의 신부가 그의 배역이다. 보수적인 성향의 수녀 메릴 스트립이 눈엣가시 같은 그의 죄를 추궁한다. <마스터>에서는 미스터리한 신흥 종교의 교주이며 야성과 분열로 고통받는 한 남자(와킨 피닉스)의 영혼의 동반자다.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에서는 동생(에단 호크)과 서로 짜고 부모의 보석상을 털어 한몫 챙기려다가 일이 틀어지고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아버지의 원수가 되면서 파국의 인생을 맞게 되는 중년의 남자다.

여기에는 일단 표피적으로 어떤 뚜렷한 특징이 새겨져 있다. 혹은 그런 특징이 새겨져 있는 경우에 호프먼의 자리가 빛난다. 다음과 같은 두가지다. 첫째, 그는 양자적 관계의 인물 구도 안에서 한쪽 파트너로서 자주 등장했다. 양자적 관계란 어느 때에는 대립하는 관계(<펀치 드렁크 러브> <머니볼> <다우트>)이지만 또 때로는 짝패나 동료처럼 친화적이거나 협동적인 관계(<마스터>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일 때도 있다. 양자적 관계의 폭은 다소 좁고 단발적인 경우(<펀치 드렁크 러브> <머니볼>)일 수도, 다소 넓고 장기적인 경우(<마스터> <다우트>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일 수도 있다. 둘째, 이것이 더 중요한데, 그 양자적 관계의 한쪽 파트너로 등장할 때, 대체로는 호프먼이 조연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어떤 사태를 촉발하거나 결정짓는 것뿐 아니라 상대방 주인공의 어떤 영역을 침범할 만큼의 막강한 상대자로 자주 군림했다는 사실이다.

‘양자적 관계’의 한축을 이루는 ‘막강한 상대자’. 왜 그런 역할에 그가 적역이었고 또한 그 자리에서 빛이 났을까. 내처 할 수 있는 대답은 그가 오랫동안 할리우드의 시스템 안에서 유능한 조연배우여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뿐일까. 영화계에서는 호프먼과 비슷한 시기인 1990년대 중/후반부터 주목받기 시작했고 폴 토머스 앤더슨 영화에도 함께 출연했고 호프먼과 함께 같은 연극 무대에 오르기도 했고 호프먼만큼이나 좋은 조연으로 2000년대 초반을 지나온 배우 존 C. 라일리의 연기 궤적은 호프먼의 그것과 같지 않다. 그는 영화 안에서 총합의 일부인 경우가 더 많았다. 그렇다면 다소 넘치고 풍만한 호프먼의 외양 때문이라고 하면 어떨까. 하지만 우리가 그토록 호프먼과 헛갈린다고 우스개로 말하곤 했던 잭 블랙은 호프먼과 유사한 역할을 맡은 바가 거의 없다.

혼동되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한 가지가 있다. 호프먼의 막강함을 선악이라는 서사적 도덕의 축에서 절대악의 강도(强度)로 (물론 절대 선의 강도로도)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호프먼은 강력한 양자적 관계를 형성하고 막강한 상대자 역할을 연행하되 절대악이라고 불릴 만한 역할을 맡은 적이 거의 없다. <펀치 드렁크 러브>에서의 폰섹스 사업자? 우린 그가 그 얼마나 희극적으로 퇴장하는지 이미 알고 있다. <미션 임파서블3>의 악당? 그것은 차라리 호프먼의 막강함에 대한 호프먼 자신의 장르적 패러디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영화 속에서는 이단 헌트(톰 크루즈)가 오웬(호프먼)의 피부 가죽을 쓰고 동분서주하는 것이지만 실제 연기의 영역에서는 호프먼이 톰 크루즈의 역할을 대신하여 동분서주하며 연기하는 것이니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우스꽝스러운 상황이다. 호프먼이 톰 크루즈라니….

이렇게 물어야 할 것 같다. 막강하다면 무엇이 막강한 것인가. 아무래도 그건 힘이다. 양자적 대립 관계인 경우에는 그 사이에 밀고 당기는 힘들이 화두가 되고, 양자적 친화나 협동의 관계인 경우에는 양자가 엮고 엮이고 구축해서 상승시키는 힘들이 화두가 된다. 나는 위의 영화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그 힘들의 작용과 반작용, 상승과 하강, 찌그러짐과 펼쳐짐 등이라고 말하고 싶다. 양자적 관계라는 것은 이원론적이라는 뜻도 아니다. 비유컨대 상대를 바꾸고 테이블을 옮겨가며 한번은 단식을 한번은 복식을 치는 이상한 룰의 탁구게임 같은 것이다. 이리저리 심하게 파동치는 작용과 반작용을 이행하는 두개의 굵은 점 같은 것이다.

다음과 같은 우회의 예증이 보다 선명한 이해에 도움을 주지는 않을까. 들뢰즈가 프란시스 베이컨의 미술세계를 조망한 <감각의 논리> 8장의 제목은 “힘을 그리다”이다(이하 인용은 <감각의 논리>, 민음사). 들뢰즈는 짧은 일화 하나를 들려주고 있다. 일군의 “교조주의적 비평가들”이 밀레가 그린 미사의 빵과 포도주, 그러니까 봉헌물을 보고는 저것은 꼭 무슨 감자 자루처럼이나 그려져 있다고 그 엉성한 묘사를 질타하자 밀레는 “두 대상의 공통적인 무게감이 그들 사이의 구상적인 차이보다 훨씬 더 깊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들뢰즈는 “화가인 그는 무게감을 그리려고 했지 봉헌물이나 감자 자루를 그리려고 한 것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들뢰즈는 “베이컨의 형상들은 회화사에서 나온 다음의 질문에 대한 가장 훌륭한 대답 가운데 하나이다. 보이지 않는 힘을 어떻게 보이게 할 것인가?”라고 묻는다. 그러면서 베이컨의 그림들이 바로 “압력, 팽창력, 수축력, 평탄하게 누르는 힘, 늘어뜨리는 힘으로부터 나온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같은 방식으로 물어보되 약간의 변용을 거쳐 답을 구할 수 있다. 호프먼의 연기는 다음의 질문에 대한 가장 훌륭한 대답 가운데 하나이다. 보이지 않는 힘을 어떻게 보이게 할 것인가? 호프먼의 연기가 바로 갖가지 힘들로부터 나온다. 아니 갖가지 힘들로부터 나온다는 것은 더 정확히 말해 호프먼이 연기로 그 힘들을 포획했다는 뜻이다.

교조주의적 비평가들이 엉성하다고 탓한 것이 구성미인 것에 비하여 밀레가 필사적으로 그리려 한 것은 무게감이다. 그렇다면 혹시 우리가 호프먼의 연기를 보고 구성적인 면모, 즉 그의 캐릭터의 형상화 등에 대하여 이렇게 저렇게 논할 때(사실 그의 캐릭터란 대니얼 데이 루이스나 메릴 스트립의 그것에 비한다면 특별할 것이 없다), 실은 그가 필사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힘이자 무게감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가. 심지어는 압력, 팽창력, 수축력과 같은 물리력을 넘어서 연기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추상적 차원의 힘들, 정신력, 친화력, 영향력 등까지도 다루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가. 호프먼은 봉헌물과 감자 자루를 구성적으로 제법 흉내내려는 일반의 배우가 아니다. 마침내 봉헌물이 되고 감자자루가 되고야 마는 저 위대한 배우도 아니다. 그건 대니얼 데이 루이스나 메릴 스트립이다. 여기엔 우위보다 차이의 인식이 필요하다. 호프먼은 봉헌물과 감자 자루의 무게감을, 그 보이지 않는 힘을 연기하는 배우다. 연기에 관한 한 어쩌면 그는 메타적인 배우다.

베이컨의 문제가 호프먼의 문제다. 베이컨이 힘을 그린다면 호프먼은 힘을 연기한다. 그러니 우린 ‘힘 있게 연기한다’와 ‘힘을 연기한다’를 잠시라도 구분하게 된다. 대니얼 데이 루이스와 메릴 스트립이 힘 있게 연기하는 배우들이라면 호프먼은 힘을 연기하는 배우에 속한다. 물론 호프먼도 힘 있게 연기하지만, 저들이 힘있게 연기하여 다종다양한 서사적 캐릭터의 무궁무진한 세계를 펼치려 하는 것과 다르게, 링컨이 되고 마거릿 대처가 되는 것과 다르게, 호프먼은 힘 있는 연기로 영화 속의 어떤 힘들 그 자체를 연기한다. 그럴 때 그가 가장 멋있다. 그러니 우리가 양자적 관계라고 지칭한 건 서사구도 내에서 이 인물과 저 인물의 위치와 형세가 아니라 힘의 위치와 형세이며, 막강하다는 것은 서사나 인물의 세기나 크기가 아니라 힘의 세기와 크기다. 호프먼이 연기하는 건 대개 ‘힘의 성격과 모양새와 크기와 세기와 속도’다. 혹은 그에 관련된 것들이다. 호프먼은 힘을 포획하는 힘(연기력)으로 힘들을 포획한다.

<다우트>

흡수력과 반발력의 경우

호프먼이라는 영화적 활동 기호가 포획하는 힘들은 여러 종류일 것이다. 어떤 힘들이 있을까. 호프먼은 생전에 단독 주연을 맡은 적이 몇 되지 않는다. 상황이 이러하다면 추모의 분위기 속에서 그의 명장면, 명연기를 꼽을 때 그와 같은 단독 주연 작품은 빠지지 않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좀 흥미로운 일이다. 미국의 뛰어난 시나리오작가 찰리 카우프먼의 연출 데뷔작이며 호프먼이 주연을 맡은 <시넥도키, 뉴욕>은 의외로 많이 꼽히지 않는 것 같다. 예컨대 내가 본 매체들 중 <엔터테인먼트 위클리>나 <인디와이어>도 이 영화를 제외했다. 그런데 내가 선정했다고 해도 이 작품은 제외했을 것이다.

<시넥도키, 뉴욕>이 엄연한 실패작이기 때문인가. 나는 이 영화가 작품 그 자체로 실패작이라고까지 생각하진 않는다. 야심 가득한 매혹의 미완성품, 정도로 부르고는 싶다. 이 영화는 무엇보다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가득한 커다란 개념 창고와도 같다. 카프카의 <성>을 극작가와 연극 무대로 살짝 바꾼 다음 끝내 원하는 곳에 입성하지 못하는 한 인간의 생을 그로테스크하게 다룬다. 그 주인공을 호프먼이 연기한다. 문제는 이 영화가 제목 그대로 제유라는 점이다. 케이든(호프먼)이 준비 중인 연극 무대는 점점 더 규모가 커지더니 삶 자체의 거대한 부분이자 제유가 된다.

단순히 말하면 호프먼은 여기서 힘을 포획하기는커녕 거의 힘을 펴보지도 못한다. 적어도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감독 카우프먼은 호프먼의 신체의 활동력을 과소평가한 것 같다. 영화 속에는 케이든의 분신들이 여럿 등장한다. 그런데 카우프먼은 자신이 쓴 시나리오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 말코비치가 나머지 분신들도 스스로 연기하게 하고 <어댑테이션>에서 그다지 뛰어난 배우가 아닌 니콜라스 케이지조차 찰리와 도날드라는 1인2역을 하게 한 것에 반하여 호프먼의 분신들은 다른 배우들이 연기하도록 한다. 의도가 있겠지만 그 때문에 동일한 신체의 무수한 현현이 주는 물리적 힘의 아득함은 사라져버리고 그저 개념적 제유의 제시만 남는다. 더 치명적인 건 갑갑함이다. 개념적 아이디어가 가득 차 있는 반면 배우를 중심으로 보면, 신과 신 사이에 힘이 활동할 간격도 없고, 신 안에서는 힘이 활동할 면적도 없다. 배우의 연기 면에서 힘이 포획된 면모가 있는가 묻는다면, 이 영화는 거의 ‘무기력’하다. 호프먼이 비유의 거대함에 철저하게 짓눌린 경우다.

호프먼의 명성을 드높인 <카포티>의 경우는 단독 주연이라는 희귀한 정황만 같을 뿐 <시넥도키, 뉴욕>과는 반대된 양상이다. 감독 베넷 밀러는 자기의 아이디어를 믿기보다 철저하게 호프먼의 신체의 활용과 변조의 힘을 믿는다. 이 영화에는 플롯의 짜임새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대신 배우가 연기로 힘을 포획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간격과 면적이 주어져 있다. 이 영화는 카포티라는 인물에 관한 전기라고 해야겠지만 실은 카포티라는 인물의 ‘매력’ 내지는 ‘친화력’이라고 불릴 만한 그 힘이 핵심이다. 이 힘이 발동될 때 그는 잔혹한 살인자들에게서 최고의 논픽션 소잿거리를 얻어낼 수 있고, 사교계의 파티에서도 주목을 끄는 인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이 힘이 간교함을 부리기 시작하면 우린 그가 인간적 모순으로 가득 찼다며 싸늘한 도덕적 냉랭함을 보내게도 되는 것이다. <카포티>에서 호프먼의 연기는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하다.

그런데 나는 호프먼의 최고작이라고 손꼽히는 이 영화의 연기에 실은 좀 반대한다. 자유기고가 김정원은 <씨네21> 945호 호프먼 추모 기사에서 호프먼의 체격에 관하여 문득 이렇게 질문한다. “그가 왜 그토록 작아 보였을까.” 나는 이 질문이 예민한 관찰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카포티>에서의 호프먼이 그 인상에 큰 영향을 주었을 거라고 추측한다. <카포티>에서 호프먼은, 물론 카메라의 도움도 받고 있지만, 스스로 신체의 축소술 특히나 목소리의 변조술을 이용하여 몸집을 웅크린다. 태생적으로 큰 몸을 지니고 울림통이 큰 저음의 목소리를 지닌 그가 배역에 따라 약간씩 목소리를 바꾸는 성향이 있기는 했어도 <카포티>에서만큼 얇게 다리미질한 적은 없었다. 실제 인물 카포티의 목소리가 그랬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축소와 변조의 능숙함이 그에게 오스카상도 쥐어줬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카포티>의 호프먼은 적어도 내겐 전에 없이 모사에 치우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앞서 우리의 비유를 가져오자면 호프먼은 <카포티>에서 무게감보다는 봉헌물이나 감자 자루의 형태에 집착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호프먼의 풍채와 저음이 좋다. 대개 그의 힘의 포획은 형태의 변조가 아니라 그 자연스러운 물질적 몸집과 목소리의 울림통에 관계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하여간에 이 문제는 옳다, 그르다 말하기에는 좀더 시간이 필요한 것도 같아서, 나는 그냥 반대한다, 고 썼다.

분량이 결정적인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몇장면 나오진 않지만 <머니볼>에서의 호프먼이 나는 훨씬 더 좋고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메이저리그 야구팀 감독 아트 역을 맡은 호프먼은 원래 늘어나 있는 자기 배를 충분히 이용한다. 호프먼은 그들 야구감독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허리춤 언저리에 퉁명스럽게 손을 걸치고 있으며 저음의 목소리도 여기서는 숨기지 않는다. 특별하게 느껴지는 장면이 하나 있다. 단장과 감독은 지금 대치 중이다. 단장은 자신이 원하는 선수를 기용할 것을 요구하고 감독은 선수 선발권을 지키려는 중이다. 이 와중에 단장이 찾아와 특정 선수 한명을 방출시켰다고 말한다. 그가 먼저 힘을 던진다. 그런데 그 힘에 반작용하는 호프먼의 연기가 내게는 특별해 보인다. 호프먼이 선택하는 건 긴 침묵이다. 대략 4~5초간, 그러니까 짧다고 말하기 어려운, 처음 보았을 때는 약간 당황스러울 정도로 길었던 그 몇초 동안에 그는 어, 하는 표정으로 아무말도 하지 않다가 “트레이드를 시켰다고? 페냐를?” 하고 짧게 뱉는다. 그때 그의 말은 단장이 쏟아낸 힘을 거의 흡수할 때까지 흡수한 다음 강력한 분노를 담아 내뱉는 강력한 ‘반발력’이다. 이 반발력은 철저하게 그 흡수력 때문에 최고치까지 올라간다.

장력과 영향력의 경우

호프먼을 가장 독창적으로 연기하도록 독려하는 감독이라고 해야 할 폴 토머스 앤더슨의 <펀치 드렁크 러브>에서 흡수력 및 반발력은 제대로 그리고 좀더 복잡한 방식으로 먼저 응용된 적이 있다. 앤더슨은 그 자신이 힘에 예민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다. 그중에서도 <펀치 드렁크 러브>가 가장 대표적인 혹은 가장 순수한 힘의 영화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두개의 힘의 축이 주인공 배리(애덤 샌들러)와 폰섹스 사업자 딘(호프먼)이다. 처음에 둘은 전화상으로 막강한 창과 창처럼 부딪친다. 배리가 이것저것 흥분에 차서 따지자 상대방 딘 역할의 호프먼은 전화기에 대고 “주둥이 좀 닥치라”라고 말하는 것을 시작으로 무차별적인 욕을 퍼붓는다. 물론 그가 욕을 하기에 앞서, 마치 상대방이 앞에 있다면 한방 갈기겠다는 제스처로 때리는 시늉을 하는 것 자체가 압권이다. 그러고는 호프먼은 “닥쳐, 닥쳐, 닥쳐, 닥쳐, 닥쳐, 닥쳐…”를 연발한다. 물론 우리는 이 장면에서 <부기 나이트>의 호프먼을 떠올리게 된다. 포르노영화 현장의 붐맨이자 게이인 한 남자. 그는 주인공 남자에게 선뜻 입을 맞췄다가 망신을 당하자 차 안에서 자신을 이렇게 자책하지 않았던가. “이, 병신아, 병신아, 병신아, 병신아…”라고. 지나칠 정도의 반복적 대사, 그것이 의존하는 물리적인 힘의 세기. 감정상으로는 자책과 분노를 담고 있어서 두 장면은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갑작스런 힘의 접합과 상승과 하락과 부딪침과 밀려남을 같은 리듬으로 조직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펀치 드렁크 러브>의 미학적 반전은 그 욕설 장면에 이어지는 뒤 장면에 있다. 이 뒤 장면이 없다면 욕설 장면은 그냥 험한 대립에 불과할 뿐이다. 호프먼은 머리를 깎고 있고 주인공이 그를 찾아왔다. 잠시 대치. 그리고 몇초간의 긴 침묵. 이어지는 호프먼의 짧고 강한 선공. “엿 먹어라.” 그리고 다시 자리를 바꿔 가까이 다가가서는 서로 얼굴을 마주대고 대치. 하지만 이내 또 한번의 반전은 호프먼이 언제그랬느냐는 듯이 깨끗이 꼬리를 내리고 우스꽝스럽게 후퇴하는 것으로 마감된다. 이 일련의 장면에서의 흡수력과 반발력의 주고받음, 밀고 당김, 진동과 반동, 상승과 하락이라는 힘의 방향과 세기와 크기의 향연은, 이렇게 듣고만 있으면 매우 거칠고 상스러운 장면의 연속일 것 같지만 실은 <펀치 드렁크 러브>를 본 사람이라면 알고있는 것처럼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거의 넋이 나갈 정도로 아름다운 리듬의 연속이다.

의심의 여지없는 호프먼의 두편의 최고작. 때문에 그의 연기력에 관하여 비교적 많이 언급된 두 영화 <다우트>와 <마스터>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해도 모자랄 수밖에는 없으니 짧게 주의만 환기해보자. 두 영화는 호프먼이 고함치는 사내의 역할로만 힘을 포획하는 배우가 아니라는 걸 알려준다. 두 영화에서 호프먼은 느리고 은근하며 장중하고 끈질기다. 관점에 따라 <다우트>를 ‘장력’에 관한 영화, <마스터>를 ‘영향력’에 관한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다우트>가 예상 밖으로 엉성한 서사 구조라는 건 잘 말해지지 않았다. 가령 교구의 보수적인 수녀(메릴 스트립)가 진보적이지만 자유로운 신부 폴린(호프먼)을 유아 성추행 혐의로 의심하고 있을 때 사실상 해결 방식은 간단하다. 해당 아이를 불러 정황을 물으면 된다. 혹은 신부가 제안하는 것처럼 그가 몸담았던 전 교구에 연락하여 그의 행실을 조사하면 된다. 서사적 긴장감이 필요하다면 바로 이 지점에서 다시 시작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시도를 모르는 양 두 배우의 공방전이 유지하는 서로의 장력에 이 영화의 모든 걸 걸고 있다. 이 영화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지 간에 스트립과 호프먼만 있으면 된다는 우스개에 가까운 소리는 그래서 나왔을 것이다. <다우트>는 주제상으로는 도덕 공방전인 것 같지만, 작동되는걸 보고 있노라면 두 배우가 합심해서 되도록 한 장소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이뤄내는 복잡한 장력의 ‘판’이다. 둘 중 누구의 승패인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지만, 두 배우가 합동된 힘으로 그 판을 만들되 찌그러뜨려 놓았기 때문에 우리는 정확히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는 왜상으로 이 영화를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유독 이 영화에서 호프먼의 연기에 집중력이 있었던 이유는 필시 상대가 메릴 스트립이라는 실존하는 어마어마한 힘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한편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관계의 비대칭성이란 뒤틀린 사회적 위계질서 같은 것이 아닌, 어떻게든 합이나 질서로 통일되지 않고 잡음과 교란과 혼선 등을 빚어내는 양방의 기울어진 정신의 모양새 같은 것이다… 그렇게 <마스터>는 기형이고 울퉁불퉁하고 어긋나고 찌그러져 있는 애매한 덩어리다. <마스터>는 비정상이다”라고 나는 쓴 적이 있다. <마스터>의 왜상은 프레디(와킨 피닉스)와 랭카스터(호프먼)가 서로에게 건네주는 미스터리하고 비정상적인 영향력 때문에 생긴 것이기도 하다. 특히 랭카스터는 프레디의 정신세계를 지배할 정도로 크고 넓은 인물인 것처럼 보이면서도 프레디를 자기의 잃어버린 욕망으로 삼을 만큼 나약하다. 호프먼은 강건하고도 동시에 나약한 인물 랭카스터의 괴이한 영향력을, 때로는 원인 모를 대사로 때로는 정체 모를 춤으로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실행하고 이행해내고 있다.

희한한 일이지만, 두 영화에는 호프먼이 하는 똑같은 연기가 하나 있다. <다우트>의 신부가 마지막 강론을 마치고 신도들 사이로 걸어 들어가 손바닥을 맞추며 인사를 할 때, <마스터>의 랭카스터가 딸의 결혼식장에서 하객들 사이를 걸어들어오며 그들과 손 인사를 할 때, 한쪽은 그의 뒷모습이고 한쪽은 그의 앞모습이지만, 허리는 굽히고 엉덩이는 실룩거리며 약간은 장난스럽게 약간은 의기양양하게 인사를 하는 그 두 장면이 이상하게도 어떤 비릿한 유쾌함이나 조촐한 쓸쓸함 같은 걸 자아낸다. 하지만 이것이 장력과 영향력을 잇는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솔직히 아직 잘 알지 못하겠다.

호프먼이라는 ‘힘’이 사라졌다

그리고 여기 마지막으로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를 마치 호프먼의 유작이나 되는양 나는 짧게 적고 있다. 이 작품은 호프먼의 유작이 아니라 감독 시드니 루멧의 유작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내게는 호프먼의 유작인 것처럼 자꾸 착각된다. 이 영화가 갑자기 몰아쳐 와서 제어할 수 없게 된 ‘가속력’, 그 때문에 피할 수 없게 된 삶의 ‘불가항력’에 관한 영화여서 그런 것일까. 에단 호크와 함께 출연했지만 결국에 이 영화의 진정한 주연배우는 예상외로 딱한 사람, 호프먼이었다. 영화의 주인공은 앤디(호프먼). 영화는 그의 격렬한 섹스로 시작하여 그가 미소로 계획하고 입안한 범죄로 이어지고 하지만 동시에 그가 예상치 못했던 비운의 사고로 번지고 스스로 나서서 수습하려다 입은 그의 부상으로 치닫더니 결국에는 가느다란 비명과 함께 그의 죽음으로 끝난다. 처음엔 모든 힘들이 다 그로부터 나온 것 같았는데 그 힘들 중 그가 제대로 다스리고 수습할 수 있는 힘은 하나도 없었다. 호프먼이 그 불가항력을 뼈저리게 연기했다.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는 당시에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 보면 끔찍하다 싶을 정도로 호프먼의 마지막을 상상하게 하는 몇 장면들이 있다. 앤디가 마약을 투여한 뒤 취한 상태로 의자에 앉아서 “내 인생은 합해지지도 연결되지도 않았다”라고 중얼거릴 때 그게 호프먼 자신의 삶은 필시 아닐 텐데도 우린 더이상 연결되지 않는 호프먼의 삶을 생각하게 된다. 물론이지만 그가 갑작스럽게 생을 마치지 않았다면 그의 생이나 힘을 기억하는 이런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그 편이 더 좋았을 거라는 건 말해 무엇할까. 하지만 호프먼은 생을 멈췄고 나는 지금 어떤 감독이 평생 한편의 영화를 만드는 것이라면 어떤 배우도 평생 한편의 영화를 만드는 건 아닐까 잠시 생각한다. 호프먼이라는 세계, 호프먼이라는 중대한 힘이 사라진 것이다. 또는 호프먼이라는 힘의 지진계를 우리가 잃은 것이다.

찾아보니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라는 제목은 사람이 죽고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30분 만이라도 천국에 머물기를 바란다는 아일랜드 속담에서 나온 말이라고, 진중권 교수가 몇년 전 알려주었다고 한다. 그렇구나, 그럼 많이 늦었구나. 하지만 그렇다 해도… 악마가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의 죽음을 알기 전에… 이것이 나의 성기고 이상한 추도사의 마지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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