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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신은 아일랜드 남자를 캐스팅했다
장영엽 2014-03-04

앤드루 스콧, 돔놀 글리슨, 에이단 터너… 활약 두드러지는 아일랜드 남자배우들, 한때 캐스팅 기피대상이었던 아일랜드인의 특징은 어떻게 매혹의 원천으로 바뀌었나

드라마 <셜록>과 영화 <호빗> 시리즈, 그리고 <어바웃 타임>의 공통점은? 전형적이지 않은 매력으로 우리를 사로잡는 남자배우들을 ‘발견’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거다. 그 중심에 아일랜드 남자들이 있다. 신사의 나라 영국보다 훨씬 강인하고 거친 땅에서 자라난 그들은, 감추는 것보다 드러내는 데 강하고, 억누르기보다 표현하는 데 그 재능이 있으며, 채 다듬어지지 않은 날것의 매력을 선천적으로 지닌 존재들이다. 영국 젠틀맨과 미국의 건강미 넘치는 남자배우들이 양분하고 있는 할리우드의 주류에 어느덧 깊숙이 침투한 이들은 어떻게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나. 아일랜드 남자배우만의 독특한 매력과 그 역사를 들여다보았고, 리암 니슨, 콜린 파렐의 뒤를 이을 차세대 아일랜드 라이징 스타들을 소개한다.

<논스톱>의 리암 니슨.

그러니까 이들에 대한 호기심은, 드라마 <셜록> 시즌2 세 번째 에피소드의 어떤 한 장면에서 비롯됐다. 이어폰을 꽂고 런던탑을 관람하던 짐 모리아티(앤드루 스콧)가, 순식간에 철통 보안을 뚫고 왕실의 보석을 몸에 두른 채 영국을 충격에 빠뜨리는 장면 말이다. 아일랜드 억양을 쓰는, 아일랜드 이름을 가진 남자가(게다가 아일랜드 배우가 연기한다!) 영국의 대표적인 요새였던 탑에 침입해 가장 영국적인 탐정(셜록 홈스)을 도발하는 모습은 거대한 선전포고처럼 느껴졌다. “지성이 섹시함의 새 기준이 됐다”(Brainy is new sexy)는 <셜록>의 명대사를 빌려 말하자면, 가장 아일랜드적인 모습이 섹시함의 새로운 기준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다고 할까.

‘전조’는 <셜록>에서만 엿볼 수 있는 게 아니다. 전세계를 겨냥한 아일랜드 배우들의 ‘아이리시 인베이전’은 이미 시작됐다. 지난해 영국 로맨틱 코미디의 명가 워킹타이틀이 <어바웃 타임>을 통해 야심차게 내놓은 ‘비장의 무기’는, 휴 그랜트, 콜린 퍼스의 계보를 이을 젠틀한 영국 신사가 아니라 돔놀 글리슨이란 괴상한 이름을 가진 평범한 외모의 아일랜드 남자였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점점 마음이 가는’, 잘생김을 넘어선 그의 기묘한 매력에 빠진 이들이 적지 않았다. 피터 잭슨의 3부작 블록버스터 <호빗> 시리즈에선 분량도 그다지 많지 않았던 난쟁이 ‘킬리’ 역의 에이단 터너가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미국의 새로운 ‘섹스 심벌’이 될 준비를 마친,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의 ‘크리스천 그레이’ 제이미 도넌은 어떤가. 이처럼 최근 영미권 주류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중심부에 깊숙이 침투한 아일랜드 남자배우들은, 이미 성공적으로 안착한 케네스 브래너, 리암 니슨, 피어스 브로스넌, 콜린 파렐 등의 선배배우들과는 또 다른 활력을 업계에 불어넣고 있다.

<어바웃 타임>의 돔놀 글리슨.

투박하고 강인한 얼굴이 주는 매력

이쯤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 도대체 아일랜드 남자배우들만의 매력은 무엇일까. 그러니까 영국과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와 웨일스 억양이 어떻게 다른지도 잘 알지 못하는 이국의 관객에게 어필하는 그들만의 매력은 무엇이냐는 거다. 줄리아 로버츠와 함께 <적과의 동침>에 출연했던 아일랜드 배우 패트릭 버긴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아일랜드 남자들이 영화 매체가 좋아하는 어떤 남성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일랜드 남자들은 큼직하고, 투박하고, 강인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전통적인 영국 배우들과는 다르다.” 견고하고 굵은 선의 외모를 지닌 배우 리암 니슨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60대가 된 지금도 여전히 가죽 재킷과 총이 잘 어울리는 이 장신의 배우는, 이미 은퇴했거나 편안한 니트 스웨터를 입고 주로 아버지를 연기하는 동년배 배우들을 긴장케 하는 남성성을 뿜어내고 있다. 피터 그리너웨이의 페르소나로 유명한 마이클 갬본의 말도 경청할 만하다. “아일랜드 남자들은 연기할 때 그저 자기 자신을 빌려주면 된다. 우리는 몽상가이며, 로맨티스트이고, 거짓말쟁이다. 아일랜드 남자들은 배우가 되기 위해 태어났다. 펍에서 그들이 말하는 걸 들어보라. 그곳에 연기를 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이 있다.” 펍에서 맥주를 들이켜며 제임스 조이스와 괴테의 차이점을 토론하는 나라에서, 예술적 감수성과 호방한 기질을 동시에 물려받은 매혹적인 DNA의 배우들이 쏟아져나오는 건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게 갬본의 자부심 넘치는 말이다. 물론 아일랜드 예술계에 기여하는 건 술집뿐만이 아니다. 아일랜드 출신 배우들은 대개 영국 배우들과 마찬가지로 드라마 스쿨 등 예술기관에서의 엄격하고 체계적인 훈련을 바탕으로 양성되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아일랜드에서 자신의 기량을 갈고닦으며 성장한 배우들이 처음부터 할리우드를 비롯한 주류 업계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것은 아니었다. 매끈하고 느끼한 건강한 이미지의 미국 남자와 신사의 품격을 간직하고 있는 영국 남자,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존재였던 아일랜드 남자들은 할리우드에서 주로 강렬한 개성을 가진 악역 캐릭터로 소비되었다. <밀러스 크로싱>의 갱스터, <엑스칼리버>에서 아서왕의 위협적인 아버지로 분했던 가브리엘 번을 생각해보라! 영국 잡지 <엠파이어>는 언젠가 “할리우드영화에 나타나는 최악의 전형적인 아일랜드 인물들”을 선정한 적이 있는데, 그 목록이 압권이다. 술집 단골, 빨간 머리 선동가, 젊은 복서, 어부, 사제, 테러리스트. 이 목록은 아일랜드의 경제적 난관과 피와 폭력으로 점철된 역사, 아일랜드인들의 주량에 대한 웃지 못할 편견이 업계 관계자들에게 얼마나 잘못된 인식을 심어줬는지에 대한 좋은 예다. 아일랜드 배우들이 가진 정제되지 않은 매력을 소비하는 법을 잘 알지 못했던 20세기의 할리우드는, 이처럼 영화의 감칠맛나는 조연으로 더 어울릴 법한 배역을 그들에게 안겨줬고, 더 크게 될 잠재력이 엿보이던 일련의 배우들은 아일랜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은근한 압박을 느꼈다. “영화 관계자들이 그런 말을 하더라. 네 아일랜드 억양을 고치지 않으면 넌 어떤 일도 맡을 수 없게 될 거라고.” 지난 2002년 세상을 떠난 아일랜드의 원로 배우 리처드 해리스는 자신이 타국에서 느꼈던 압박감을 그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피어스 브로스넌처럼 멋진 슈트와 젠틀한 미소를 장착하고, 아예 국적을 가늠할 수 없는 스타성으로 공략하는 배우들도 생겨났다.

<셜록> 시즌2의 앤드루 스콧.

한때의 단점이 현재의 장점으로

하지만 시대가 변했고, 관객의 취향이 바뀌었다. 21세기의 관객은 정제되지 않은 모습에 호기심을 느끼고, 연기력만 뒷받침된다면 독특한 외모도 매력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관대함을 지녔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힘입어 아일랜드 남자배우들은 강인하고 때로는 관능적이기도 한 그들 자신의 정체성을 단단하게 장착한 채 호기롭게 ‘제 2의 도약’을 준비 중이다. <셜록>의 크리에이터 마크 개티스는 말한다. “작품 구상 초기 단계부터 (모리아티를 연기한) 앤드루 스콧의 아름다운 아일랜드 악센트는 꼭 넣고 싶었다”라고. 앤드루 스콧 역시 영국적인 아이콘인 셜록을 연기하는 베네딕트 컴버배치와 대조적으로 자신의 아일랜드적인 특성을 부각하는 게 모리아티를 연기하는 데 더 흥미로울 거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또 다른 영국 드라마 <미스피츠>의 똘끼 넘치는 문제적 인물 네이든(로버트 시한이 연기한다)은, 아예 ‘아일랜드적인 전형성의 나쁜 예’로 여겨져왔던 온갖 비행을 일삼는다. 인터넷 검색을 시작한 지 1초만에, 고혹적인 포즈로 여배우 혹은 모델들과 누워 근육질 몸매를 과시하는 ‘눈요깃거리’를 제공하는 제이미 도넌은 선배배우 콜린 파렐, 조너선 리스 메이어스의 계보를 잇는 옴므파탈이다. 이제 다른 나라 출신의 그 누구와도 같지 않은 개성을 지녔다는 건 아일랜드 남자배우들의 큰 장점이 되었다. 아일랜드의 거친 자연처럼 다듬어지지 않은 매력을 지닌 그들은 앞으로도 꾸준히 지켜봐야 할 할리우드의 뉴 섹시 아이콘이다. 이 미답의 개척지가 전세계 관객을 향해 지금 막 문을 열어젖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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